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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수필] 나의 등단 이야기 / 강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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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77회 작성일 21-12-0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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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단 이야기

― 1970년 속초에서 동인지 『갈뫼』를 펴내다



이제, 51년 전의 아득한 이야기가 됐다. 등단 이야기를 하자니 자연스럽게 속초에서 펴낸 동인지 『갈뫼』 이야기부터 먼저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 동인지 『갈뫼』는, 김춘만 김종헌 이은자 이구재 권정남 후배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지난 해 12월, 마침내 지령 50호를 발간해 내기에 이르렀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계획했으나 코로나가 발목을 잡아 동인들끼리만 아쉬움을 달래고 말았다.

필자가 난생처음, 6.25의 수복도시 속초에 발을 딛었던 것은 1968년 12월 20일이다. 지도에서조차 찾기 어려웠던 소도시였다. 명태와 오징어가 많이 잡히고 38 이북 동해안의 신생 작은 도시로만 알았을 뿐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마장동에서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짐이라곤 큰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가방 속에는 옷가지 몇 점을 빼고는 시험 준비를 위한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비포장 군사도로인 진부령 길을 넘어 장장 여덟 시간을 달려 속초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쯤, 전날 내린 눈이 녹아서 사방이 진창이었다. 버스에서 내렸으나 발을 제대로 디딜 곳이 없었다.

신문에 나온 광고를 보고 총무처에서 치르는 국가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임지가 전국의 시 군 소재지마다 있었지만 필자는 일부러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같은 대도시 등을 마다하고 지도에서만 확인이 가능했던 속초를 지원했다. 내 깐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해 좋은 직장에 이직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갯가에 있는 루핑지붕의 허름하고 낡은 집에 하숙을 정하고 이튿날부터 출근을 했다. 직원 다섯 명의 신설 기관이었다. 기술직이어서 업무는 단순했고 3교대 근무여서 사흘마다 하루씩 밤을 새는 근무였으나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신생 소도시가 다 그렇듯이 당시 속초에는 문화 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주민들 7~80퍼센트 이상이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었다. 대부분 오징어나 명태 잡이 같은 어업에 종사하면서 저축을 하고 판잣집이나 다름없는 임시 거처에 살면서 통일만 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는 터였다.

제일극장이라는 영화관이 한 곳 있었다. 커피를 파는 다방도 문화시설의 범주에 넣는다면 도시 전체를 통 털어 세 곳, 그 중 한 곳이 지금의 중앙시장 입구 도로 건너편에 있는 가야 다방이었다. 필자가 그 다방에 자주 가게 된 것은 속초에서 유일하게 그 다방에서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창 클래식에 심취해 있을 무렵이었다. 서울서 살다 온 다방 주인이 고전 음악 마니아여서 핸델 바그너 차이콥스키에서 모짤트 베토벤 소팡 프르코피에프 등 원만한 클래식 음반을 모두 다 갖추고 있었다.

바로 그 다방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윤홍렬 선생을 만났다. 속초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문학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나이 차가 있었으나 어쩌다가 합석을 하게 된 자리에 우연찮게 문학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도 부산에 있을 때 응감생심,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실천한답시고 《학원》, 《새벗》, 《아리랑》, 《청춘》, 《야담과 실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소월 시 등 닥치는 대로 문학 서적을 탐독했었다. 뿐만 아니라 K 대학의 국문과 유학파인 이두영 등이 부산에서 열었던 문학의 밤에도 참석하고 몇몇 사람들과는 등사판으로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강소천 선생의 동시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낙동강 어디선가에서 연신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근처 김해 비행장에서 이룩한 미군 전투기는 하늘을 쪼갤 듯이 하루에도 몇 차례 굉음을 울리며 뜨고 내려던 시기였다.

