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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수필] 질투의 힘은 넣어둬! 외 1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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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13회 작성일 21-12-0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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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사월은 벚꽃을 맘껏 보지 못했다.

몇 년 전 갑작스런 속초의 불로 많은 상심이 벚꽃대신 피어났다.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들 등 뒤로 순식간에 불씨들이 날아들었다. 나무들은 검은색으로 다 타버렸다 타지 않은 나무들과 타들어 간 나무들은 평행선을 그으며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

죽어가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한 족에서는 눈부시도록 꽃을 피고도 웃지 못하고 말없이 꽃잎들만 날고 있다.

요번 가을은 쓸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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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힘은 넣어둬!



양양의 하늘은 늘 아름답다.

고성과 양양을 번갈아 다니지만 양양의 하늘이 더 멋지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산으로 둘러싸여서 주변의 산세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구름 속에 번지는 파랑 하늘은 유화기법에서의 블랜딩 기법처럼 서로 뭉개지면서 스푸마토(sfumato)를 일으키며 하늘 속에서 마구마구 섞이고 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속초에 살면서 감사함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중한 눈을 잘 아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산다.

요즘 양양을 자주 간다. 친구가 갑자기 갑부가 되어 건물을 짓고 카페까지 하게 되었다. 늘 어렵게 살아 주변에서도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밥 한번 사는 적 없고 늘 얻어먹는다는 소문에, 여기저기 밥 먹는 곳이면 다 따라다닌다고 욕을 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땅값이 올라 갑부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유산으로 받은 조그마한 시골 땅이 급상승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아마도 여기 속초, 양양, 고성에서 급격하게 땅값이 올라 저렇게 부자가 된 이들이 꽤 있을 듯하다.

반면 친한 후배는 일자리를 잃었다. 다른 사람이 기존에 있던 자리를 차지하면서 뺏기고 만 것이다. 그 사람은 그 후배 보다 돈도 많고 더 잘 산다. 그런데도 후배의 자리를 탐하여 뺏고 말았다. 문득 아홉 가진 사람이 하나 가진 사람 것을 뺏는다라는 말이 피부에 확 와 닿았다.

비단 그 친구뿐이겠는가? 세를 주어 그곳에서 장사가 잘되면 주인이 똑같이 그 장사를 하는 경우도 보았다. 지인이 경영하는 가게도 잘되니 세를 감당할 수 없도록 올려 달라 해서 지인이 화가 나 무리를 해서 건물을 지어 나갔다. 여전히 새로운 곳에서 장사가 잘되어 힘든 것을 극복하고 산다. 그러나 전 건물은 아직도 비어 있다. 그렇게 그냥 있는 대로 두었으면 월세라도 받아서 현상을 유지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너무 비싼 임대료에 코로나19가 겹치는 바람에 그는 세도 못 받고 텅 빈 가게 때문에 세금만 나갈 것이다. 이렇게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세상이다. 더구나 속초는 남이 하면 따라 하는 따라쟁이들이 수두룩하다.

요즘 속초는 점점 아름다운 바다와 산이 있는 도시가 아닌 아파트 천국의 속초가 되어 가고 있고 양양에서부터 고성까지 카페가 바다를 가리며 줄을 서고 있다. 아파트와 카페가 천지인 도시가 되어 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분명 거기에는 망하는 곳이 있을 테고 더, 더, 더 옆집보다 더 큰 건물을 지어 장악을 할 것이다. 그렇게 작은 가게들은 슬픔을 가질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갖고 있으면 뺏고 싶은 심정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입고 다녀서 예쁘면 자기들도 입으면 예쁜 줄 안다. 사람마다 다 체형이 다르고 옷 색깔에 따라, 디자인에 따라,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데도 말이다. 내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한 벌 만들어 주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그냥 해주지는 않는다.(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만들어 준다. 나도 약아지고 있다. 아니 정상이라고 한다.) 거의 원단 값만 받고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내 나름대로 어울리는 그 사람의 스타일대로 만들어 주고 싶었으나 자기가 해달라는 대로 해달라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역시 그 사람한테 그 디자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그 원망은 나한테 있을 것이다. 오배송에 정말 힘들게 그 원단을 두 번씩 받고 원가만 받은 것은 그저 내 사정일 뿐, 그 사람은 자신의 다른 생각으로 서운함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친구가 그런다. 열이면 다 네가 만든 옷에 만족할 수는 없다. 그중 한 사람은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그래 내가 만든 것들을 모두가 좋아할 수는 없다. 분명 만들어 줄 때 나는 프로가 아니고 꼭 맞춤을 하는 양장점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다들 98% 만족을 한다. 다시는 옷을 만들어 주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건만 그다음 주에 다른 이가 주문을 하는 바람에 또 만들고 말았다. 옷을 만드는 일이 참 재미있다.

