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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초대작품_소설] 山行 /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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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197회 작성일 20-12-28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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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와 그녀



1.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숨이 차올랐고,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더 많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름한 사우나실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후끈하였다. 정수리에서부터 배어 나온 땀이 머리카락을 흠씬 적시면서 콧잔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배꼽이나 사타구니 쪽으로 뚝뚝 떨어졌다.
채 두 평이 안 될 것 같은 낡은 사우나실에는 나 이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 역시 나처럼 삐질삐질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 곁의 사내는 아예 나무 걸상에 송장처럼 길게 드러누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걸상에서 일어났다. 흠뻑 땀으로 뒤집어쓴 몸뚱이는 마치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칠갑을 해놓은 듯 번들번들하였다. 뜨거운 열기로 온몸이 화닥거렸지만, 흠씬 땀을 뽑고 나자 찌뿌드드하던 몸이 다소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한데 샤워실 쪽으로 나가기 위해 마악 사우나실 문을 열려고 할 때 아랫도리가 휘청하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때, 나는 재빨리 사우나실 문짝 손잡이를 잡고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각목을 덕지덕지 덧붙여 땜질까지 한 그 엉터리 같은 손잡이라도 잡았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나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뒤 몸의 중심을 잡고 샤워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콧날이 무지근하면서 가슴팍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가슴팍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물 머금은 대리석 바닥에도 붉은 잉크 같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코끝과 인중을 싸잡아 훑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 가득히 시뻘건 선혈이 묻어나 있었다. 코피가 터진 것이었다. 창피해서 낯이 후끈하였다. 행여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미칠까 봐 사뭇 걱정스러웠지만,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무지근했던 콧날은 차라리 코피가 터짐으로써 한결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통 물을 뒤집어썼다. 가급적이면 물을 한 방울이라도 아껴 써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생활철학이었지만, 그러나 입술이며 앞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배꼽 아래까지 시뻘겋게 묻어나는 코피를 지워내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물을 뒤집어쓰는 동안 슬그머니 코피가 멎었고, 샤워를 마쳤을 때는 몸이 훌훌 날아갈 듯 여간 가뿐하지 않았다. 몸에 쌓인 피로뿐 아니라 오욕과 번뇌의 찌꺼기들이 땀과 코피를 타고 말끔히 씻겨 내려간 모양이었다. 나는 상쾌함을 느끼면서 곧 욕실에서 나왔다.
그때 이발실에는 다른 남자가 머리 손질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남자의 머리 손질이 끝날 때까지 순번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잠시 휴식도 취할 겸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휴게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구깃구깃한 신문을 집어 들었다.
뭐 화끈하고 기분 좋은 소식 좀 없을까.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도 나는 작은 기대를 걸면서 여기저기 신문 지면을 뒤적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신문의 한 귀퉁이에 무성산(茂盛山) 태화사(泰和寺) 조실(祖室)로 있던, 선방(禪房)뿐만 아니라 속세의 범인(凡人)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정선사(明頂禪師) 열반에 관한 기사가 나와 있었다.
명정 스님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고승(高僧)이었다. 불교에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나 같은 사람까지 그 이름을 기억할 정도라면 명정 스님의 위상이나 지명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그만큼 명정 스님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큰스님으로 숭앙되고 있었다.
명정 스님은 출가 입산한 이래 단 한 번도 산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전형적인 산승(山僧)으로 명성이 높았고,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러울 때마다 우리처럼 무지한 사람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알쏭달쏭한 법문을 띄워 세인을 어리둥절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 분의 법문은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그동안 명정 스님의 법문이 나왔다 하면 여기저기서 구구한 해석이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그분의 심오한 뜻을 헤아려 명쾌한 해석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만큼 명정 스님은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고, 어떻게 보면 그 분의 무량무변한 법문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몰랐다.