국어 수업 시간, 비행기의 굉음이 끝나길 기다려 담임 선생님이 제본되지 않은 낱장의 교재를 나누어주었다. 종이는 당시 국제연합의 운크라에서 지원한 새하얀 고급종이였다. 거기에 강소천 선생의 「보슬비」라는 동시가 실려 있었다. 짧고 간결하지만 소박한 시어詩語가 단숨에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동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필자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나는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려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려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윤홍렬 선생과 만남을 계기가 되어 급기야 당신의 제자들 중심으로 ‘설악문우회’라는 이름의 동인이 조직되고 『갈뫼』라는 동인지를 발간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공부를 좀 더 해, 좋은 직장을 잡겠다는 필자의 당초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180도 궤도 이탈을 해버린 셈이 되었다. 어쩌면 그까짓 법조문이나 법리 같은 것을 기계적으로 딸딸 외워, 딱 한번 고시에 합격한 뒤, 사람 위에 신이나 된 것처럼 평생 국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등이나 치는 일부 위선자들보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문학이 더 도전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인지를 발간하기 위해 원고를 모으긴 했으나 속초에 마땅한 인쇄시설이 없었다. 시청 같은 곳에 겨우 공문서 양식 같은 것을 인쇄하는 문화인쇄소가 유일했다. 인쇄소 사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서울에서 새 활자를 주조해 와서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동인지 『갈뫼』의 창간호를 발행했다. 지금 수준으로 보면 참으로 초라하고 볼품이 없지만 당시로서는 지방 소도시에서 자신들의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 된 것에 동인들 모두 뿌듯한 자부심을 가졌다. 게재된 작품들은 문학 장르 전부를 아우르긴 했으나 대부분 시詩가 차지했다. 수필 등과 함께 필자의 단편소설 「여심있는 향목」도 게재되었다.

창간호 기념행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념행사에 서울의 문명 높은 문단 어른들을 초청했다. 문협 이사장으로 계시던 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오영수. 시인 이원섭, 황금찬, 김윤성. 시조 시인 김상옥 선생님들이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다. 지방 소도시의 동인지 출판 행사에 이처럼 많은 중앙문단의 어른들이 참석한 것은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동인지 내용을 살펴본 어른들은 지방에서 등사가 아닌 활자 인쇄로 동인지를 발행했다는 것과 수록된 작품 수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조연현 문협 이사장님은 당장 동인 모두를 문협 회원으로 받아들일 테니 서류를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후일, 선생님들의 관심과 지도로 이성선(시문학), 최명길, 박명자, 이충희(현대문학), 이상국(심상), 이구재, 김춘만 동인이 시인으로, 김종영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모집에 동시가 당선됨으로 해서 동인들이 중앙문단에 대거 등단, 전국적으로 문명을 날리는 전대미문의 쾌거를 이뤄냈다. 이로써 속초는 결코 더 이상 문화적 후진 도시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필자도 오영수 선생님의 지도로 《현대문학》에, 1975년 산령 「산령山靈」과 「영역靈域」이라는 단편소설이 추천되었다. 별로 내세울 일이 아니지만 필자의 작품 「산령山靈」이 일역 되어 일본 내 배포되기도 했다.

추천 완료 후, 처음으로 《현대문학》에 발표했던 작품이 「진혼鎭魂」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다. 추천 받기 이전이었는데 88쪽의 원고를 무려 열다섯 번이나 고쳐 썼다. 파지를 합한다면 200자 원고지 2000쪽 쯤 되었을 것이다.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아예 궁둥이가 짓무르지 않았던 것만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랄까. 이처럼 추고를 거듭하고 심혈을 기울인 것은 신춘문예 응모를 위해서였다. 거듭 읽고 추고를 하고 이쯤이면 더 고칠 곳 없이 완벽完璧하다는 스스로 시건방진 생각을 하면서 D 신문사에 원고를 보냈으나 보기 좋게 낙선되고 말았다. 그나마 구차스러움을 면한 것은 신문의 최종심 심사 소감 3편 중에 필자의 작품 명이 거론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폐일언하고 문제는 지금까지 결과다. 50여 년 문단 생활을 하면서 단 한 편이 나마 건질 작품이 없다는 자괴감이 그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두 마리 다 놓친 셈이니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부끄러움만 하나 가득 남았다. 그럼에도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아직도, 정말로 내 마음에 드는 작품 한 편, 더 써보겠다는 허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죽을 때까지 한 번 더 도전해 볼 일이다.


*이 글은 《월간문학》 9월호에 게재된 것을 전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