우연히 이모랑 전화 통화를 하다 친정엄마의 처녀 시절을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그렇게 옷을 잘 만들었다고 한다. 패턴도 없이 쓱싹하고 원피스, 바지, 치마, 모든 옷을 만들어서 돈을 꽤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너의 아버지가 질투가 하도 심해서 결국 결혼을 하고는 미싱에서 손을 놔 버렸다고 한다. 너희 엄마가 서울 남대문에서 그렇게 옷을 만들어 잘 팔았는데 지금까지 했다면 갑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솜씨가 아깝다고 했다. 아마도 네가 엄마의 솜씨를 닮은 모양이라며 신기하다 이야기 하였다. 나도 신기했다.

그놈의 질투, 질투. 나도 몇 년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힘들어 했다. 결국 질투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라고 결론을 내려 주었다.

코로나19가 오면서 미용실도 못 가는 바람에 머리를 길게 기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머리를 모든 사람들은 멋있다, 나답다 하며 칭송을 했지만 나를 아는 어르신들은 왜 그리 머리를 산발하고 다니냐고, 그 외 몇 사람들도 그렇게 나의 헤어 스타일에 빈번히 말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견디어 왔으나, 결론은 생머리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에 말들이 많던 사람들은 이 촌스런 머리가 너무 예쁘고 지금껏 중 제일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열 명 중 일곱 명은 예전 머리가 멋있고 예쁘다 하는데 셋은 지금의 이 촌스런 머리를 선호한다. 자기 스타일도 아니고 내 스타일인데 왜 왈가불가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은 질투라 한다. 어르신들은 질투가 아니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질투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질투의 힘은 너무나 쎄다. 그 질투의 힘으로 인해서 세상은 힘들어지고 급기야는 살인의 지경까지 가는, 너무도 많은 일들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본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질투의 힘은 막강하다. 연인들 사이에서도 질투로 인한 데이트 폭력이 비일비재해지고 있으며 그 건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어 심각한 수준까지 넘어서고 있다. 그 질투의 막강한 힘이 너무나도 무섭다는 것을 그 흔한 막장 드라마에서 우리는 많이 보고 있을 것이다.

적당한 질투는 좋다고 한다. 경쟁사회의 자그마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질투의 힘을 조금만 빼고 맘속에 넣어 두고, 꺼내지도 말고, 드러내지도 말고, 참으며 조금만 배려하자고 이야기 하고 싶다.

요번 어느 곳에 원고를 보내려 본 책 속에 그런 말들이 나와 있다. 이 팬데믹 시대를 아주 잘 묘사한 그 책은 지금의 우리의 일상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책 속의 주인공의 두 모습이 보입니다. 비 오는 날 강아지와 같이 걸어가는 모습에 우산은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멈추고 혼자가 되어 바라본 세상에서 느낀 나는 다시 비 오는 날 강아지와 걷는 모습에 우산은 강아지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지금 일상의 모습을 비교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어린이책이지만 어른이 읽어야 할 동화이기에 읽고 난 감동을 받았다. 나 또한 그 책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원고를 보냈지만 지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늘 일상에서 나를 생각하고 내가 우선이었던 시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들이 멈춤이 되어버렸다.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나는 비로서 그때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인들과의 만남도 멀어지고 모든 것이 경계선을 지켜야 하는 세상, 그래도 우리는 나 아닌 남을 조금만이라도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각박한 현대 사회일수록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세상으로도 변했음 하는 생각이다. 아홉 개를 가진 자는 한 개를 가진 자 것을 탐하지 말고 한 개를 주어 여덟 개를 갖고 그에게 두 개를 갖게 하자. 한 개를 가진 자 보다 여덟 개가 많지 않은가? 이렇게 점점 변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다.

