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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각시병 외 5편 / 이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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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43회 작성일 20-12-22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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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집부터 회원으로 참여했으니 <갈뫼>인으로 산 세월이 40년이 되었다

어쩌다 시를 쓰는 건지, 시를 계속 써야하는건지 생각이 정립되지 않는다.

<갈뫼>는 엄마의 자궁이고 그 탯줄을 굳게 잡고 있었던 세월이 시를 지금까지 쓰게 된 동기에 일조를 했다고 생각한다.

동기간 같은 <갈뫼> 회원 서로에게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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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병



찔레꽃머리
부드러운 바람 살랑이던 날
신랑 각시 맞절하는
초례청에 얌전히 오른
모란문 각시병 한 쌍


다소곳 이마 숙인 새각시
길고 흰 목덜미
엉덩이도 암팡진 각시 닮았다


첫날밤
합환주를 담아 신방에 들었었지


새신랑은 너볏한 모습으로
삼회장 초록 저고리 자주 고름을 풀었지
꽃문 여는 소리 다 듣고 보았지


문갑 위 각시병 한 쌍
지금도 그대론데


백년해로하자던 신랑은
먼저 가고
백발의 각시 홀로
초록 초록했던 날을 더듬는다.


*찔레꽃머리: 찔레꽃이 피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때
*너볏: 몸가짐이나 행동이 번듯하고 의젓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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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의 어미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순이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그렇게 순이는 매파의 손에 이끌려
군용트럭에 실려 갔다


열다섯 벙글지도 않은
순결한 패랭이꽃 순이
뿌연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공장에 가 돈 많이 벌어 오겠다며
넷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쌀독을 긁어도 늘 배고픈
입 하나 덜 셈으로
맏딸을 내어 준 어미
피멍이 들도록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으려 앙다문 속에선
오래오래 신음만 흘러나왔다


일본 놈의 앞잡이에 속아 떠나보낸

딸은 생사조차 알 수 없고
멀리 배 타고 갔다는 소문
해일처럼 덮쳐 와
그 꽃의 어미 실성을 했다


취업사기요, 인신매매의
나쁜 놈들은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천벌을 받아야 한다


깜깜한 광속에 갇힌 짐승이 되어
딸 이름만 부르다 서서히 말라 죽었다는
순이 엄마.


앞마당엔 연분홍 패랭이꽃이 피었습니다
순이의 꽃봉오리도 슬프게 맺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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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교*라는 짐승을 아시나요



히말라야 끝자락
티베트 국경 근처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막에
무스탕(mustang)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 히말라야에서 가장
슬프다는 짐승 좁교가 살고 있다
그는 오로지 사람들의 짐을
대신 져 주기 위해 태어났다


에미 물소의 힘을 받았고
애비 야크의 튼튼한 심장을 가졌다


해발 4000km의 고산지대
풀포기 하나 없는 돌짝 길 흙먼지
거친 자갈밭 좁은 절벽을 지나
25kg의 등짐을 지고서
꾸벅꾸벅 소리 없이 걷는다
온순하여 더욱 슬픈 눈망울로.


어둑살이 깔리는 도시
퇴근 시간 마을버스에 실려
산동네를 오르는
어깨 굽은 가장

지구에 매달려 사느라
고단한 걸음 꾸벅꾸벅
우리들의 아버지도 그랬었다.


주인을 먹여 살리는 짐꾼
좁교의 식량은
아침저녁 두 홉의 옥수수 알갱이


보라바람 불어쳐도
모진 추위도 더위에도 걷고 또 걷다가
한 생애 십 년
수명이 짧아 더욱 슬픈 짐승
좁교를 알고 나서 하늘을 보니
눈물빛 낮달이 걸렸다.


* 좁교(zhopkyos) : 히말라야 저지대에 사는 암소를 고산지대에 사는 야크에게 끌고 가 인위적으로 교배시켜 낳은 짐승. 심폐기능이 뛰어나고 힘이 세지만 온순하여 가축으로 길들여 네 살이 되면 짐꾼으로 일한다. 수명은 십 년이다.
*보라바람: 높은 고원에서 갑자기 불어내리는 차갑고 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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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을에 왔다



맑고 드높은
푸른 하늘을 이고 왔다


숨겨 놓은 부끄러움도
들킬 것만 같은
깨끗한 고요


몸속에 흐르는
삿된 것들
널 바라보던
붉은 피도
버리고 싶은 날이다


맑아서 싸늘한
다시 외로워도 좋은 날


시름 환히 비우고
무늬 없는 은빛 숨결로
가을과 함께
깊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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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뉘



일월보다 더 추운
이월을 견디고
짧은 봄을 건너
여름이 왔어도
코로나는 물러가지 않고


어수선한 행성에서
희수를 맞는다


수선도 못 할
습관이 돼 버린 과거
시키는 대로 하는 일소였다
사막을 걷는 낙타였다
안방의 농짝이었다
조롱 속 새였다


그렇게 나의 최대 용량을
다 써버린 지금 아닌 척하며 지내는
내 모습


곱던 눈썹 희미해지고
웃어도 우는 거 같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소멸되어 가는 유기체
무서운 거울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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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세균도 아닌 것이
곰팡이도 아닌 것이
키스의 화가
클림트를 56세에 쓰러뜨렸다는
독감바이러스


싸스, 조류 독감, 돼지 열병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구를 흔든다


하나님의 회초리일까
천산갑을 만진 죄
박쥐를 잡은 죄

자연을 훼손한 죄


사람들이 쓰러지고
경제가 무너지고
신뢰마저 무너지는
소리 없는 전쟁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인터페론*을 주소서


공포의 팬데믹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물리치고 이겨내리라.


* interferon: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물의 세포에서 생산되는 항바이러스성 단백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