갈뫼 호수별 보기

50호2020년 [시] 그래서 오월은 푸르다 외 9편 / 지영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63회 작성일 20-12-21 18:19

본문

안녕이 코로나 환자들 눈빛에 내리길

안녕이 의료진 손끝에 내리길

안녕이 봉사근로자들 어깨에 내리길

안녕이 모든 불안 위에 내리길


우리 모두 안녕해야 해요!


----------------------------------


그래서 오월은 푸르다
― 마스크를 말려서 다시 써도 됩니다



마스크 사기 위해 선 긴 줄 위로
우산들이 또 한 줄 이루던 날
마스크 한 장 빨랫줄에 걸어 둔다
갓 태어난 손녀 옷으로
코로나19 재빨리 갈아 탈까 봐
한 손으로 가리고
멀찌거니 빨랫대 한 귀퉁이에 건다


의료진들도 아끼느라 반복하여 쓴다는
귀한 마스크
어느 새 여러 장,
생명 던져
손끝으로 안녕을 피워 올리는 의료진들께
한 손 고이 바쳐 세워 보는 엄지 위로
마가렛 꽃 되어 하늘거린다


오월은 역시 푸르다


-----------------------------------


넌 왜 그렇게 사니



넌 왜 그렇게 사니
라고 물으면 누구는 그냥 웃지요라고 했지만
그러게요라고 답한다


이쯤이면 편하게 놀면서 여행도 하며
느적거려도 좋을 때라고 한다
그러면 정말 좋을까
정말?


칸트는 말했다 향수[향락]는 이념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정신을 우둔하게 만들고, 대상을 차츰 역겹게 만들고, 그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이성의 판단에서 자기의 반목적인 기분을 의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불만족하게 하고, 언짢아하게 만든다고


넌 왜 그렇게 사니
라고 물으면 이백의 산중문답을 떠올리며 답하겠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푸른 산이고
분채물감* 흐드러진 별천지라고


* 한국화 중 채색화에서 사용하는 전통 물감의 한 종류로 아교를 섞어 색을 만들어 채색함


-----------------------------------


고요 일기 10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 그 고요를 처음 만난 건
영혈사에서다.
원통보전 처마 밑에 서 있는데
바람 소리도 삼키고
햇살이 코끝에 부딪히는 소리도 삼키고
들락거리는 숨소리마저 고요함이 덮쳐
없기는 하나 없는 순간이 없는, 그런


의도하지 않은 일상들이 내 안을 헤집고 다니는 요즘
그런 고요가 그립다
이이가 뼛속 깊이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고
초봄 달빛 젖은 매화꽃에 마음을 씻듯
고요에 천천히 담그고 싶다
알맞게 익은 햇살이 잔잔하게 있으면 더욱 좋겠다


----------------------------------


고요 일기 11



갑자기, 갑자기다
불같이 흐트러지는
마음결


가을바람 사이로 켜켜이 일어나는 흙먼짓줄에 걸려
물음표들이 마구 흔들린다


어르신이 되면 왜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르신은 젊은이처럼 치열하면 안 되는지
어르신이라서 불편을 편하게 드러내도 되는지


액자 속에서만 빛나는 물음표
어르신


------------------------------


고요 일기 12



젊은 날에
새벽을 품고 듣던


콜 니드라이 토
콜 니드라이 일
콜 니드라이 월
콜 니드라이 화
콜 니드라이 수
콜 니드라이 목
콜 니드라이* 금
신의 날 금요일
히브리인들이 속죄하며 부른 노래


발끝까지 반성하지 않았기에
사죄도 용서도 없이
어느새
육십을 훌쩍 넘은


젊은 콜 니드라이


*Max Bruch의 콜 니드라이 Op. 47


-------------------------------


고요 일기 13



며칠째 솔숲에 비가 내리더니
먼 기억 속에선 시냇물 소리
새벽녘 뒷산 나무를 내려다보니
새들은 보이지 않고
못다 떠난 그림자만 숲을 이루고 있다


---------------------------------


고요 일기 14



영랑호길 걷는다
일기 예보를 오늘의 운세처럼 믿기에
여기까지 비가 오려면 밤이라야 한다
지금쯤 몇십 구비 먼 길에서 채비를 하고 있을 거다


한 모퉁이 끝에 앉아
호수 건너 붉은 가을 한 모금 마시려니
비가 후두둑 운세를 거스른다


적은 머리숱 사이로 가을이 차갑다
때마침 애완동물 배변 봉투 비치함에서
한 장 슬쩍 꺼내
점잖은 체면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머리에 쓴다


누군가의 배변 봉투가
누군가에게는 빗줄기 가리개가 되었다


이름,
이름이 존재다


--------------------------------


고요 일기 15



가을엔 어디에고 떠다니기 좋다


붉은 잎사귀
미묘한 곡선을 긁으며
고요를 가르는 틈새로
지난 시간들에게 말을 건네니
외롭진 않지만 쓸쓸하고
신나진 않지만 뿌듯하고
무겁진 않지만 침잠해지고
예쁘진 않지만 아름답다


작은 용서로 큰 강물이 흐르고
따뜻한 눈빛 한 줄기 가을 햇살로 익어 내리는
고요 곁에
가만히 앉는다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기에 너무 아름다운 계절
유독
가을에 더 떠다니는 이유다


--------------------------------


고요 일기 16



소리도 멀리서 들으면 아름답다


돌아보고도 싶지 않은 마음 소리
고통의 토로
절망의 잦아들음
한숨의 아픔
낮은 기도
기쁨에 터지는 탄성


시간을 멀리 두고 돌아보니
그제야 아름다움이다


결국
아름다울 지금


------------------------------


고요 일기 17



자정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그 길이
징글벨을 따라 울렁거린다
더 늙어지지 않는 산타할아버지
너무 멀리 있어
영상 속에서만 만나지만
살아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