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51호2021년 [시] 키다리 민들레 외 9편 / 정명숙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529회 작성일 21-12-10 10:03

본문

시를 읽다가 시를 잃어버렸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깔깔대는 낱말들을 붙잡아

퍼즐을 맞춰봐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다 와르르 쏟아버린다

젊은 시를 소화하기엔 내가 너무 늙었나 보다


시를 읽다가 시를 잃어버리고

시를 쓰다가 길을 잃고 헤맨다

시의 숲에 깊이 들어갈수록 시가 보이지 않는다


------------------------------------------


키다리 민들레



바다 풍광 보려고 전망대 오르는 길

숲을 이루고 있는 대나무 사이를 비집고

고개 내민 노란 꽃


민들레다, 아니다

계단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며

울타리 위에 앉아 있다


빽빽이 들어선 대나무 속에서

너도 풀 나도 풀인데 같이 살아 보자고

이름도 잊은 채 대나무 따라 키를 키우다가

울타리 위에 지친 몸 내려놓고

넝쿨 식물인 양 앉아 있다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이면

어디든 뿌리내린다는 서양 민들레가

지친 몸 추스르며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휘청이는 걸음들 오가는 길목에서

다 흘러간다고, 함께 이겨 보자며

해맑게 웃고 있다


------------------------------------------


영혼의 무게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는데

영혼에 무게가 있다면

육체를 벗어 놓고 떠난 그 많은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스스로 삶을 접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

벗어나고 싶었던 삶의 끝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둠 짙게 내린 공원 산책길

여치 몇 마리 검은 숲을 버리고

불빛 따라 인도로 날아든다

가로등 빛이 천국의 길이라 믿은 걸까

잘못 든 길 찾아 주려고

손 내밀었더니 뒷다리 하나 떼어 주고

파드닥거리며 날아간다


여치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영혼의 무게는

생 너머 또 다른 생이 머무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숲을 버린 여치 한 마리

보도블록 위를 헤맨다


------------------------------------------


안개를 읽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두려움의 실체는 불안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은

걱정을 만들고

안개 속을 떠돌며 가지를 늘리다

감옥이 되었다


외줄을 타던 젖은 시간

떨어지고 오르기를 반복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드니

불안의 실상實像이 보이고


두려움을 딛고

한 발 한 발 나설 때

감옥 문 열어 주던 회색빛 안개


돌아보니

불안의 실체는 내가 만들어 낸

나의 그림자였다


------------------------------------------


한계限界



검은 새 한 마리 하늘을 난다

몸 안 가득 겨울바람을 싣고

아파트 숲을 거침없이 날아오른다


숲 너머 파란 구름 위까지

올라가 보라고, 오를 수 있다고

응원했는데


28층 벽에 갇힌

날개 없는 새

허공이 내어 준 내리막길을

비틀 짚으며

도로 위에 내려앉는다


여정을 함께했던 바람도

무심하게 제 길 가고

한때 새가 되어 날갯짓하던

검은 비닐봉지 하나,

푸른 꿈 가슴에 접은 채

바퀴에 감겨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


보따리 속에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천안에서 서울을 방문하는 보따리가 있다

외할머니보다 더 반갑고

외할머니 몸보다 더 큰 보따리


보따리 속 꾸러미를 풀면

여름내 땀 흘려 얻은 수확물들이

마법처럼 줄줄이 나왔다


보글보글 끓는 청국장

들기름 넣어 조물조물 무쳐낸 고소한 나물

새콤달콤한 겉절이에 간간한 장아찌….

외할머니가 보따리를 푸는 날은

두레상이 시끌벅적 잔칫상이 되었다


다섯 손주의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를

귀 대신 눈으로 듣던 외할머니,


가을이 끝나가는 주말 오후

정성들여 만든 밑반찬

아들 부부 손에 들려 보내며

기억 속 보따리를 푼다

땀과 사랑으로 꾸려진

꾸러미마다 담긴 외할머니 말씀을


------------------------------------------


삶의 여백餘白



종합운동장 트랙 밖을

할머니 두 분이

산책하듯 돌고 있다

휘어진 다리와 굽은 등을 배려한

속도와 보폭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이

초여름 저녁 바람을 거느리고

느린 걸음을 옮기고 있다


달려가는 젊음에게

안쪽 트랙을 내어 주고

지나온 삶이 만들어 준

여백의 구간을

명상하듯 천천히 돌고 있다


------------------------------------------


그리움은 흐르지 않는다



너였음, 너이기를 바라며 달려가면

의아해하는 표정의 낯선 청년이

나를 바라본다


기억 속 너는

아직도 푸른 잎 무성한 여름 나무

오늘 나는, 빛바랜 마른 낙엽


구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애틋한 기억도 지워지겠지

밀물 같은 그리움도 흘러가겠지


그러나 길을 가다 문득

곁 스쳐 가는 네 모습에 놀라

이름을 불러 본다


허공에 갇혀 메아리치는

너의 이름을


------------------------------------------


바라만 봅니다



아픔이 아픔을 안고 있네요

왜 하필 아픔이냐고

묻지 못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젖은 눈

출렁이는 연민이

서로의 상처를 다독입니다


아픔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나 아팠냐고

아픔이 도리질합니다

아픔의 크기는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


꽃병



비닐 포장지에 싸여

너를 찾아온

빨간 장미 한 다발


허덕이던 갈증을

가슴에 품고 목 축여 주는구나


줄기 끝 베인 상처

통증으로 고여 썩어 가는 시간

위안의 손길로 아픔 다독이며


시한부 생

길 떠나는 날까지

묵묵히 곁 지켜 주는

너는 아름다운 호스피스


------------------------------------------


외사랑



심지는 꼿꼿하여

불을 댕길 준비가 되어 있고

기름은 언제나 충분하다


되새김질하는 짐승처럼

습관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면

아른거리는 불꽃 속을

뛰어노는 낱말들


그을음에 시커메진

미완의 문장들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움도 연민도 아닌

질긴 끈 같은, 사랑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