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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아포카토 외 9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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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72회 작성일 20-12-2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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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에 갇혀 답답한 세월, 세상으로 통하는 길들이 막히기 전 1월에 다녀온 이집트 요르단 여행이 위안이 된다. 그런데 춘천문협 일을 맡자마자 생각지도 못했던 바쁜 일들이 생겨나 답답할 시간이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일복 많음을 감사할 수 밖에.

코로나19 사태로 좋아진 것이 있다면 단연 하늘색이다. 늘 찌푸렸던 하늘이 환하게 웃다니 행복하다. 8월 군부대 병사들 대상으로 인생 나눔 힐링 멘토 역할을 앞두고 설렌다. 서로 성장하는 기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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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카토



늘 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쓴 커피 넣은 거 그 뭐더라?
그거 주세요라 말했지


너에게 난 뭘까
달콤한 바닐라 맛일까
그냥 뜨겁고 쓴 커피 맛일까
녹아 섞인 중간 어디쯤일까


마음이 쓰릴 때만
단 것이 당기는 난
처음 이런 조합을 생각해낸 사람을
존경하게 됐지


기억의 실이 풀려나
하늘하늘
무감하게 사라져 가는데
이태리어 의미가
빠지다 익사하다라지 아마


야속한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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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를 볶으며



잘 씻어 물기 빼고
프라이팬에 참깨를 볶는다
나에게 이런 날이
있을 줄 몰랐다
뭉근한 불로 끈기 있게 뒤적이니
습기가 마르는지 김이 오르고
깨알들 색깔 연해지며 움직이고
타닥타닥 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솔직히 잘 몰랐었다
천천히 달아올라 뜨거워져야
비로소 고소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
센 불로 태워 먹기 일쑤였거나
설익은 것도 모르고
고소하지 않다 불평만 했다


한때 서럽다 말했던
아프다 외쳤던 사랑이여
이제 와 참깨 볶으며 깨닫는다
내 어리석음과 조급함을 묻어둔 채
운명이라 돌렸던 미숙함이여
미안하다 내 사랑아
고소한 냄새를 음미하려면
이 모든 과정이 다 필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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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 플라밍고



내가 보았던 인도의 뭄바이는
하늘도 땅도 칙칙한 도시였는데
파란 하늘 담은 호수 위를
긴 다리 핑크빛 홍학들이
우아하게 걷는 모습 뉴스에 나왔다
누가 세었는지 15만 마리란다


도시가 봉쇄되고 사람들 갇히니
새들이 행복해지고
자동차가 서고 공장이 멈추니
하늘색 바람이 시원해졌다
올핸 꽃들마저 유난히 향기롭다


앞만 보고 달리며 살아왔는데
좋은 날 좋은 시간은
내가 만드는 줄 알았는데
노력을 멈추니 몸이 살아나고
무거운 짐 내려놓으니
새 세상도 열리는구나


검은 비닐봉지 날아다니던 거리
삶의 아귀다툼이 잦아든 거대한 고요 위로
꿈결처럼 선홍색 플라밍고들 날아들고
호텔 뭄바이 끔찍한 기억을 덮고

내 가슴 플라멩코* 선율들 요동친다.


* 에스파냐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예부터 전하여 오는 민요와 춤. 격렬한 리듬과 동작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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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지워지다



오랫동안 소식 없던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 보니
자녀가 보내온 것이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번호로
부모의 변고를 대신 보내온 것이다
고인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툭! 하나의 끈이 또 지워진다


오래 만나지 못해도
어떤 풍경 어느 이야기 끝에 떠오르는 사람
짧은 순간이지만 훅 스쳐 지나던
추억의 주마등처럼 빛나던 사람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어 행복했던
언젠간 만나겠지 기대하던 사람


그 문자 이후
번호가 지워지고 이름마저 잊혀지면
파란 하늘이 구름 기억 못 하듯 지워지겠지
무의식의 어둔 창고로 가라앉겠지
지워지지 않는 편린들만 추려져
이야기가 되던 역사가 되든
툭! 사라진 인연을 위해
오늘은 독한 술 한 모금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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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식지 않은
열정이 아직 남았나
태양의 음계를 꺼내는 사람아
길모퉁이 고목나무
칭칭 감싸 안고 돌아올라
푸른 하늘 향해 마음껏 세워 든
붉은 입술 작은 트럼펫