나는 귀동냥으로나마 그분에 대한 일화 몇 가지를 얻어들은 적이 있었는데, 돈이라면 너도나도 눈을 까뒤집고, 그것도 모자라 제 밥그릇부터 챙기느라 피가 팍팍 튀는 험악한 세상인지라 그 스님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역시 그분은 우리 시대가 낳은 위대한 대덕(大德)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스님이 돌아가시다니……. 그 기사를 접하는 순간 나는 무슨 까닭에선지 몸이 쩌릿쩌릿해지는, 마치 고압 전류에 감전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명정 스님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 기사를 대하자마자 일변 몸이 움찔움찔하면서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참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일이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암자에 계셔서 그런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바로 무성산 기슭 태화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진불암(眞佛庵)에 머물고 있었다. 더욱이 나에게는 이번 주말 무성산 산행이 예정돼 있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주말마다 등산을 다녔고, 다가오는 주말에는 나의 유일한 산행 동료인 오 사장과 함께 무성산에 가기로 돼 있었다.
무성산은 그동안 내가 오르내린 산 중에서 단연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인상 깊은 산이었다. 그 산은 다른 산에 비해 인적이 뜸해 번잡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북으로 힘차게 뻗친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반달 모양으로 돌아나간 강과 저 멀리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드넓은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남쪽 펑퍼짐한 화전 터 능선 아래 계곡을 끼고 태화사가 있었으며, 그 건너편으로 연화대(蓮花臺)의 일각이 보였다. 연화대는 열반에 든 스님들을 다비(茶毘) 하는 곳이었는데, 그쪽으로도 굽이굽이 이어지는 깊고 험준한 등산로가 나 있었다.
몇 해 전이던가, 나는 오 사장과 길동무하여 처음으로 그쪽 능선을 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쪽 능선은 군데군데 가파른 비탈이 많은 데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으슥했으므로 그다음부터는 그 길을 피했고, 무성산에 오를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무성읍에서 출발하여 화전 터 능선을 타고 어머니가 계신 진불암을 거쳐 하산하였다.
화전 터 능선은 어머니 품처럼 온화하면서도 넉넉함을 느끼게 해주는 독특한 맛이 있는 데다 주변 경치까지 기가 막혔다. 우선 쉬기 좋은 화전 터에 서면 웅장한 태화사 대웅전은 물론 그 건너편으로 연화대가 더욱 확연히 보였다. 좌우간 태화사에서 연화대로 이어진 그 산의 자태는 한마디로 말해서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이번 산행에서도 우리는 무성읍 쪽에서 정상을 타고 넘어 화전 터 능선을 따라 무성읍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진불암에 들러 어머니를 찾아뵐 참이었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속세를 떠나 벌써 십수 년째 그 암자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내 눈앞에는 늙으실 만큼 늙으신, 그러나 학처럼 깨끗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진불암은 서해 쪽으로 돌아나간 무성산 끝자락 야트막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화사에서 진불암까지는 오불꼬불한 산길로 약 시오리쯤 되었다. 그러니까 태화사와 진불암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셈이었다.
태화사는 본래 그 유서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대찰이었지만, 그러나 오두막집 같은 진불암에는 겨우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바로 그런 암자에서 스님들에게 몸을 의탁하고는 보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나는 잠깐 그 암자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어머니는 스님들이 입는 회색 법복을 입은 채 법당에서 정성스레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눈시울이 화끈해지다 못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황혼에 들어선 어머니는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그 깊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그런 여생을 보내는 것일까.
어머니의 산사 생활은 그러므로 내게는 큰 화두(話頭)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착잡한 심경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이발사가 말했다.
“김 사장님, 머리 손질하시죠.”
“아, 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발 의자로 옮겨 앉았다. 전면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드러나 있었는데, 어느덧 내 머리칼에도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 있었다. 나하고 비슷한 연배의 단골 이발사가 내 머리 위에 드라이어를 갖다 대고는 능란한 솜씨로 빗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오셨어요?”
“아닙니다. 며칠 동안 좀 바빴습니다.”
“사업은 잘 되시구요?”
