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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성산포 연가 1 외 9편 / 이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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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97회 작성일 21-12-08 15:14

본문

영혼 씻기는 물길 있어

먼데 물소리 들리거든

그대, 기억해다오

찌든 영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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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 연가 1

― 이생진 시인 거리에서



성산포 그리움은 이생진 시인이 다 가졌으니

짊어지고 온 풍파나 풀어놓아

퍼렇게 멍든 성산포를 두고

아릿한 가슴으로 돌아서는데 그토록

좋아하는 바다가 일출봉 절벽에다

제 몸을 부딪치며

두고 가라 잊고 가라 꾸짖는데

알았다 고맙다


붙박이는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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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 연가 2



성산포에 와서 바다를 보시려거든

광치기 해변에서 풀을 뜯는 말들

순한 눈망울을 견뎌야 하네


성산포에 와서 돌담을 걸으시려거든

눈발 속에서 배시시 웃는 무들

속살거림에 귀를 풀어야 하지


성산포에 와서 일출봉을 만나려거든

일제가 찢어 놓은 바위의 상처들

눈물겨운 철썩거림에

가슴앓이부터 시작하시게


성산포를 통째 담으시려거든

일흔세 해 전 4.3 영혼들 핏빛 울음에

온몸 적셔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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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야야 물 말아 풋고추 된장 찍어 밥 묵자

매미도 목이 쉬던 삼복

호미 내려놓고 우물가로 향하시던 어머니

식은 보리밥에

칫칫, 눈 흘기는 오누이


감나무 그늘 아래 대나무 평상

접힌 다리를 펼쳐 놓은 낡은 밥상

가난한 점심에 둘러앉은 순정한 허기

다디단 샘물아


누구는 추억이라 하고

누군가는 그리움이라 하고

어떤 이는 건강이라 한다지


보리밥 한 그릇 경건히 받들어

날 선 허기와 기름진 욕망부터 꺼내 얹자

자유롭게 드나들던 바람 한 자락

따스히 어루만지던 햇살 한 움큼

아스라한 고향과 어머니의 손길

어진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더 해

단내 나는 고추장 한 술

참기름 한 방울 둘러 슥슥 비벼

한바탕 볼이 미어지는 거야

코와 입을 열어젖히며 웃는 그날까지

견뎌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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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그곳으로

― 시베리안 허스키



혈관 속을 유영하고 있을 늑대, 그 울음을 감춘

푸른 눈동자 닿은 그곳

눈 덮인 초원을 힘차게 끌던 썰매와

자작나무 숲이 보이는지


별들이 어둠을 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부산하던 일과를 마치고

동쪽 하늘 샛별 아래

곤히 잠들어

하늘을 나는 꿈 꾸었으면 좋겠네


열두 마리 품은 배 바닥에 닿아

기어서 탯줄 가르던 엄마

출산의 흔적 다 먹고 닦아 새끼 지켜 내는

야생의 불덩어리 가슴속에 꿈틀대는

무심한 네 눈이 차마 부끄러워


콩콩대며 뛰 돌아다니다

쓰다듬는 손길에 안겨 잠들던 아가야

안간힘을 쓰며 뜨거웠던 시절 지나

피어나던 꽃숭어리들 문이 닫힌 채

시커먼 철망에 목줄을 매고

소란스러운 마당 한 귀퉁이에서 늙어가고 있는


우리!

사슬을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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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씨의 가을



역병에 독한 예방 주사 맞고 온 할아버지

이번에는 갔겠지

장에 갔다 돌아와 방문을 열며

할아버지 하고 부르니

나 안 죽었어

아이고 새 시집 한 번 들랬더니, 하긴 그놈이 그놈이여

깔깔 까르르


이북에서 오신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금세 돌아가려고 고향 마을이 보일 듯하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는데 어린 아들딸 논밭으로 몰고 다녀 국민학교 마치니 번듯한 일꾼이 되었다는데 민통선 안 논밭과 나무들이 그녀의 손길 다독다독 모아 야문 손끝으로 되갚아 주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네요


군인들이 방아쇠를 당기면 총소리가 온 들을 흔들어 여기저기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데 그제서야 허리를 편 순자 씨가 흔들리는 들판을 벗어나는 오후 다섯 시 십 리도 넘는 길 걸어 걸어 다녔으니 그녀의 발을 여물게 키운 것도 산과 들이었네요

재잘재잘 모여서 한 짐씩 부려 놓고 잠시 쉬는 자리 귀신같이 나타난 군인들 차마 나무는 버려두고 연장부터 내놓으라는데

열서너 살 어린 친구들 한꺼번에 앞섶 밑으로 낫을 숨기는데 시퍼렇게 벼른 낫 저도 그 순간만큼은 순자 씨의 여린 가슴 아래 두근두근 숨죽이고 있었겠지요


평생 설움과 고생을 살결처럼 여겼다는 어머니 그 어머니 친구들 앞에서 방귀 한 번 뀌었다고 석 달 열흘 야단치셨다는 아버지 여자가 어디서 여자가 어디서 여자가

우리할아버지 옆에서는 아직도 방귀를 꾹꾹 여민다는 수줍은 순자 씨


세상에 좀체 싫은 일이 없는 순자 씨가 바늘로 찌르는 것은 고추가 아니라 일흔 두 해를 건너온 그녀의 징검돌입니다 듬성듬성 늘 아슬하게 뛰어 건너야 했던 매운 그곳, 짭짤한 간장물 스며들어 돌이킬 때마다 달큰하게 익어 있기를


