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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축하의글] 갈뫼에서 보낸 한 시절을 추억하며 / 이상국(한국작가회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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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182회 작성일 20-12-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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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2년 4집부터 『갈뫼』에 참여하여 20집까지 활동했다. 그사이 많은 문우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간 『갈뫼』를 통하여 9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나의 데뷔작 또한 『갈뫼』에 게재한 작품이었다. 돌아보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내 문학 공부를 『갈뫼』에서 한 셈이다.
『갈뫼』가 지령 50호를 맞는다. 축하할 일이다. 인문적 바탕이나 문학적 전통이 전무한 전후의 수복지구 소도시에서 적지 않은 시인 작가가 배출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이다. 먼저 『갈뫼』를 이끌어 온 소설가 윤홍렬 선생의 헌신과 72년에 등단하여 문명을 얻은 이성선 시인이 저 앞에 있었다. 그리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 동인들에게 분발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선사했던 김종영 아동문학가, 당시 한국 최고의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을 통하여 등단한 박명자, 최명길 시인과 강호삼 소설가 등 쟁쟁한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50년이면 반세기다.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를 100년쯤으로 본다면 그 절반에 해당하는 적잖은 기간이다. 지금쯤은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말할 만하다. 그렇다면 『갈뫼』의 역사는 무엇이며 어떤 전통이 있는가? 그리고 장차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등에 대하여 성찰적 시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50년이면 내외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어떤 변곡점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회원은 15,6명 정도였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은 두 사람만 『갈뫼』에 남았다. 창립 회원인 강호삼 소설가와 40년 이상 갈뫼를 지키고 있는 김춘만 시인이 그들이다. 두 분께 경의를 표하며 각기 이승에서의 필생의 작업을 마치고 타계하신 소설가 윤홍렬 선생과 이성선, 박명자, 최명길 시인들께 바치는 개인적 추모의 염과 함께 축하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교 은사이기도 한 윤홍렬 선생은 학창 시절에도 그랬지만 사회생활이나 문단생활을 하면서도 잘 모시지 못해 늘 죄송했다. 설날 회원들이 세배를 가면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셨고 때로는 탭댄스도 추셨다. 수업 시간에 당신은 언젠가 노벨문학상을 탈거라는 말씀을 늘 하셨는데 하늘나라에도 그런 상이 있으면 타셨으면 좋겠다.
이성선 시인은 술 마시면 시를 낭송했고 취하면 노래 부르자고 했다. 그에게는 그런 디오니소스적인 데가 있었다. 학교와 문단 선배로 많은 배려를 해주었으나 나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언젠가 서가에서 선감귀감과 헤르만 헤세를 뽑아주기도 했다. 문득 성대리 고향의 천정으로 돌아가 많은 독자들이 그리워하는 별이 되었다.
최명길 시인은 온유했다. 무엇이든 넘치는 일이 없었다. 문학도 그랬던 것 같다. 시에 대한 그의 염결성은 특별했다. 그는 늘 외로웠다고 했으나 그 외로움이 그를 산 같은 시인이 되게 했다고 나는 그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했다. 타계한 후로도 몇 권의 유고 시집이 발간될 정도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용맹정진한 시인이었다.
박명자 시인은 그야말로 천생 시인이었다. 슬프다. 그렇게 지상에서는 시인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을 것 같은 시인도 시를 버리고 가다니……. 자상하고 친절했는데 만나면 인사라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지상에 열세 권의 시집을 남겼으나 누군가 語不驚人死不休라 했던가! 아마 그렇게 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50년 역사에 한 시절 몸담았던 사람으로 이들이 나의 자랑스러운 선배이자 전통이다. 그리고 넘어야 할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