“그 뭐 사업이랄 거야 있습니까. 그저 종업원들 월급이나 밀리지 않으면 다행이죠.”
이발사가 이것저것 묻는 말에 나는 거의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붙임성이 밉지는 않았지만, 내 머릿속은 아까부터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지난번 흰 고무신을 끌며 등산로 어귀까지 배웅해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느 사이엔가 내 마음은 벌써 무성산 진불암에 가 있었고, 며칠 있으면 뵙게 될 텐데도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못 잊어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내가 어둠을 헤집고 남부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오 사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매표소 앞이었다. 그러나 매표소 앞에는 다른 사람들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 오 사장이 다른 곳에서 기다리지 않을까 하고 여기저기 대합실 구석구석을 기웃거렸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어이, 김 사장. 뭘 그렇게 기웃거려?”
“아, 나와 주었군.”
“내가 뭐 언제 약속 어긴 적 있나.”
그러면서 그는 매표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차표 두 장을 샀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화장실에 들러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았다.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차에 오르기 전 먼저 소변을 보아 두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다.
“날씨가 많이 풀렸어.”
“그럼. 이젠 완전히 봄이야. 산에 다니기 좋은 계절이지.”
그는 남근을 탈탈 털어 옷 속에 집어넣은 뒤 바지의 지퍼를 주욱 긁어 올리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난히도 야한 조끼에 알록달록한 머플러하며 삐뚜름하게 눌러 쓴 등산모라든가 아무튼 그는 그날도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곧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는 우리 이외에 서너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는 해도 차 안이 텅텅 비어 있었으므로 썰렁한 느낌이었다. 내가 혼잣말 비슷이 말했다.
“썰렁하군.”
“첫차란 언제나 그렇잖아?”
오 사장은 그러나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간단하게 말해버렸다. 그 직후 버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가 방향을 바꾸어 터미널을 뒤로 밀어내는가 했더니 곧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초롱초롱하였고, 도로변의 능선들이 검게 드러나 보였다. 세차게 달리는 자동차들의 전조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혹시 비라도 내리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했지 뭐야.”
“나는 며칠 전부터 주욱 일기예보를 들었어. 당분간 비는 내리지 않을 것 같아. 남부 지방에는 가뭄 때문에 고생들이 많은 모양이던데……. 그러나저러나 사업은 어때?”
“오 사장도 뻔히 알면서 뭘 그래. 요즘 뭐 되는 게 있나. 그저 부도나 내지 않으면 다행인 줄 알아야지. 정말 자금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요즘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내가 왜 가진 것도 없이 사업에 손을 댔나 하고 후회한다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월급쟁이를 할 수도 없고 말야.”
“산다는 게 고해 아닌가.”
“고해?”
“들은풍월이지 뭐. 나야 사실은 고해가 뭔지도 몰라. 한데 남들이 다 그러더군. 산다는 건 고해라구 말야.”
그의 입에서 제법 유식한, ‘고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을 때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나도 그렇지만, 오 사장 역시 학교와는 애당초 인연이 멀었다. 그런데도 오 사장이 고해 어쩌구 하면서 문자를 쓰다니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가 배운 것이라곤 오직 쇠 깎는 일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왕십리와 문래동 일대의 오죽잖은 철공소에서 선반공으로 잔뼈가 굵어 왔다. 피차 쇠 깎는 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입장이지만, 그러나 고행이니 뭐니 그런 고상한 말은 남의 나라말로 들릴 따름이었다. 내가 말했다.
“아, 나야말로 큰일 났어. 이달에도 자금이 달랑달랑하거든.”
“그런 거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지 뭐. 우리, 산에 갈 때만이라도 그런 이야기는 덮어두자구.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사업을 시작하지 말고 차라리 공장장으로 그냥 있는 건데 말야. 하긴 그때가 좋았어. 사장이야 돈 때문에 쩔쩔매든 말든 우리야 열심히 일만 하면 그만이었지. 한데 막상 내 사업이라고 벌여 놓으니까 그게 아니야.”