훤칠한 친정아버지처럼 소싯적 바람 풀풀 날리고 다녔다는

그 바람 제 몸에 들어 십 년 넘게 중풍을 앓고 있는 우리할아버지가 주유소 앞 풍선 간판처럼 고분 해져 맘에 든다고 깔깔 웃습니다

아주머니 서넛 우리할아버지우리할아버지 합창하듯 왁자합니다

달이는 간장에서 뭉근히 익은 단내가 식당 안팎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그녀의 발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가을 밖까지 퍼질 요량입니다

들녘 나락들 알알이 그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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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실핏줄 앙상한 감잎이 나무를 붙잡고 있는 것은 풋 단감의 볼이 아직 수줍은 까닭입니다

못다 여문 코스모스 씨앗 해바라기 하는 사이로 새끼 고양이 두 마리 나비를 쫓아 껑충 뛰었다가 철푸덕 주저앉는 모양새에 저것 좀 봐 저것 좀, 코스모스 가족 온몸으로 자지러지는데 옆방에 세든 백일홍도 키득거립니다 저러다간 앞마당 철 지난 찔레 장미까지 소문나겠어요


대추알 붉은 점, 점 번져가는 울타리

키 큰 은행나무 얼굴이 노랗게 질려갑니다

막역한 백년성당과 교회의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바다를 나오는 말갛게 웃는 해님

밤새 수평선에 걸려 바다의 안부를 전해 주는

오징어 배 집어등의 수다와

금강산이 궁금한 울산바위의 꿈꾸는 얼굴도

펜트하우스가 어쩌구 프리미엄이 저쩌구,

흉흉하게 이웃들을 이간시키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삼켜버리는

악몽이 잦아진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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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강원도 고성군 도원2리



인기척 없는 마을 안길 연두 무늬를 두른 작은 버스 가로질러 간다

홀로 기사님의 손님은 텅 빈 밭고랑과 흩뿌려 놓은 거름들 짧은 한낮과 볼 차가운 바람

볕을 따라 어슬렁거리던 덩치 큰 고양이 몸을 둥글게 말아 혓바닥으로 쓸고 앉아 배경이 되자 마른 꽃 대궁들 한껏 당겨 앉는다

약을 타는 할매들 몇, 가끔 북적이는 보건소 마당도 침묵으로 가라앉아

반장님은 번듯한 서울 나리님들 연수원 청소 가셨다 하고

옆집 어머니 계절 내 누워서 뜨개질하는 딸내미 두고 찬거리라도 사러 나가셨나

속초댁 근황이 궁금한 귀먹은 앞집 할매 어디에서 응 응 바짝 귀를 붙이고 계신가

전봇대 두 그루 줄 받들어 까마귀 떼라도 기다리는 시간

마당귀 개 두 마리 짖는 법을 잊은 듯 배를 깔고 무심한데


새벽 차를 몰아 동네 내리막을 거슬러 지평을 물들이는 해를 찍은 일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해 떨어지기도 전인데


적막이 적막을 걷어내고

적막으로 적막을 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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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세스럽다






시집 먼지를 털다


묵정밭에 번진 가을 쑥 더미처럼


헛간에 등겨 부리듯 툭


나의 배후가 시가 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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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젊은 플룻 선생이 먹태*를 팔고 있어 주문을 넣으며

‘가을이 참 짧아요’ 인사를 건넸더니

‘그래도 아직 가을이라 좋아요’

음악처럼 건너온 답장

열여덟 볼연지 찍듯 몰래 부끄러웠으나

이제 막 설악을 걷고 있다는 단풍 소식에 불현듯 귀가 열리고

깎인 자리마다 그렁그렁 붉던 언덕, 몇 겁을 건너온 별빛인지 온통 반짝이는 구절초

낮은 지붕들 서로 껴안은 온기로 길러낸 골목, 뜨거운 수다 한 줄 없이

늙은 상추와 채 늙지 못해 푸르둥한 호박 한 덩이 함께 적요에 든 한낮


쪼그려 앉아 익은 민들레꽃 불어주는 손녀 오므린 입술 끝에서 날아가는 홀씨처럼

길 건너 원룸 세든 노부부 손 잡고 시장가며 건네는 인사처럼

겨울 항구 만선의 명태 돌아와 구만리 허공을 채우고도 남을 분주함처럼


좋아요좋아요 플룻 소리 햇살처럼 골고루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두드려 찢어 술안주로 많이 쓰는 말린 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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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천*이 묻는다



폭우에 떠밀려 온 버드나무 몸통에서

세상모르고 나온 이파리들

반쯤 잠긴 물의 길 푸르게 견디고 있다

수면 아래 날개의 길을 내었는지

피라미와 은어들 물살 거슬러 날아다니는데

징검다리 건너뛰다 금세 지쳐 널분널분 돌아 건너는


저 많은 생명들 젖 물려 흐르던 몸의 경계 안으로

야금야금 풀들 슬어 빗장 풀리자

포클레인 덤프차 달겨들어 허물고 찢어 쌓다가

급기야 억지 물길 하나 걸쳐 놓았는데

굽이치던 몸의 기억 얼마나 도려내야 욕되지 않을까


세상에 연장들 먼저 챙겨 멕이는 놈 치고

도적 떼 아닌 놈 없다더니만


물빛 고운 남대천이 제 몸을 헐어

장마당 천막들 흥청흥청 거둬 주면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터 귀퉁이 한 자락 떼어

삼동네 배고픈 딴따라들 불러 모아

금일봉이라도 쥐어 주며

뭇놀음 한 바탕 걸지게 풀어놓아

사는 일이 데면데면한

촌로들 몇 어깨춤을 추이게 하거나

한 끼 밥이 치욕인

젊은이 몇 장마당으로 불러낸다면


그만하면 괜찮은 도적 아니겠는가?


*양양 시내를 흐르는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