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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초대작품_평론] 매혹적 형상의 당위성과 길항(拮抗)의 현상학 / 엄창섭 (사)k 정나눔 이사장, 김동명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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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63회 작성일 20-12-2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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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 형상의 당위성과 길항(拮抗)의 현상학
― 권정남 시집,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서다』와 정신풍경




1. 생명 외경의 경계와 개아(個我)의 서정성
글머리에서 지역의 문화구심주의의 시간대에, 동인지 『갈뫼』 50호의 특집 간행을 지역 문인의 한 사람으로 함께 축하한다. 일단 물음표(?) 앞에 자신을 놓아보는 삶이 때로는 역사를 변화ㆍ발전시키지만 주위 상황이 각박할지라도 역주(力走) 뒤에, 숨을 가다듬고 느낌표(!)로 사는 삶의 잠언(箴言)을 겸허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한편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머레이 북친의 지적처럼 생태 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먼저 무너트려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차고 처연하되 담백한 시적 이미지는 고통을 눈 뜨게 하는 빛나는 응결체로 작동함은 물론이거니와 비록 서정성이 내재된 다수의 시편에 수용된 현대의 불안의식과 감각적 표현 등에 혼돈의 시간대를 걸친 내면인식의 중량감이 더해져 목가적 서정성이 눈부신 경향이다.
  
모처럼 설악의 낮은 산자락에 푸름이 짙어가는 성하(盛夏)의 계절, 햇살 눈부신 창가에서 또다시 꺼내 읽는 권정남 시인의 시집 『사이프러스나무아래 서다』에서 확인되는 따뜻한 감성의 시적 감응(感應)은, 투명한 영혼이 느꺼운 정조로 다가와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충동감이다. 까닭에 “아지랑이가 몸 푸는 문장마다/ 연둣빛 새소리 / 찻물 끓는 소리 가득하다.(「땅끝에서 온 소식」)”라는 ‘연둣빛 메시지’에 해남(海南)의 풍경은 맑은 봄빛 그대로라 ‘달빛 창연한 여름밤 비몽사몽 잠에 취해 있다’는 「홀리다」와 정감이 상통되어 “‘화사(花蛇)!’ / 붉은 혓바닥을 내민 채 꼿꼿이 고개 들고 있다(「환한 봄날」)” 또한 미망의 어지럼증에 취(醉)할 따름이다.
그렇다.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헤세가 「흰 구름」에서 일깨워주었듯 그 자신의 시편은 충만한 생명감으로 지극히 충동적이다. 그 점에 비춰 ‘진동하는 파 냄새 그 집착이 이리도 섬뜩함’을 잊고 지나칠지라도, “눈자위가 붉어지도록 /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 / 결별하지 못한 내 안의 뿌리를(「파를 다듬다가」)”에서 새삼 입증되듯 일상의 일탈은 시외버스터미널 앞 횡단보도에서 접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 ‘키스’의 주인공들이다 / 부끄러움을 잊은 정오의 햇살이 / 하얀 목을 뒤로 젖히며 감미로운 듯 / 눈을 감고 있다(「정오의 입맞춤」)”의 일례로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꽃과 나비들 / 그들만의 체취와 향기가 진동한다(「꽃들의 일탈」)”를 거쳐 “미시령 길 정체로 굽이 돌아온 한계령 석벽 앞에서 / 줄곧 책을 읽던 그녀가 가슴이 확 트인다며 말을 건넨다(「도반을 만나다」)”로 의미망의 외연(外延)은 확장된다.
또 하나 앞서 간행된 시의식이 극명한 그 자신의 시집인 『연초록, 물음표』는 영혼의 파동(波動)으로 선명한 시적 감응을 못내 ‘생명 교감’의 큰 틀로 지켜내고 있다. 비록 불안한 일상의 삶에서 시집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서다』를 주의 깊게 읽다 보면 “거울 속의 꽃은 피고 짐이 없네. 산언덕에 올랐으면 뗏목이 필요 없거늘 그대는 어찌 사공에게 길을 묻는가?”라는 선적(禪的) 물음 앞에서 ‘늘 운명처럼 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 자신이 낯선 지구촌을 여행하며 체득한 정감들을 응축시켜 형사(形似)한 기행시초(紀行詩抄)는 신선한 충동으로 하여 가슴에 와닿는 맛깔스런 시미(詩味)이기에 응당 심취하지 않을 수 없다.