“내 말이 바로 그거라니까.”
오 사장과 나는 나이도 동갑이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공장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사업이랍시고 당초 생각보다는 훨씬 어려웠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기술이야 어느 누구와도 경쟁할 자신이 있었지만 늘 자금 부족으로 기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매월 월말만 되면 거래처 대금 결제하랴, 종업원 월급 챙기랴 그야말로 자금 끌어대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주위의 다른 철공소들이 부도를 맞고 뻥뻥 나가떨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저절로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곤 했다.
정말이지 우리들의 생활이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정부에서는 심심하면 한 번씩 중소기업 육성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개나발을 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울 좋은 말잔치에 불과했다. 오 사장이 말했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 우리가 현장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할 때는 일밖에 몰랐는데 말야.”
“그걸 말해 무엇 하나.”
사실 우리가 말단 종업원으로 일할 때에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일감만 있다 하면 며칠 밤이라도 홀딱홀딱 뜬눈으로 지새우곤 했었다. 그 당시 내 귀에는 주말이니 공휴일이니 그런 말들이 팔자 좋은 사람들의 잠꼬대쯤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 업계에도 사정이 달라졌다. 종업원들은 꼬박꼬박 일요일과 공휴일을 챙겼고, 일정한 근무시간 이외에는 잔업이나 특근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바람에 우리도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갈수록 임금이 상승하는 데 비해 생산성이 떨어져서 회사 운영에는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오 사장이 말했다.
“골치 아픈 생각 그만하고 잠이나 조금 자 두지.”
그는 좌석에 등을 느슨히 기댄 채 등산모로 눈과 얼굴을 가렸다. 무성읍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세 시간 이상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모자란 새벽잠을 벌충할 모양이었다.
버스는 어느 고갯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웅웅웅웅…… 버스의 엔진 소리가 연신 귓가에 묻어나고 있었다. 오 사장뿐만 아니라 나머지 승객들도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 그중에는 코를 디링디링 골아대며 잠꼬대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살풋 눈을 붙일까 시도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더구나 집을 나설 때 아내와 티격태격 다툰 것을 생각하면 오려던 잠도 이내 확달아나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산행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내가 곁에 다가와 괜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오늘도 그냥 나가실 거예요?”
내가 아내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아내는 돈타령을 하기 위해 미리 초를 치고 나서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왜 그래?”
“그걸 몰라서 물어요? 돈 좀 내놔요. 곗돈에 뭐에 돈 들어갈 데는 많은데 팔자 좋게 주말마다 등산을 다녀요?”
“등산이 뭐 돈 들어가는 건가.”
“교통비는 뭐 돈이 아닌가요.”
“그까짓 교통비 좀 쓰는 것 가지고 뭘 그래?”
“당신은 누릴 것 다 누리면서 나한테만은 아직도 더 고생을 하라 이건가요?”
아내는 성난 살쾡이처럼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내가 도끼눈을 뜨고 앙탈을 부리는 데는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실로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볼아가지라도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즐거워야 할 그날의 산행을 위하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자제하면서 배낭을 짊어졌다.
집을 나선 뒤에도 마음이 여간 무겁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고 나면 기분이 싹 잡치게 마련이었다. 아내는 돈밖에 모르는, 천성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같은 말이라도 눈치를 봐가며 기분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사뭇 도전적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돈 못 버는 나를 홍어 뭐처럼 알았고, 자기 이외에는 어른이나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 꼴을 못 보는 것이었다.
더욱이 아내가 두 눈에 쌍심지를 박고 악을 쓰며 덤빌 때에는 이만저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완력으로 한다면 아내쯤이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될 것이었지만, 아내가 아무리 밉다 한들 어찌 사내로서 여자한테 손찌검을 할 것인가.
