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50호2020년 [초대작품_시] 하루살이 별 외 1편 / 김종영 (강원아동문학 회장)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41회 작성일 20-12-28 12:49

본문

하루살이 별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하늘 뒤덮고 죽은 말만 콩 볶듯 뱉는 찻길
그 길 외진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밤이면 검은 입을 떡 벌린 미로 같은 먹자골목
흑백 사진 속 겨울 어머니가 가난에 젖어 살던 그 옛날이 복사된 듯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줄에서 빛 받아 하루를 버텨가는 애벌레 삶터


저녁 어스름 지친 그림자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든다
술 한 잔에 삶의 아픔 토해내고
알 수 없는 분노 화살을 세상 향해 쏜다
순댓국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는 둥 마는 둥
또 비틀거리는 골목길 돌아
달팽이 가족 둥지 짊어지고 흐느끼듯 흐느적거리며 노랫가락 풀며 간다


우주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얽히고설키듯

우리들 삶도 뭐 별수 있겠는가
숲속 나무뿌리처럼 세상길처럼
그렇게 한 몸으로 엉켜 기생충인 듯 아닌 듯 살아가는 것을
때가 되면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데
나비 화려한 여행을 꿈꿀까
매미 절창을 기도할까


언덕 위 붙박이 어둠만 살던 비좁은 길로 달이 뜬다
더 길어진 지렁이 그림자가 힘겹게 오른다
벙긋 입 연 대문으로 아이들 웃음 눈빛이 쏟아져
하늘에 별이 뜨고
골목길 은빛으로 채색한다
아버지보다 힘찬 팔들이 바싹 마른 나무에

푸른 깃발로 펄럭인다 별이 춤춘다


-----------------------------


탈춤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관노가면극 보러 갔다 사랑싸움에 각시가 자살극을 벌이는 탈춤을 “엄마, 왜 사랑을 훼방 놔.” 엄마는 그저 웃으며 “그러니까 탈을 썼지.”


젊었을 때 길거리에서 또래들이 자유를 외치는 것도 사치스러워 눈감고 노동판에서 뼛골 빠지게 일해 번 돈을 깡그리 자식 꿈 위해 바치는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어 어머니 말대로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벌레 되어 탈 쓰고 직장을 선택했다


빌딩에 삶터를 잡고 일에 파묻혀 초침처럼 살면서 나도 모르게 단오 탈춤꾼이 되어갔다 밤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세상 계단이 탈을 내 방에 하나 둘 걸어 놓고 난 필요 없다 소리쳐도 삶의 질긴 끈은 또 탈을 내 침실까지 걸어 놓더니 어느 날 육식으로 뚱뚱해진 내 배를 보며 탈들이 얼굴 하나씩 들고 와 탈춤을 춘다 지쳐 자고 싶은데 이놈들은 나를 데리고 논다 이제는 만성이 되었다 싶었는데 술만 먹으면 나도 그들 숲에 끼어 춤춘다 대본도 없는 소리도 지르고 악을 써가며
어느 날은 칼춤에 신바람이 나고 또 총 들고 길거리 사냥에 쾌감을 느끼고 잠에서 깨면 순한 짐승처럼 빌딩에서 숨 쉬고 그런 어느 날 화장실에서 내 얼굴을 본다 이상야릇한 탈을 쓴 ‘야누스 두 얼굴’에 깜짝 놀라 뛰쳐나오지만 호기심에 거울에 빠져들곤 한다 늘 바뀌는 탈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소생일까 나를 잃을까 겁이 났다


길을 걷는다 탈은 감추고 걷는다 일상 오가는 사람들도 탈을 숨기고 걷는다 연속극에서도 탈춤을 추고 나라들도 삶 곳곳에서도 한 판 탈춤 공연이 시작되고 신문에서도 뉴스에서도 탈춤 공연이 예고 없이 등장한다 바다와 땅의 탈춤 소식도 접한다
그렇구나 인간이나 자연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면서부터 탈춤을 췄구나 그건 숨쉬기 위한 숙명적인 퍼포먼스야
“엄마, 언제 탈춤이 끝나?”
“네가 별이 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