2. 매혹적 합리성과 위대한 창조적 시학
모름지기 정신작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각별한 고뇌의 결과물을 평하기에 앞서, 변주곡(變奏曲, Variation)의 사전적 개념은,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리듬이나 선율 등에 변화를 주어서 만든 악곡’을 뜻한다. 변주는 곧 한 번 나타난 소재(주제, 동기, 작은악절 등)가 반복할 때 어떤 변화를 주어가며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뜻한 감성적 기표에 의한 한 편의 시는 문학의 정수(精髓)로서 상상과 감정을 통한 생명의 재해석인 연유로, 치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지식ㆍ정보화 사회에 몸담고 있는 대다수의 충직한 독자들에게 있어 특정한 시인의 시적 조건은, 일상의 삶에서 풀어 쓴 정직한 시론과 뼈아픈 자아 성찰과 타자(他者)를 지향한 따뜻한 ‘감사의 시학’이다. 까닭에 그만의 허망한 삶에서 당당한 자존감을 수긍한 끝에, 수행자로서 불심이 각별한 권정남 시인의 시적 특이성은 보다 깊은 사변성(思辨性)에 합일된 편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천오백 년 능산리 절터를 지키던 금동대향로 백제를 밝히던 장엄한 불꽃’의 표징인 「백제 금동대향로」의 보기에서나 ‘풀밭에는 별들의 발자국이 수북하다’는 「정림사지 절터에서」를 무론하고, ‘궁남지 연못가’의 「연꽃 피고지고」와 “금이 간 빗살무늬 토기에/종일 제 몸을 때리고 있다.(「오산리 선사 유적지에서-빗살무늬 토기」) 등에서 지극히 불교적인 시적 경향은 이처럼 확증된다. 일체 그 자신의 투명한 시적 형상화는 ‘느림의 시학’과도 같아 마침내 ‘바람 앞에서 작은 불을 켜는’ 엄격한 수행이다. 까닭에 영혼이 자유로운 바람의 상징성은 무상의 존재로 「숫타니파타」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묵언으로 응시할 정황에서 양양 낙산사를 매개로 읊어낸 「누명」에서 비로소 시적 당위성은 천착(穿鑿)된다.
이처럼 오랜 날 평자 나름으로 일관성을 지니고 지적해 왔듯이, 화자(persona)인 그 자신의 시편 중에서 「달빛에 묶이다」 또한 예외일 수 없으나 ‘보름달 창창하지만 이팝꽃 가득 눈물 담겨 있는’ 「달빛으로 오시는 이」도 그렇지만 “낙산사 의상기념관 유리곽 속에서도 / 환하게 / 사람들 마음을 밝혀 주는 // 숯이 된 성체聖體 하나(「동종銅鐘, 열반에 들다」)”의 보기나 ‘물살처럼 밀려드는 외지인들은 전단지 속 청호동만 보고 간다.’는 「청호동이 수상하다」, 「건봉사, 명부전」처럼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시간대와 장소성에 관한 극명한 관심사는, 그만의 대표시격인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서다」에서 다시금 해명된다. 푸른 식물성 질료가 적절히 융합처리 된 ‘밧줄에 묶여 있던, 이승의 말(言)들이 피빛, 장미 넝쿨 되어 눈이 아프도록 매달려 있는 6월, 담장’의 「줄장미」도 그렇지만, 동질성의 양상인 「향나무가 서 있다」에서 ‘초록 불꽃 속으로 타들어 가는 농익은 그리움 이중섭의 눈물’이 시적 기교로 선명하게 처리된 맥락에서 신령한 숲의 정령이 거처하는 “힐끗, 내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갈 수 없는 / 먼 소실점, 까마득하다.