하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되풀이되는 아내의 강짜를 고스란히 받아 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아내가 지랄 발광을 할라치면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져서 고름 주머니가 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견디다 못해 몇 번인가 이혼을 결심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이도 나이인 데다 진불암에 계시는 어머니를 비롯하여 자라나는 아이들, 그리고 주위의 이목을 생각하면 이혼이라는 것을 함부로 결행할 수도 없었다.
답답했다. 그런 아내와 살아야 하는 내 현실은 문자 그대로 비극이자 지옥이었다. 더군다나 아내가 돈타령을 할 때에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사업이랍시고 회사를 운영하기도 죽을 맛인데, 아내는 눈만 떴다 하면 이것저것 용처를 주워섬기며 돈을 요구했다.
돈, 돈, 돈……. 도대체 돈이라는 게 뭔지 오나가나 돈 때문에 내 삶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하지만 여간해서 돈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개도 물어가지 않는 그까짓 돈 때문에 한평생 쓰라린 고통을 당하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인간사가 지긋지긋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때때로 에라 모르겠다, 가족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아예 머리 깎고 스님이나 돼버릴까 하는 뚱딴지같은 꿈을 꾸곤 하였다. 이 힘겨운 멍에를 짊어지고 허구한 날 모진 세파에 시달리며 아등바등 살 바에는 숫제 이것저것 다 걷어치우고 입산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도 각박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내 삶에 작은 평정을 가져다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행이었다. 주말마다 산에 오르면 심신이 다소나마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라 산은 피를 철철 흘릴 만큼 엉망진창으로 상처받은 내 영혼을 구원해 주는 그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눈을 뜨고, 나는 다시 진불암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 하나만을 믿고 살아오신 어머니는 삯바느질에서 식모살이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아무리 기구한 인생이라고 하지만, 아마 어머니처럼 고통스럽게 살아온 사람도 드물 것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차디찬 냉골에서 나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운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우리는 봉천동 달동네의 사글셋방에서 근근이 살고 있었는데, 진작 연탄이 떨어진 것은 물론 몇 달째 방세를 내지 못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어머니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아 먼저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루핑으로 천막집을 지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가 몰아닥친 어느 날, 구청 철거반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천막집을 때려 부수는 바람에 어머니와 나는 중랑천 다리 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식량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와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얼굴이 얼비치는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한창 먹어야 할 어린 나이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허기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들어간 뒤에야 나는 비로소 밥다운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그때 주인집에서 양재기에 가득 담아주던 그 밥을 잊은 적이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오다가다 한 톨씩 쌀 낱이 섞인 시커먼 보리밥이었지만 그 밥맛이란 꿀맛이나 다름없었다. 철공소 일은 위험하고 힘들었다. 동료 종업원 중에는 손가락이 잘려 나간 아이도 있었지만, 나는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죽을 둥 살 둥 혀 빠지게 일했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시절,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행운인가. 더욱이 나중에는 월급까지 타서 어머니 손에 쥐여 드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다른 집에는 전부 아버지가 있는데 우리 집에는 왜 아버지가 없어요?”
“글쎄 말이다……. 푸우…….”
어머니는 울상을 지으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집은 아버지가 돈 벌어서 쌀이랑 연탄을 사들이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네 아버지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다.”
어머니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였다. 죽었으면 죽었고,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거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니 나로서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물었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집을 나간 뒤로 소식조차 없고, 끝내 돌아오지 않으니까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어디로 나가셨는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그걸 알면 당장 찾아오게? 네 아버지는 집을 나간 뒤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없단다.”
어머니의 눈자위에는 어느덧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만일 내가 더 꼬치꼬치 물고 늘어진다면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으리라.
좌우간 그 후에도 아버지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여태껏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를 찾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를 뿐 아니라 아버지한테는 혈육의 정을 느껴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무튼 나는 성년이 되어 철공소 경리로 있던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몄는데, 비록 구차스런 살림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모시려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거꾸로 내가 장가든 지 열흘인가 보름 만에 홀연히 괴나리봇짐을 싸 가지고 집을 떠나 머나먼 진불암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당초 집을 나서면서 며칠 동안 태화사 근처 진불암에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진불암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눌러앉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서울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하도 답답하여 몇 번인가 진불암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려 하였다. 그때 내가 간청하였다.
