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호2021년 [시] 베이다 외 8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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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판을 가득 채운 원고지 같았던 논
한 칸씩 비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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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
샘터로 가는 아침 산책길
물큰한 풀 비린내 깔려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풋풋하던 풀들이
누군가의 손길로 베어져 있다
잡초라는 이름으로
길섶에 나앉은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하여
날카로운 쇳소리의 비명을 묻었다
몇 날 그 몇 달의 생을 닫기까지
잎 잎에 새겨진 마지막 열정은
끝내 못 피운 붉은빛이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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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봄으로 피어나
치열했던 여름을 앓고 난 뒤
태풍에 시달리다 열매를 맺지 못한
그렇게 한 생을 살아가는 이파리들
누군가 살면서
아픈 삶이 없었을까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해
구름의 흐름을 모른 채
반백을 넘은 일흔의 문턱
똑같은 하루가 없었듯
내 속의 나를 숨기고
진액을 쏟아낸 후에야
허물로 드러나는
너로 하여 나는 따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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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유난히도 비가 잦았던 여름
여기저기 젖는다는 비보에
온몸이 비에 젖은 듯
고막에는 빗소리가 꽉 차서
언제 터지질 모르는 댐 같은데
코로나에 물난리까지
하루를 숙제하듯 사는 삶을 내려놓고 싶다
쥐고 갈 것보다
버리고 가야 할 것이 더 많은
어수선한 세상에
인생은 희망이 아니라
주어진 임무였음을 알기까지
그저 열심히 살아온
저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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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식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코로나 접촉자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다는 젖은 목소리
시장도 갈 수 없어
냉장고를 파먹고 산다는
그녀의 문자를 받는 순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트로 달려가 몇 가지 물품과
집에 있는 반찬을 챙겨서
문 앞에 두고 왔다
무슨 천형의 벌도 아닌데
얼굴 한번 못 보고 발길을 돌리는
기가 막힌 세상을 원망하며
사식 아닌 사식을 놔두고 돌아오는 길
빗물 같은 눈물이 발길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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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아래서
h 아파트 주차장 벚꽃 나무 아래
꽃잎을 잔뜩 뒤집어쓴 자동차들이
그림 같은 풍경이 되는
그 환한 꽃나무 앞에서
마침 지나다 들렸다는 지인이
사진 한 번 찍자며
소매를 잡아끄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이쁜 봄이 가고
또 다른 벚꽃이 필 때
오늘 같은 꽃은 또 다른 봄을 보면서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이 한순간을 그리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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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두기
겨우내 함박눈 한 번을
못 보고서 겨울을 보내고
코로나19로 세상은 소란하기만 하고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가는데
우수 경칩에 걸린 봄도
거리두기를 하는지
겨울에도 봄에도 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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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이 있는 풍경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쓰시며
몇 대를 거쳐 내려온 장독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가보처럼
모시고 다닌 나의 유물들이
베란다 한쪽을 개조해 만든
마루에 앉아 나이만큼의 위엄을 떨치고 있다
긴 날을 동거한 반려 식물
미처 이름 불러 주지 못하는 다육이들
철 따라 피고 지는 꽃 향과 숙성된 장맛이
어우러지는 베란다에서
새소리 빗소리 섞어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
요즘 이 맛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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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22
모진 한파 견디며
붉디붉은 그리움 피었다
한 잎 두 잎 잎새마다
문신을 새겨 두고
네 생각으로
온통 꽃 물드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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