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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금계국 가락지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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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50회 작성일 20-12-2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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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뫼』오십 호 작품을 제출하니 마음이 뭉클하다. 풋풋한 나이에 입회하여 그 많은 회원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갈뫼』를 키웠다. 사십 호 특집을 책임졌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오십 호 발간이라니. 많은 회원들이 생각난다. 윤홍렬, 박명자, 이성선, 최명길 님 등. 이제 새로운 오십 년을 위해 후배들이 잘 가꿔주실 바랄 뿐이다. 작년 말부터 올봄까지 내 몸뚱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자연스레 움직임도 적어지고 행동반경도 적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시 쓰기가 힘들어지겠지만 주변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에 더 애써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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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국 가락지



윤사월 초여름
유난스레 금계국이 지천으로 피었다.
사람이 죽어서 꽃이 된다는 생각은
꽃만큼 아름답다.


맑은 영혼의 손가락들
손가락마다 노란 꽃 가락지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이십오 년 된 장인과
십팔 년 된 장모님 산소는
가슴을 열었고
아직 다 삭지 못한 시신은 화장장으로 모셔졌다.


손가락에 끼워 드렸던
석 돈짜리 금반지가
잿가루 속에서 빛났다,
어둠 속에서
불길 속에서도 꼭 잡고 있던 가락지
단단하고 맑은 향기의
꽃 가락지가 살아났다.


훌훌 날려 보내드리는

자식들 마음 깊은 곳에서도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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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날숨



눕다 앉다 서다
서다 앉다 눕다
한 해 두어 번 하고 나서야 알았다.


누워 있을 때 앉을 수 있길 바라거나
서서 다닐 때 누워 지낼 수 있음을 염려하는 거


언제나 숨쉬기와 같다는 걸.


오장육부의 통로를
혼란케 하던
혹 하나 떼어낼 때의 심정이
날숨이라면
낯선 인공 고관절 하나
어렵사리 들여앉히는 마음은
들숨.


허세나 외면의 치장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
들숨과 날숨으로 엮여진
육신의 무명천 한 자락
바람에 펄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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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고관절



이빨 하나도 새로 심지 않았었는데
큼직한 고관절 하나
들여앉혔다.


찬찬히 보지도 못한 체
기술자들의 소개만 믿고
이 낯선 분신을 맞이했다.


그저 나이 들면 골절 조심하라고
되지도 않게 되뇌던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다고
광고하듯 치환수술을 했다.


하루 전후로
내 몸뚱이 가격은 반토막 났고
그 하루 전과 하루 후
내 행동반경의 변곡점을 찍게 한 뼈


어쩌다가 쯤의 염려까지는
끼워 받겠는데
평생 동반의 약속을 받고
야반도주는 절대 불가 항목 넣어
위아래 봉인 찍어
아주 깊숙이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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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 목단꽃



만나지 말라
손잡지 말라
말도 섞지 말라.


가지 못합니다.
올 생각도 말아요.


방송과 신문이 뿜어낸
감염률 백 퍼센트
비말들로 가득한 세상.


요양병원에서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당신의 눈빛은


바이러스와 싸우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기 위해


저만큼
사회적 거리를 두고
붉게 타오르는


한 그루의 목단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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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의 세상 너머



예전의 반쯤만 걸어라
그쯤에서
그 너머 세상 그려라.


누군들 단번에 끝까지 다다를까
진작 이런걸 알았다면
훨씬 전 멈춤도 익혔으리.


눈으로만 가고
생각만으로 그려지는 곳
그런 세상 알아챘다면
나무 심고 꽃 가꿨으리.


오늘도 반쯤만 걸어라.
이쯤에서 환하게
당신 하나 그려 놓고


석양의 빛깔로
물들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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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아내는 옥수수만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한다.


알맞게 여문
뽀얗고 찰진 옥수수


소쿠리에 가득 지고 와
환하게 웃던 아버지


한 자리에서 몇 개씩 먹던 아내는
첫 손자를 낳아 보답했는데
이듬해도 아버지의 옥수수 농사는
멈추지 않았다.


해 질 녘 옥수수 밭을 지나가는데
싱싱한 이파리에
둘둘 감겨 있거나
얇은 속잎 속에서 익어가던
찰진 이야기가
두런두런 들려오고 있었다.


저쪽에 가서도 
옥수수 가꾸실 아버지
무슨 일 벌이시는가?
하늘이 점차 붉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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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신고



귀향의 절절함도
이산의 무거운 죄도
꽃이 되시라.


그날 되면 보내드리리.
이십 오 년 땅속에서 기다린
실향민 일 세대


가볍고 가벼운
가루가 되어
꽃잎 위에 뿌려졌다.


함경북도 학성군 원적지 새긴
무거운 비석도 눕히고
윤사월 맑은 날


풀지 못한 재회의 꿈도
무겁디무겁던 젖은 몸도
이쯤에서 가볍게 하자고


장인 장모님 산소를
개장했음을 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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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면 된다



한 가족 둘러앉아
잔치 벌이기엔
문어 한 마리면 된다.


깊은 바닷속에서
여덟 발가락으로 휘젓던 힘이
밥상 위 가득 넘친다.


작은 틈새도
집으로 만드는 유연함과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빨판의 끈질김이라니


궁하면 제 다리도 잘라먹고
쫓아오면 먹물 쏘아 대던
끈적끈적한 천성


공현진 김 씨네 밥상 위
올라앉은 문어
너 한 마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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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십여 년 만에 오징어가 났다.
오징어는 끝인가 했는데
코로나로 난리 한창인 때
무리져 돌아왔다.


오징어를 밥처럼 먹었다.
그것으로 학비를 만들어 주던
아버지는 밤샘 뱃멀미 하다가
새벽에야 들어왔다.


고추장에 버물어
한 사발씩 먹어 대면
가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기운이 났다.


모두가 바이러스 때문에
꼼짝 못 하고 있을 때
바닷속 휘젓고 다니던
오징어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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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딸내미가 걷자고 한다.

자기는 서울서 걷고

나는 공현진에서 걷는다.


스마트폰으로 공유하니

서로의 발걸음 수를 알 수 있다.


푸릇푸릇한 기운이 통한다.


아버지는 늘 천천히 걸으라 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짐을 이고도

내 손을 잡았다.


누군가와같이 걷는 거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