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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수필] 동해북부선! 그 오래된 기억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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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594회 작성일 21-12-0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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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북부선! 그 오래된 기억




프롤로그–동해북부선(東海北部線)

80여 년 전인 1937년! 속초에는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일제는 1928년 한반도의 동쪽의 남과 북을 잇는 동해북부선 공사에 착수하여, 1929년 안변-흡곡 구간이 먼저 개통ㆍ운영되었고, 1937년 12월 1일에 간성-양양 구간을 개통했다. 동해북부선은 일제 강점기 시절 양양의 철광석을 군사기지였던 원산으로 수송하려는 제국주의적 수탈의 목적에서 건설한 철도이다. 당시 원산으로 가는 기차는 양양역襄陽驛을 출발하여 29개의 역사(정차역 18개소, 간이역 9개소, 무인역사 2개소)가 있었으며, 양양에서 하루 4번(05:00, 10:00, 16:00, 21:00)씩 원산으로 출발하였는데, 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에피소드 1–우리 집 감자 밭이 낙산사역!

일요일이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재빨리 마루를 빠져나가 철둑길로 뛰어갔다. 철둑길 위로 올라서니 진평벌과 군부대 비행장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벌써 아이들이 오늘 전쟁놀이에 쓸 칼을 만들기 위해 철둑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나도 실한 놈 하나를 골라 잔가지를 쳐내고 손잡이로 쓸 부분에 나만의 무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귓부리가 쑥 당겨졌다. 아버지다. ‘아차! 오늘 관사 자리 밭에 감자 씨 놓는다고 했지.’ 입을 아무리 내밀어 봐야 헛수고다. 진평벌은 전부 논인데, 철둑길과 논 사이는 밭이다. 그런데 우리 마을 사람들이 농사 짓던 밭의 구조가 다른 마을의 밭과는 참으로 달랐다. 다른 마을의 밭들은 흙이나 밭에서 주어낸 작은 돌들로 둑이 만들어져 있는데, 우리 마을의 밭만 경계선이 아주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의 잔해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오래된 건물이 철거되고 남은 자리에 흙을 부어 만들어진 밭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칼싸움을 하던 시멘트 바닥이 바로 양양에서 출발해서 원산까지 가던 동해북부선의 철도역 중의 하나였던 낙산사역의 플랫폼 자리였고, 땀을 흘리며 풀을 뽑던 감자밭은 낙산사역의 직원들이 살던 관사 자리였다. 낙산사가 인근에 위치하여 역명이 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정암리 448-2번지다. 내 고향 주소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정암 2리 448의 5번지다. 우리 마을 밭의 콘크리트 경계선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것은 30년이 지나서였다.



에피소드 2 - 엄마는 마루보시댁

어렸을 때, 친구들 어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시집오기 전 살던 마을 이름을 붙여 ‘강선댁’이라든가 ‘장산댁’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머니의 호칭은 ‘마루보시댁’이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아버지에게 그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도 결코 대답을 해 주시지 않았다.

마루보시丸星는 일본의 철도운송 회사의 이름이다. 1930년 설립된 대한통운의 일본식 이름이고 나중에 공식 명칭을 ㈜ 조선운송회사로 정하였다. 즉 마루보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철도역에서 물자 운송이나 하역을 전문으로 하던 회사의 이름이다.

그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친척 집 결혼 잔치에 갔을 때였다. 내가 사랑방에 들어앉아 책을 보고 있는 줄 모르고, 대청마루에서 전을 부치던 아주머니들의 수다 중에 어머니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피난길에 폭탄 파편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전 남편이 원산역의 마루보시 책임자였기에 어머니의 택호가 ‘마루보시댁’이였던 것이다. 휴전 후 아버지를 만나 재혼 후 우리 삼 형제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집도 이곳 수복지구의 많은 가족들처럼 피난민들이 새롭게 가족을 이룬 재혼 가족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짜증 내며 풀을 뽑던 감자밭과 아버지가 결코 말해주고 싶지 않았던 ‘마루보시댁’은 모두 그렇게 동해북부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에피소드 3–속초역사! 그 오래된 기억

초등학교를 마치고 친구들의 절반은 양양중학교로, 나머지는 속초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아침 6시. 물 말은 밥 한 그릇과 김치 한 보시기로 부뚜막 앞에 선채로 아침을 먹고 무거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길을 나선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자갈길인 신작로(7번 국도를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를 따라 물치를 지나다 보면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내물치에 닿으면 신작로를 버리고 비탈진 철둑길로 올라선다. 바닷가를 따라 이리저리 휘어진 신작로 보다 철둑길이 더 빠른 직선길이기 때문이다. 대포초등학교 뒤쪽을 빠져나오면 철둑길과 신작로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한다. 그 길이 갈라지는 곳이 지금의 성호아파트 입구이다. 신작로는 새마을로 해서 청호동 쪽으로 가야 하고, 철둑길은 논산리를 통해 지금의 쌍다리 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걸어야 할 거리가 훨씬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철둑길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걸어야 지금 문우당 자리에 있는 속초중학교에 도착한다. 당연히 물치 촌놈들이 등교 1등이다. 학교가 끝나면 아침에 왔던 길을 역주행한다. 그러나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거나, 한겨울 폭설이 내리면 다음날 등하교가 힘들어 촌놈들은 시내의 친척 집이나 친구네 집 신세를 져야만 한다. 그 시절 내가 신세를 지던 집은 지금 시외버스터미널 자리 옆에 있던 이상하게 생긴 당숙네 집이었다. 주변의 다른 집은 초가집이거나 기와집이었는데, 당숙네 집은 콘크리트로 지은 이상하게 지붕이 높은 건물과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은 당숙네가 살림집으로 쓰는 벽돌 건물 집과 고깔 모양의 건물이 있었다. 천장이 유난히 높은 고깔 모양의 건물 안은 입구 쪽은 창고처럼 쓰이고, 안쪽은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숙소로 쓰고 있었다. 역사로 쓰던 건물 안쪽은 넓어서 비가 와도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놀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날이 궂은 날이면 이따금 잠자리 신세를 지던 당숙네 집과의 인연은 아이들 교육 문제로 당숙네가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인연을 다했다. 그 기억이 남아 있어, 대학교 시절 춘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서 차 시간을 기다리다 지루하면 슬슬 걸어 올라가 아무도 살지 않은 고깔 모양의 건물을 오래 바라보곤 했었다.

그 추억의 건물이 사라진 것은 내가 교사로 첫 발령을 받던 1978년이었고, 그 건물이 속초역사 건물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에필로그–속초역 역사(驛舍)

속초역 역사驛舍는 속초시 동명동 450-195번지에 1941년에 프랑스식 고깔형 건축 구조로 세워졌던 동해북부선 철도의 한 역사驛舍이다.

해방 이후 속초역사는 38선 이북 지역에 속해 북한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대규모 폭격으로 철로가 파괴되어 역사驛舍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상실되었으며, 국군이 북진할 때는 화장장火葬場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동해북부선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속초역사는 꿋꿋이 남아서 댄스홀이나 교육시설, 벽돌공장 등으로 활용되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1978년 4월 10일 철거되었다.

기억도, 사람도, 건물도 결국은 사라지고 변할 수밖에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서사에 대한 기억이다. 그러나 그 기억도 기록되지 못하면 사라진다. 역사는 기록되지만, 개인의 서사는 기록되지 못하는 일이 더 많다. 그래서 기록되는 개인의 서사는 매우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