“질투에서 오는 막강한 힘은 자신의 마음속에만 넣어 둬! 절대 꺼내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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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올해 사월은 벚꽃을 맘껏 보지 못했다.

몇 년 전 갑작스런 속초의 불로 많은 상심이 벚꽃 대신 피어났다.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들 등 뒤로 순식간에 불씨들이 날아들었다. 나무들은 검은색으로 다 타버렸다. 타지 않은 나무들과 타들어 간 나무들은 평행선을 그으며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 죽어가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한쪽에서는 눈부시도록 꽃을 피고도 웃지 못하고 말없이 꽃잎들만 날고 있다.

요번 가을은 쓸쓸할 것 같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패를 하는 나는 힘겹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들에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흘려듣는 말도 슬프다. 나에게 갱년기가 오면서 그저 서운함이 많아진다. 조그마한 일에도 슬프고 작은 일에도 노여움이 생기고 서운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이 갱년기도 슬프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알 수가 없다. 왜인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는지… 그러나 참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할 내 몫이고 내가 견뎌내야 하는 나의 것이다. 누군가 그런다. 넌 참 예민하다고… 그럴까? 그래 그럼 예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예민한 나에게 말들을 함부로 하는 걸까? 저 사람은 예민하니 좀 더 예의를 갖추어 주고 좀 더 말을 조심하고 배려해 줄 수는 없었을까? 그렇게 예민하면 너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겠다. 그래 나한테 제발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예민하니까 충고도 격려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얼마나 친하다고 그러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그것 또한 나만의 생각이다.

어쩔 수 없는 모임에서 마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다 좋을 수는 없다. 너무 힘들어서 그 모임을 그만두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충고에 그만두지 못했다. ‘참을 만큼 참아보다 더 힘들면 그만두자.’ 하고 견디며 있다. 가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그 인사를 받아 줘야 한다. 그런 상황이라도 참아야 한다. 그것도 내 몫이고 내가 견디어야 하는 것이다.

가고 싶지 않은 식사 자리가 있었다. 내가 껄끄러워 하는 상대가 밥을 사는 일이다. 공식적인 자리라 싫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같이 가자고 한다. 동료들이 있어서 가야 했다.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데 체한 것 같다. 저녁에 집에 와 다 토하고 결국 탈이 났다. 애써 사준 밥이라도 내가 싫었으면 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나는 또 거절하지 못하고 내 몸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 변기 앞에 앉아 다 토해 내면서 주루룩 눈물이 나왔다.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너무 많은 정을 주었나? 모임에서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차 안에서 눈물이 나왔다.

내가 이렇게 슬픈 만큼 그도 슬플까?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님 다 잊고 일상을 즐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라면 그저 며칠 지나 잊고 하하 호호 떠드는 일상이 되었을 것이지만, 시간이 허락한다 해도 예전의 일상으로는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도 될 수 없는 그저 스쳐 가는 타인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다 말로 빚어지는 감정의 언어들이다. 우리는 동물과 다르게 상대방의 말에 뼈가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렇다. 신기하게도 상대방의 말에 감정이 심어 있는지 사랑이 담겨 있는지 정확하게 안다. 간혹 무딘 사람은 뭐지 정도 한다. 그리고 그냥 넘겨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은 집에 와 곱씹어 보며 그게 뭔 뜻이지, 나한테 왜 그랬지 하면서 때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아니 대부분은 그 자리에 뭔 말이냐며 따진다. 그렇게 예민한 사람들은 가슴속 깊이 묻어 두며 감정을 쌓아가기도 한다.