“어머니, 서울로 가시죠.”
“나중에 갈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 처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아니. 절대로 그런 것 없다. 나는 그저 여기가 좋을 뿐야. 내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잘 살아. 나는 여태껏 네 뒷바라지를 하느라 집을 떠날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이제는 너도 살림을 시작했겠다, 내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게 됐잖니? 내 걱정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어머니는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내 등을 떠밀었고, 그 바람에 나는 번번이 퇴짜만 맞은 채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결심은 실로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진불암에 들어간 이후 아직까지 산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늙마에 명정 스님 흉내를 내려고 그러는 것일까, 하여간 어머니는 속세와 담을 쌓은 채 진불암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몽매에도 잊지 못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몇 가지 기억을 단편적으로나마 토막토막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오 사장이 눈을 뜨면서 긴 하품을 베어 물었다. 그가 부스스한 눈두덩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잠결인 듯 꿈결인 듯 내게 물었다.
“아, 여기가 어디야?”
“다 왔어.”
어느 사이엔가 해가 떠서 대지를 눈부시게 비추었고, 논밭의 두엄더미에서는 푸짐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버스가 속력을 낮추면서 뭉그적뭉그적 무성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3.
“야, 정말 봄이군. 엊그제까지만 해도 바람 끝이 맵더니만 이제는 그게 아니야. 저것 봐.”
오 사장은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을 가리켰다. 거기, 물오른 나무들이 제법 푸른빛을 띠었고, 가녀린 잡풀들이 가랑잎 틈새로 파릇파릇 새싹을 내밀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산에서는 봄 내음이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는데, 진달래 나뭇가지에도 꽃망울이 맺힐락 말락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참, 오늘이 명정 스님 다비 하는 날 아닌가.”
“명정 스님이 누군데?”
“태화사 조실 스님 말야.”
“아, 며칠 전에 돌아가신 스님 말이군. 근데 다비는 또 뭐야?”
“허허……. 아까는 고행이니 뭐니 제법 문자를 쓰더니만, 다비를 모른대서야 말이 되나. 거 왜 있잖아? 돌아가신 스님들 화장하는 거…….”
“그렇군. 김 사장은 역시 유식하다니까. 하기야 모친께서 오랜 세월 절간 생활을 하고 계시니까 그 방면에는 빠삭하겠지.”
“어머니뿐이 아니야. 나도 언젠가는 중이 되겠어. 산이 이렇게 좋은데 뭣 때문에 그 복작대는 도회지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차암, 김 사장은 엉뚱한 데가 있어. 나는 사실 사람들끼리 부딪치며 복작대는 재미로 살거든. 근데 김 사장은 달라. 자꾸만 세상을 등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잘 봤어. 어쨌거나 어서 올라가세. 나는 어머니 뵈올 생각에 벌써부터 발길이 급해지는 걸. 빨리 가자구. 잘하면 명정 스님 다비식까지 볼 수 있을 거야.”
발길을 재촉하면서 나는 주머니 속에 준비한 몇 푼의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여태껏 어머니께 변변히 용돈다운 용돈 한 번 드린 일이 없었는데, 용돈을 드리려고 어설픈 수작을 벌일 때마다 어머니가 내 뜻을 한사코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어머니가 끝내 내 성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불암에 시주라도 하고 돌아올 참이었다.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발길을 더욱 재촉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바람 끝은 매웠지만, 산 중턱쯤 올랐을 때에는 온몸에서 끈적끈적한 땀이 배어 나왔다.
등산로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우리는 한 번도 해찰하지 않고 단걸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무성산 일대는 역시 절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웅전 건너편 연화대에서는 때마침 명정 스님 다비가 한창이었다.
