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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3월 가파도 외 9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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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48회 작성일 21-12-0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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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뫼'라는 소리만 들어도 벌써 그리워지네요.

속초에 못 간지가 벌써 2년?

다정한 문우들의 얼굴이 한 분 한 분 떠오릅니다.

저와 함께 한지도 벌써 10년이네요.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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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가파도



넓은 바다 위에

가오리 한 마리 떠 있다


어린 시절 앞마당에 피었던

노랗고 빨간 백일홍 꽃잎 같은

울긋불긋 지붕들 옹기종기 모여 있고

돌담에 붙은 소라 껍질들

못다 한 바다 이야기 나누느라 하루 해가 저문다


납작한 등허리에는

아직 덜 자란 보리 이파리들

반짝반짝 출렁이고

저 아래 뭉툭 솟은 엉덩짝에는

노란 유채꽃도 무리 지어 피어 있다


3월의 가파도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일렁이는 초록 물결에

내 등 언저리가 간질간질해진다


바람의 고향인가

쉴 새 없이 들고나는 크고 작은 바람 따라

어디론가 휭 떠나고 싶은 내 마음

살짝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머리에 쓴 스카프가 마구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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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달팽이



검은 줄을 동글동글 말아 등에 지고

길게 목을 빼어 조용히 풀을 먹는다


보이지도 않는 두 눈을 각 더듬이에 달고

커다란 지구 한 모퉁이에서

흔적도 없이 소리도 없이 살아간다


한 뼘 땅 차지하고 사는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워

그림자조차 없이 조용히 살다가

꽃 한 송이 새 옷 한 벌 없이

무로 돌아간 어떤 스님처럼


죄도 없는 그가 밝은 태양을 피해

어둡고 축축한 곳만 찾아서

우주선 같은 껍데기 속으로

자꾸만 자꾸만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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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작은 세상이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남의 시선을 도둑질하고 싶은 사람

누가 뭐라 하든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들고 있는 전화기에 영혼을 주어 버린 젊은이


가뜩이나 주름 많은 얼굴 잔뜩 찌푸리고

가난을 저주하며 땅속으로 꺼질 듯 앉아 있는 아주머니

돈 버느라 바빠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눈치코치 전당포에 맡겨 버린 아저씨


남아도는 시간 주체를 못 해

이것저것 참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영감 냄새 할아버지

손주들 챙기느라 우유병 손수건 주렁주렁 달린 유모차 꼭 붙잡고

삶의 끄트머리를 건너고 있는 할머니


탔다가 내리고 또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고

영화관 좌석의 주인이 바뀌듯이

지구의 주인도 그렇게 바뀌며

해가 지고 또 다른 시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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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어느 날 조용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나누어 준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

빚의 응어리들이 작은 동산을 이루고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기는커녕

우쭐거리기만 했던 교만의 찌꺼기가

그 동산 한 켠에 구정물로 흐른다


무심코 내뱉었던 크고 작은 거짓말들이

벌건 얼굴로 바위틈에 숨어 있고

누군가가 잘 되는 걸 배 아파하고

습관처럼 내려다보기를 즐겨했던

감추고 싶은 마음도

자랑과 칭찬에서 자유스럽지 못해

약수터 물줄기 같이 쫄쫄거리는 이해심도

저기 한쪽 어딘가 자리 잡고 있을 텐데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워서 어쩔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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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꾸러기



연보라색 나팔꽃이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주인 탓에

조그맣고 예쁜 얼굴 그만 놓쳐 버리는 나날


미안하다

뾰로통해져서 웃지도 않는 그 입술

서운함을 잔뜩 품고 있는 듯해

나는 자꾸만 그 옆을 맴돈다


야무지게 오므리고 있는

조그만 그 입을 바라보며

내일은 꼭 함께 웃어보자고

기다란 꼬투리에 손가락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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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전화로 손주 목소리를 들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그 아이를 불러온 걸까

통통한 볼 하얀 얼굴이

눈앞에서 웃고 있다


끈적끈적 손에 밀가루 묻혀가며

함께 수제비를 떼 넣던 일

할머니 주겠다고 새우 버거를 사 들고 와

계면쩍게 내밀던 그 녀석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 눈에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그 애가

나라를 지키는 어엿한 군인 아저씨란다

집에 남아 있는 빈자리보다

더 크고 소중한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거다


쑥쑥 자라던 키처럼 마음도

넓고 푸르른 하늘처럼 잘 자라서

세상 얼어붙은 구석구석 녹여 주는

한 그루 아름드리나무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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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팔십에


삶의 기쁨을 알았다

나이 팔십에

살아온 삶이 온전한 감사였음도 깨달았다


내가 어리석은 건가

본래 인간이 우매한 존재인 것인가


나이 팔십에

예배가 이렇게 소중한 것임도

찬송가 가사가 내 마음을

절절히 눈물 짓게 하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모세는 나이 팔십에

하나님 일에 몸 바쳤는데

내 연약한 심령은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 이웃을, 내 나라를,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마지막까지 기도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하고 아껴주며 살리라

정녕 그렇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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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태양



붉은 태양이

파란 물속에 몸을 담고 있다

여기저기 하얀 비누 거품 잔뜩 쌓아 놓고

지글지글 뜨거웠던 몸 식히고 있다


나뭇잎 풀잎마저 시들해진 한낮

햇빛 내리 쪼이는 마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송글 송글 땀이 맺히는 이 계절

태양은 제 몸이 녹아버릴까 봐

걱정되었을 것이다


밭에 엎드려 호미에 뚝뚝 비지땀 흘리고 있는 아낙들

열심히 그물 건져 올리는 그을린 얼굴 어부들

공원 벤치에 앉아 쉴 새 없이 부채질해 보지만

그래도 여전히 땀이 가시지 않는 할아버지들


태양은 안쓰러운 마음으로 내려다보며

잠시 쉬었을 뿐인데

저 멀리 산 위에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오는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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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열매라고



수수한 꽃이라고

본체만체하지 말고

못생긴 과일이라고

푸대접하지 말자


세상에 태어나

너는 얼마나 뛰어났었나

남들보다 얼마나 많이 세상을 사랑했었나


들에 피어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꽃이라도

모진 비바람 속에서 혼신을 다해 그 꽃 한 송이 만들었고

비뚤어지고 못생긴 열매라도

따가운 햇빛 견디며 죽을힘을 다해 영글었는데


미안한 생각이 든다면

남아 있는 삶이라도

미워는 말자

한 움큼이라도 더 사랑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