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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집 19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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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01회 작성일 20-12-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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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이 있었다. 내가 나고 자란 옛집을 그리워해 보는 시간이다.

텃밭엔 노간주나무 푸르렀으며, 앞마당 끝에는 노오란 키다리 꽃이 환하게 불 켠 듯 피어 있고. 70보쯤 가면 뒤란에 상사화가 피어나던 집. 내 마음의 걸음으로 가게 되는 옛집. 오래 한곳에 박혀 있던 돌을 들었을 때, 그 바닥에 고여 더 짙어진 흙 빛깔처럼 내 깊숙한 곳에 선명하게 자리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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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19



엄마로 소임을 다 하라고
신이 지어 준 집
한 생애가 시작된 그곳
낳기 전부터
아기에게 숨결 불어넣어 준 우주


포근하게 머물던 그 집에서 나와
첫울음 울던 아기
울음 그치고 눈부시게 배냇짓 하는 사이
이제 가야 할 길을 안다는 듯
속싸개 사이로 빼꼼 내민 발


첫 딸꾹질이며 옹알이도
그 집을 나온 후의 일
이 세상에 찬란으로 오기 전
아늑하게 품어 준 집을 떠올리는지
눈망울을 굴리는 저 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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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0



시와 정원으로
남은 생 기대기 좋은 부부의 집
그림 그리기 좋은 돌 골라
사포 문지른 후 웃는 얼굴을 그리는 아내
뇌졸중으로 불편해진 몸 끌고
산 중 나무뿌리 찾아 헤매도
집 가꿀 생각으로 힘이 난다는 남편
10여 년 전 추운 이사를 했던 집
연탄 창고를 돌그림 작업실로 꾸미고
낡은 연료통, 쓰다 버린 김치냉장고,
금 간 항아리, 귀퉁이 깨진 기와에도
다정한 그림 그리고, 시 쓰는 아내
텃밭을 꽃밭으로 가꾸어 온 남편
깊은 울음 건너온 사연을 알고나 있는 듯
이파리들끼리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정원
덩굴장미, 담쟁이가 어우러져 뻗어 가고
벌 나비 새와 함께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물어보며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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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1



흙 마당 밖으로 저 잘났다고 튀어 나간 콩알들
세상 다녀온 빨래들 펄럭이며
노간주나무 푸르러 가던 집
마당 멍석에 둥근 밥상이 차려지던 그곳
여름 저녁의 연주에 스르르 별 바라보다 잠들어
아버지 팔에 안겨 방으로 가만히 옮겨지던 한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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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2



열세 살 적 만남 이어 갈 수 있었던 건
편지를 즐겨 쓰던 네 덕분이었지
결혼, 이혼, 큰 병으로 말라가던 너


문득 찾아간 내게 대숲을 보여 줬지
담담하게 그간의 일들을 펼치며
이젠 용서해야겠다는 말을 듣던 밤
네 집 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울림 쳐내느라 뒤척이던


넉 달 뒤 듣게 된 소식
전 남편의 무릎 베고 눈 감았다는
그 집 앞에 서서
어깨 두드리는 기척에 뒤돌아보니
배롱나무꽃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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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3



저녁 산책길
한없이 길어지는 그림자 보며
글썽,
노을 진 저녁 산 바라보며
울먹,
비탈밭 말뚝 맴돌며 울고 있는
흑염소 눈망울 들여다보며
울컥


하룻밤에도 수없이 지었다 허무는 집
내가 내게 질문하며 지새는 밤
막 허문 집 한 채
그 안에 내가 보일까
깊어진 고독의 창문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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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4



다 이해하지 못해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열지 않는 마음을 두드리다 돌아간 날들
이곳은 어디인가
떠나도 사랑은 남아 울먹이고
오래된 살림을 차린
이곳은 어디일까
차마 어둑한 방 불도 켜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글썽이는 저 집
집채만 한 그리움으로 속절없이 깊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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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5



더듬거리며 세상 다 헤맨 듯한
허허 갯벌 구멍집
제 몸을 들이느라
온몸으로 뚫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어디엔가 두고 온 게 있는지
입 딱 벌어지는 일이 있었는지
미처 문조차 마련하지 못한 집
몸을 아주 작게 줄여 들어가
발가락 간질이며 한잠 들고 싶은
눈발 들이치는 한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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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6



삶이 그에게 그리움이라는 밥을 퍼먹였지
기어이 가려는 그곳,
떠난 지 오십여 년이 되었어도
마음에 어룽지고 입술에서 맴도는
꿈결에도 골목, 골목을 달리곤 하지
옛집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오는
어둠과 어둠이 물고 있는 길
기어코 가야할 곳이 있다고
중얼중얼거리며 견뎌온 시간
그곳을 제외하곤 모두 객지일 뿐
도무지 정들이지 못한 날들 떨쳐 내고
그곳을 진하게 한 대접 퍼먹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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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7



문을 열면 바로 후욱 냄새가 쳐들어오지만
같이 먹고, 똥 잘 싸고
차디찬 바닥에
모여 자는 곳
돼지우리라며 코 틀어막지만
예고도 없이 들이치는 마지막 날까지
허기지면 악착같이 울다가
주면 주는 대로 잘 먹고 뒹굴다
평생 가죽옷 한 벌로
더럽게 잘 살다 가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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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8



부러진 가지로 짓는 새 둥지
가끔 그 많은 가지 사이로
작은 연두잎 하나 꽂아 놓은
새가 있다
곧 완연한 봄이 올 거라는 소식
돛대로 세우고
항해라도 떠나려는지
바람이 오는 곳을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는 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