울긋불긋한 만장(輓章)들이 숲을 이루었고, 연화대 주위에 인산인해를 이룬 신도들이 흡사 개미 떼처럼 보였는데, 신도들 사이에는 드문드문 장삼 위에 가사를 걸친 스님들이 뒤섞여 있었다. 아마 전국 각지에서 스님뿐만 아니라 보살이란 보살은 다 모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그곳에 가 있지 않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화대를 향해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당대 최고의 스님이 이 더러운 사바세계를 떠나 지금 뭇 중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극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연화대에서는 줄곧 소담스런 불꽃이 널름거렸고, 바람인 듯 구름인 듯 희고 검푸른 연기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향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찌잉 하면서 울컥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스님들의 목탁 소리가 산자락에 그윽이 울려 퍼졌고, 독경 소리 또한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무성산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인파에 하염없이 타오르는 불길하며 좌우간 명정 스님 다비식은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연화대를 내려다보면서 오 사장이 감탄하였다.
“야, 정말 어마어마하군.”
“빨리 가자구. 저 아래 화전 터에 가면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 맞았어.”
“서두르세.”
내가 앞장서서 뛰다시피 걸었고, 오 사장도 잰걸음으로 성큼성큼 따라왔다. 숲에서는 새들이 우짖었으며, 화전 터 능선이 가까워질수록 독경 소리와 목탁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화전 터 능선으로 마악 내려서는 순간 나는 머리끝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화전 터 한복판에 누더기 법복을 입은 어떤 보살이 부처처럼 정좌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주춤하면서 발길을 멈추자 오 사장이 물었다.
“왜 그래?”
“저기…….”
나는 손가락으로 보살을 가리켰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연화대를 바라보며 경건히 합장하고 있는 보살의 자태는 영락없는 좌불(坐佛)이었다. 한데 보살은 삼매(三昧)에 든 듯 우리들의 출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 사장이 말했다.
“아니……? 저 분은 김 사장 자당님 아니신가?”
“뭐라구?”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으므로 나는 귀와 눈을 의심했다. 어머니 같은 노인이 쇠잔한 기력으로 진불암에서 여기까지 올라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 사장이 재차 말했다.
“맞아. 김 사장 어머님이라니까.”
나는 손등으로 몇 번씩 눈을 문지르면서 조용히 정좌한 보살을 보고 또 보았다. 그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분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배낭을 벗어 던지고는 냅다 화전 터 한복판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얼싸안았다.
“어머니!”
“아니,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니? 네 아버지께서 열반하신 걸 알기라도 했단 말이냐?”
나는 ‘네 아버지’라는 그 말에 다시 한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누가 내 아버지란 말인가. 얼떨결에 내가 물었다.
“네에? 아버지께서 열반하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면서 손에 든 염주를 한 알 한 알 굴리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두 눈은 흠뻑 짓물러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뺨이며 코끝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 그랬었구나. 어머니는 애써 무엇인가를 숨기려 했지만, 그러나 나는 이미 명정 스님과 어머니의 모든 인연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때쯤 해서는 오 사장도 손수건을 꺼내 말없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저는 어머니가 필경 연화대에 가신 줄 알고 있었어요.”
“거길 내가 왜 가겠니. 번뇌를 잊겠다고 살붙이까지 내던진 그 어른이 아니더냐. 한 많은 이승을 떠나는 길, 사바세계 모두 잊고 극락 가시는 길에 발목을 잡아 어쩌란 말이더냐. 그렇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을 내 눈으로 보지 않을 수도 없어서…….”
어머니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다시금 연화대 쪽으로 짓무른 눈길을 던졌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활활 타올랐고, 희고 검은 연기가 용틀임을 하면서 푸른 하늘로 꿈틀꿈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무아지경으로 연화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눈자위만 짓물렀을 뿐, 모든 속박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그런 어머니의 등 뒤로는 광배(光背)인 양 해무리가 덩시렇게 떠 있었다.
나는 다시 어머니의 두 손을 꼬옥 잡은 채 연화대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등줄기에 진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고,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갔다. 연화대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무성산 골짜기마다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