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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초대작품_수필] 명성왕후와 그녀 / 신혜영(영월문인협회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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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97회 작성일 20-12-28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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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와 그녀



그녀를 마지막 본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42년 전이 아닌가 싶다.
그녀가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전근 온 지 얼마 안 된 사회선생님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오래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키가 작고 똘망똘망하고 당차고 야무졌다. 학교 특별활동 발표 때는 그녀는 각본을 짜서 반 친구들을 무대 위에 올리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 그녀는 서울로 전학을 갔고 그 뒤 소식을 몰랐다.
그러다 작년에 그 당시 담임이었던 남편에게는 소식이 닿아 한번 만났다고 전해 들었다. 그녀는 예술대학 극작가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과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겹쳤다. 그리곤 잠시 잊었다.
몇 주 전인가?
남편이 내게 말했다. 그녀가 쓴 각본으로 뮤지컬을 올린다고 티켓 2장을 보내왔다고 했다. 나랑 함께 오라고 했단다. 문득 그 소리를 듣고 다시 42년 전의 그녀를 소환했다. 그녀의 10대와 나의 20대가 파랗게 눈앞으로 쏟아졌다. 그녀의 앳된 중학생 얼굴과 나의 젊음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찰칵찰칵 소리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우리는 그녀의 <잃어버린 얼굴 1985> 뮤지컬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작 시간보다 훨씬 빨리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다른 때와 달리 지금은 코로나로 상황이 많이 달라진 탓이었다. 마스크를 꼭 착용해야 함은 물론 열 체크하고 손 소독하고 QR코드로 설문지도 작성해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사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이런 번거롭고 어려운 시절 뮤지컬 관람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입장해 보니 좌석도 한 자리씩 건너 앉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앉는 좌석이 꽉 채워져 있었다. 채워진 좌석을 보며 마치 내 무대인양 마음이 뿌듯했다.
<잃어버린 얼굴 1895>은 민비인 명성황후 민자영의 이야기였다. 가벼운 피아노 인트로와 함께 극이 시작되었고 무대에는 다양한 액자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조선 당시의 사람들 얼굴이었다. 그 액자 속 사진에는 아무리 찾아도 내가 알고 있던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었다. 그때 극 중에 명성왕후의 사진을 찾는 사람이 있다.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민비(명성황후)의 실제 사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역사적 사실과 예술적 허구가 결합된 팩션 사극 공연이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의 큰 사건을 다룬 무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무거운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한국적 군무와 함께 무대는 더없이 화려하고 웅장했다. 사건을 겪으며 백성들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원흉이기도 한 민비를 죽도록 미워했고, 고종인 남편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시아버지인 대원군과는 철천지 원수였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고종과 달리 민비는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는데 결국 민비는 그것으로 살해의 위협을 피하게 되고 선화라는 궁녀가 대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사진 찍기를 거부함은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당시 조선 백성이라면 민비의 악행에 누구나 분노를 갖고 있었을 텐데 극에서는 민비 대신 선화가 상징적으로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된다. 오래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에서의 민비는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중전이었지만 이 뮤지컬에서는 그렇지 않다. 권력욕만 강했지 백성들을 위하는 조선의 국모 민비가 아니었다. 그녀의 악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새롭고 색다른 작품이었다. 이것을 그녀가 썼다니? 그녀다웠다. 그녀는 예리하고 그때도 남다르게 새로움을 시도하는 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어린 학생이 자신의 글로 반 친구들을 무대에 올렸던 모습이 예술의 전당 커다란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출연자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사가 있어 뮤지컬 시작 전에는 못 볼 것 같다던 그녀를 극이 끝나고 예술의 전당 넓은 마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10년이 4번 지나고도 그 이상의 시간, 정말 반가웠지만 너무 긴 세월 뒤라 처음엔 선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주춤했다. 하지만 그녀가 제자라는 사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이미 50대 중반의 그녀에게 아마 난 대견하다는 말 대신 대단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자신은 아직도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입었던 꽃 원피스를 기억한다고, 그 모습을 보고 저 모습이 바로 여성스러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갑자기 그녀의 말에 나의 20대가 다시 소환되고 있었다. 작고 당차던 그녀의 눈빛이 꽃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내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은 훌쩍 공간을 뛰어넘어 그녀와의 지난날이 바람처럼 달려와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꽃 원피스의 나와 그녀의 단발머리와 새하얀 칼라의 교복과 햇살 쏟아지는 교정이 원색 물감으로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고 또렷했다. 그날은 내게 그녀가 며칠 후 보낸 문자처럼 경이롭고 아주 특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