울어버려라
뜨겁게 울고 싶을 땐
검은 죽음 품고 부르는 노래만이
붉디붉어 가슴에 사무칠 수 있으니
잊혀진 사랑일랑 불가마에 녹여
쓰라린 명예로 남기고 싶더냐


아득한
담장 기어올라
그리운 님 향해 열어 놓은 귀
죽어도 닫을 수 없어
활활 불붙어 뒹구는구나
아둔하고 질긴 사랑이여
원망이야 있고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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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송이 목련화


이 땅에
살아 있는 전설 된 나무 한 그루 있네


전염성 돌풍에 날아온
꼬리 감춘 거대한 간판이
꽃등 켜 들 준비하던 그녀를
순간 정수리로 내리덮었고
그 충격 온 몸으로 견디느라
목뼈엔 수많은 실금이 그어졌네


쓰러지진 않았네
붕대도 감지 않고
그해 겨울 찬바람 견디고
돌아온 훈풍에 실금마다 새 가지 돋아
숨겨둔 작은 깃발 하나씩 펼쳤네
뽀얗게 하이얀 미소였네


바람 자욱한 사월 초하룻날
강원도 춘천 오면 꼭 보아야 할
명품이 되어 선 나무 한 그루
찌들린 가슴들 향해
백만 송이 희망을 손에 손 흔드는
우아하게 우람한 나무
꿈꾸는 봄의 얼굴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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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까멜리아 붉은 동백꽃
제주 사람들은 그 나무 울안에 들이지 않아요
목이 뚝뚝 떨어지는 선연한 붉음이
끔찍한 기억을 불러오기에


강원도의 노랑 동백
수줍음과 매혹의 생강나무꽃
점순이와 내 몸뚱이 겹쳐 쓰러지던 그 속에선
정신 아찔해지는 알싸하고 향깃한 내음이 났지요


스물여덟 김유정이 아프게 바라보던
춘천 실레마을 뒷산에선 지금
돈이 되면 고아 먹고 일어나고 싶다던
닭 30마리와 살모사 구렁이 10여 마리가
노랑 동백 사이를 헤치고 다닌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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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 봄



춥지 않은 겨울이
데려온 경자년 봄의 심술
온 세상 덮어 버린 코로나바이러스
공포로 마스크 뒤로
사람들 숨었는데


아무 일 없는 듯
아무 일 아닌 듯
친근하게 찾아온 그대여
노오란 생강나무꽃 피우고
목련 목울대 부풀게 하네


봄을 품은 도시 춘천
마스크 사러 허둥대다 돌아와 만난
약사천 물빛과 포근한 봄볕의 위로가
너무 호사스러워
눈물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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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땅에 닿게



코로 숨쉬기 힘들 땐
배로 숨 쉬어야 한다 했다
섣불리 믿지 못했던 말을
해발 5천 미터 산에서 몸으로 확증했다


콧대를 높게 세운 일 있었던가
버킷리스트는 내 등을 떠밀어
킬리만자로 우훌루봉을 오르게 했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가야 하는지
계속 따라오는 코맹맹이 질문에 시달렸다


싱그런 초록 그늘 지나면
사막이 기다리고
춥고 숨 가쁜 암벽이 나타난다는 걸
맵게 가르치려 한 것일까
난 코가 땅에 닿게 숙이고 기어가듯
기어가듯 오르며 깨달았다


코는 얼굴의 가장 높은 정상이지만
정상은 땅에 닿기 위한 몸부림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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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下山)


정상까지

얼마나 더 가야 돼요

거의 다 오셨어요

뻔한 거짓말에도

기분 나쁘지 않은데

이상하지

정상을 만끽하고 내려오는 길은

왜 지루하고

멀기만 할까


돌각산 너덜겅을

한없이 내려오다

작은 오르막 나타나는데

왜 짜증이 날까

산악 사고는

하산 중에 더 많이

난다던데


결국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거 쟎나

산허리 굽어보며

얼마나 가벼워졌을까

땀으로 빼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매달리고 다니는 것들

꺼멓게 죽어가는 발톱 보며

내려놓자 내려놓자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