나도 올해부터 그 자리에서 따지기 시작했다. 순간 자신이 내뱉는 말들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언어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초등 교과서에서도 나와 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뱉은 말이 때론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남의 심장을 잔인하게 찌르는 무기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안타까운 사실은 본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함부로 내뱉은 말로 상대는 사경을 헤매는데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고 나와는 상관없다 그러고는 상처받는 사람들이 문제라라고 몰아가며 예민하다, 소심하다, 기우杞憂다 등등으로 그 상처 받은 사람들을 심신미약자 취급을 하며 빠져나가려 한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폭력이면, 언어도 마찬가지다. 또 상대가 원하지 않는 조언은 잔소리일 뿐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

우연한 계기로 지인의 속내를 알고 난 후 마음이 아파서 밤새 울었다. ‘다, 니 맘 같은 줄 아니?’ 하면서 충고하는 언니도 미웠다. ‘첨부터 사람보고 사귀어라.’ 사람의 속내를 내가 아나?

십 년 만에 방등을 갈았다. 환하다. 이렇게 밝은 만큼 사람들의 속내도 훤히 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사람의 속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최근에는 새로운 사람은 경계를 두고 만난다. 가끔 그러는 내가 바보 같다. 요즘 서울로 오가며 친하고 싶어 하는 지인이 있다. 너무나 내가 경계를 하고 거리를 두니 처음에는 오해를 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나의 예민함에 이야기를 하니 이해를 하고 받아들인다. 그래도 나는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선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나도 이기적이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 그래야 더 오래 만날 수 있기에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젠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마음, 시달림이 힘겹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에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지 하는 마음도 슬프다. 그저 좋은 사람들로 그냥 만나면 안 되는 걸까. 이 바보야 이 바보야, 사람들이 사람을 얼마나 이용하는데 넌 어째서 그걸 모르고 맨날 이용당하고 뺏기고 사냐고 너가 바보냐고. 그래 이제는 안 그런다고 절대 안 그런다고 했지만 사람 대하는 것에 홀로서기가 무섭다.

무더운 날 벌이 집으로 들어왔다. 어떡하든 살려서 내보내려고 애썼지만 형광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련한 놈, 그렇게 목숨을 살려주려고 애쓴 나도 몰라주고 형광등 안에서 죽어버렸다. 명복을 빈다. 이 미련한 놈아 하고 쳐다보았다.

문득 사람과의 관계랑 같구나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한테만 잘하면 된다. 내가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멈추면 된다. 굳이 애써 잘 보이려고 잘할 필요 없다.

그렇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벌이 들어와서 내가 쏘이지 않으려고 애쓰면 될 것을 그놈의 목숨까지 살려주려고 오지랖을 떨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내가 쏘이지 않으려고 애쓰면 되는 것이다. 내게 맛난 것을 주는 사람에게만 맛난 것을 주고 내게 고운 말을 쓰는 사람들과만 만나면 되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한 번이라도 상처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멀리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되고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는 척 안 하고 싶으면 둘이만 있을 때는, 소위 요즘 말로 쌩까고. 공식적인 자리이던지, 모임이라든지 내가 욕을 먹지 않을 만큼 아는 척은 위선으로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 위선이 속상해서 차라리 안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것은 바로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로 말을 안 하고 너가 아는 척을 안 하고 하면 이상하다 생각하며 또 뒷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 상처를 받을 것이며, 뒷말을 한 이에게 섭섭할 것이니, 위선으로라도 인사를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라도 봐야 하냐고 하니, 그래야 한다고 한다. 씁쓸하다. 그래야 하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을 할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영 개똥 밟은 느낌이니… 어쩔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일이다. 그래도 사람 똥 밟는 것보다는 개똥을 밟는 느낌이 좀 더 낫지는 않을까 한다. 그렇게 몇 해 너무 숨이 막혔었다. 언어로 조이는 폭력에 죽을 것 같으니 이렇게라도 행동해야 살지 싶다. ‘그 자리에서 따지기, 그리고 뒷말하지 않기. 그리고 맘에 담아 두지 않기, 그렇게 살아라 하고 체념하기. 그리고 나한테 좋은 사람들에게만 좋게 대하기.’

만나면 즐거운 사람, 겸손한 사람, 이해타산적이 아닌 사람. 늘 내 곁에 좋은 사람들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지인 언니는 또 나를 나무랄 것이다. 어디든 그중 하나는 또 있다. 네가 무디어지는 방법이 제일 낫다.

그래 무뎌지는 법을 배우자. 그러려니 하자.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지 모르니 언어의 온도에 민감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