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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베이다 외 8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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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58회 작성일 21-12-10 10:13

본문

가을 들판을 가득 채운 원고지 같았던 논


한 칸씩 비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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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



샘터로 가는 아침 산책길

물큰한 풀 비린내 깔려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풋풋하던 풀들이

누군가의 손길로 베어져 있다


잡초라는 이름으로

길섶에 나앉은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하여

날카로운 쇳소리의 비명을 묻었다


몇 날 그 몇 달의 생을 닫기까지

잎 잎에 새겨진 마지막 열정은

끝내 못 피운 붉은빛이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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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봄으로 피어나

치열했던 여름을 앓고 난 뒤

태풍에 시달리다 열매를 맺지 못한

그렇게 한 생을 살아가는 이파리들


누군가 살면서

아픈 삶이 없었을까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해

구름의 흐름을 모른 채

반백을 넘은 일흔의 문턱


똑같은 하루가 없었듯

내 속의 나를 숨기고

진액을 쏟아낸 후에야

허물로 드러나는

너로 하여 나는 따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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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유난히도 비가 잦았던 여름

여기저기 젖는다는 비보에

온몸이 비에 젖은 듯

고막에는 빗소리가 꽉 차서

언제 터지질 모르는 댐 같은데

코로나에 물난리까지

하루를 숙제하듯 사는 삶을 내려놓고 싶다


쥐고 갈 것보다

버리고 가야 할 것이 더 많은

어수선한 세상에

인생은 희망이 아니라

주어진 임무였음을 알기까지

그저 열심히 살아온

저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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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식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코로나 접촉자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다는 젖은 목소리

시장도 갈 수 없어

냉장고를 파먹고 산다는

그녀의 문자를 받는 순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트로 달려가 몇 가지 물품과

집에 있는 반찬을 챙겨서

문 앞에 두고 왔다

무슨 천형의 벌도 아닌데

얼굴 한번 못 보고 발길을 돌리는

기가 막힌 세상을 원망하며

사식 아닌 사식을 놔두고 돌아오는 길

빗물 같은 눈물이 발길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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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아래서



h 아파트 주차장 벚꽃 나무 아래

꽃잎을 잔뜩 뒤집어쓴 자동차들이

그림 같은 풍경이 되는

그 환한 꽃나무 앞에서


마침 지나다 들렸다는 지인이

사진 한 번 찍자며

소매를 잡아끄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이쁜 봄이 가고

또 다른 벚꽃이 필 때

오늘 같은 꽃은 또 다른 봄을 보면서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이 한순간을 그리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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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두기



겨우내 함박눈 한 번을

못 보고서 겨울을 보내고

코로나19로 세상은 소란하기만 하고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가는데


우수 경칩에 걸린 봄도

거리두기를 하는지

겨울에도 봄에도 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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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이 있는 풍경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쓰시며

몇 대를 거쳐 내려온 장독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가보처럼

모시고 다닌 나의 유물들이

베란다 한쪽을 개조해 만든

마루에 앉아 나이만큼의 위엄을 떨치고 있다

긴 날을 동거한 반려 식물

미처 이름 불러 주지 못하는 다육이들

철 따라 피고 지는 꽃 향과 숙성된 장맛이

어우러지는 베란다에서

새소리 빗소리 섞어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

요즘 이 맛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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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22



모진 한파 견디며

붉디붉은 그리움 피었다


한 잎 두 잎 잎새마다

문신을 새겨 두고


네 생각으로

온통 꽃 물드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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