(「사려니숲길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또 한편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기도하는 나무’의 이행을 걸친 ‘나무의 미학’은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대입시킬뿐더러, 성서를 포함해 고대 신화나 전설에서는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신성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특히 시집에 수록된 절창(絶唱)의 시편인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서다」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는 침엽수로 측백나무고 목류이나 여기서는 시적 상상력이 한층 확장되어 빈센트 반 고흐의 회화와도 연계성이 주어진다. 그렇다. “칸테 혼도는 집시들의 통곡이다 / 핏빛 칸나 꽃무리들이 불꽃 되어 / 무대에서 팽이처럼 돌고 있다.(「플라멩코 그리고 칸나」)”의 보기나 “해바라기들이 들판에 엎질러졌다 / 지평선 위 해바라기들의 웃음소리에 / 황량한 들판이 왁자지껄하다(「론다 가는 길」)”에서처럼 ‘금빛지평선, 아득한 론다’로 가는 길에서 ‘일상을 내려놓고 시도한 일탈’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즐비한 해발 780의 론다산맥을 넘는 시적 충동에 의해 「철새가 되고 싶다」는 익숙하지 않은 보헤미안 기질의 발현이다. 한편 시의 해법으로 기호와 개념들은 ‘하늘의 별이나 해변의 모래’로 그 의미망의 확장에 맞물려있다.
어디까지나 「수국, 피어나다」의 시적 정조 또한 “부르카 속에 갇힌 여자의 몸이 / 물푸레나무처럼 자라고 / 스무 살 가슴에 피어나던 장미가 / 제 홀로 피고 지고 / 봄 햇살이 그녀에게 정중히 손 내밀다가 / 돌아선 자리에 꽃향기 만발하다(「여자가 갇혔다」)”의 형상화도 그렇지만 “빛의 속도로 자라는 장대비들 / 그 곁에서 말갛게 나를 비우며 / 초록 피를 수혈 받고 있다.(「대숲에서 나를 잃어버렸다」)”에서 끝내 유추되는 것은,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법’을 거슬리지 않고, 푸른 생명의 언어로 피폐된 영혼을 정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한 일상의 개아적 서정성은 한층 다양하지만, 구체적이며 리듬과 자유로운 양식을 갖춘 리얼리즘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미적 주권이 확장된 시편은 생명외경심을 충동적으로 일깨워준 높은 격조의 결과물이다.



3. 우주(宇宙)와의 감응과 심미적 개아(個我)
새삼 상생과 통섭(通涉)의 시세계를 구축하려고 「우주(宇宙)와의 감응과 심미적 개아(個我)」의 관점에서 그 자신이 신중하게 대응(對應)하며 시적 현상을 위한 해체와 재창조를 반복하는 ‘창조적 시학과 우주와의 교감’도 그렇지만, 시인의 차별화된 시세계에 연계한 공간과 시각, 그리고 정신풍경에 의한 통합의 시론을 탐색하는 작업은 매우 뜻깊다. 미적 주권이 확립된 순수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간대에서 삶의 매순간을 ‘꽃향기 묻어있는 식물성 언어, 푸른 생명의 언어로’,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키는 담백한 격조(格調) 또한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에 당위성을 지닌다. 그와 같이 이정민 시인의 ‘체취와 색깔, 육성’을 내세워 모의(模擬)나 아집(我執)의 모남이 없는 그의 정신지리와 낯익은 정신풍경도 그렇지만, 깊은 사유와 추상에 의한 인식의 세계에서 눈부신 시어(詩語)를 담금질하는 그 현상은 더없이 충격적이다.
또 한편 몽환(夢幻)처럼 아득한 캄보디아 씨엠립 타프롬 사원도 “검은 늪 같은 통곡의 방에 / 목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쏟아 놓으려고 / 누군가 / 덜컹, 돌문을 연다.(「통곡의 방」)”라는 현상도 그렇지만, 대다수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감은 공간상징이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은 자아의 변주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시인의 내적 충만의 탐색과도 결부되는 객관성이다. 어디까지나 언어적 속성을 통해 개아적인 정감이 아쉬운 순수서정성에서 현실 인식의 리얼리티 색채(色彩)가 비교적 이채로운 권정남 시인의 특이성에 비춰, 세계의 명소를 여행하며 체득한 이국적인 정취도 상이할 것이나 “커피 잔 속에 이과수 폭포가 출렁이고 / 우르릉 가슴을 건너뛴다. / 지구의 이쪽과 저쪽이 / 오색 무지개로 걸쳐지고(「이과수 커피를 마시다」)”는 무론하고, 「사막 그리고 바람」, 「사막, 그리고 별」에서도 이국적인 정감은 묻어나지만, 시적 질료의 다양성은 “안데스산맥이 바다로 녹아/용해된 진주 빛 사리들이다.(「안데스 소금을 맛보다」)”에서 ‘혀끝에 녹아내리는 소금’의 실체도 사리(舍利)로 이해하는 깊은 불성은 응시할 밖에 없다.
차지에 여성적인 섬세함으로 종종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는 시적 작위(作爲)는, 그 자신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 담백한 시격이며 역동성이다. 짐짓 다양성을 지닌 시편 또한 그러하지만, “기쁨과 고뇌로 무늬 진 / 내 민낯을 환히 들여다보다가 / 허탈하게 웃고 만다.(「가면을 챙기다」)”에서나 또는 “내 안의 아집 같은 돌덩이를 내려놓고 / 살랑살랑 발끝으로 물질을 한다.(「물 위에 누워–배영」)”에서 분망한 일상에서의 일탈이랄까? 한때나마 여유로운 삶에서 오는 평온함을 접할 것이나 즉물적 현상을 응시하는 그만의 시선은 ‘세상일 어지러워 둥근달을 들여다보듯’ “붉은 가사장삼 속/마음 비우고 집착을 버린 / 긴 수행(「연둣빛, 탑」)”에서 확인되듯 ‘텅 빈 공空의 세계’와의 합일이다. 보다 극명한 ‘연둣빛’ 시어의 특이성은 자연을 ‘추상화된 상징성의 극대화’로도 파악되어 마침내 새순(筍)은 연두색을 선명하게 머금고 있어 성장을 뜻하며, ‘평화나 창조, 타인을 배려하는 관대함’의 속성을 지닌다.
여기서 나무를 연상시키는 ‘창조와 풍요와 조화로움’을 빚는 연금술사와 같은 신비의 색조(「연초록 물음표」)는, 권정남 시인의 트레이드마크로 그 정체성을 한층 더 아우른다. 또 한편 삶의 처소에서 하찮은 풀꽃에 관한 관심의 몫은 감동을 회복시키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맞닿아있다. 까닭에 ‘시외터미널 맞은편 빈집’의 어설픈 풍경처럼 “목련이 소복 입은 채 투신하고 / 벚꽃 잎들이 허공에 소지를/날리고 있었다.(「떠나는 집」)”도 눈물겹지만, 2002년 8월 30일 강릉지역을 휘몰아친 태풍 루사와 화자의 처연한 기억의 속내는 영혼의 큰 울림으로의 나직한 통곡이다. 또 하나 “사천 땅 공원묘지 폭설이 쏟아지고 / 긴 적막이 흰색 차일을 치고 있다(「진혼제」)”에서나 “루사가 / 너를 모질게 데리고 가던 그날처럼 / 천국까지 닿는 네 어머니 기도 소리(방문訪問)”에서 그 눈물은 또렷해 울컥 억장이 내려앉는 피울음이다.
 
결론적으로 렐프 왈도 에머슨이 “오늘 하루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다.”라는 역설을 전의식(前意識)으로 수락하여야 하고, 소중한 인간관계를 한순간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위는 결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모쪼록 ‘지금(now)과 여기(here)’라는 그 절박한 관심사(關心事)로 불신과 경계의 벽을 허물고 극명한 삶의 좌표를 향해 역풍을 가로지르되, 시의 본말인 ‘성(聖)스러움’에 일관성을 지니고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서서’ 항상 날(刃) 푸른 역사 인식을 지니고 시대적 소임을 엄숙하게 실천궁행하는 존귀한 실체로서 그 정체성(Identity)의 자리매김은 확고히 다져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