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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환승의 이중 구조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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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14회 작성일 21-12-10 10:22

본문

새로울 것 없는 일상과

그 일상의 침전물들을

여과도 없이 날마다 옮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가을에,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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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의 이중 구조



이번 역은 소요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불빛 쪽 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안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익숙한 듯 올라타 자리를 잡는 열 시


거기는 임산부와 노약자 자리입니다

덜 익은 어둠이 주춤거리는 사이

만삭의 열한 시가 뒤뚱거리며 올라탄다


소요를 떠나보낸 고요역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열두 시가 사라지고

시간의 숲으로 울음도 없이 태어나는

또 다른 하루


오늘과 내일의 환승역에서

흘러내리는 피곤을 바닥에서 떼어 내며

길에게 끌려가는 시든 청춘들

다시 못 볼 것 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배웅하고

어둠이 반기는 골목을 오른다


공중 부양된 역사에서

형광색 불빛 하나 마중을 나오고

힘 얻은 바닥이 바닥을 밀며 다다른 곳

그곳은 어린 것의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등이 휜 아비의 하루가 펴지는

환승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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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봄이었을까



길가에 버려진 찔레꽃 가지

꺾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발바닥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오는 길 매웠으면 사는 길은 고와야지

손목 잡고 집으로 와 꽃병에 꽂는다


얼마가 지났을까

구겨 넣었던 봄이 꿈틀거리면서

시든 꽃잎 위로 살아나는 길


그렇게 꽃의 한 시절은 열렸다가 닫히고

아무렇지도 않게 꽃병을 비우려는 순간

깊디깊은 심연에서

살뜰히 죽어가는 곡진한 생의 뿌리


정작 그 봄은 누구의 것일까


찔레 가지는 찢긴 발로 꽃의 길을 만드는 동안

나는 그저 꽃만, 꽃의 낯만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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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속의 작은 길



낮은 곳에 드니 사방이 길이다


마음의 창 열어 놓고

등짐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 모두 길 아닌 게 없다


눈 닫고 귀 하나만 열어도

내 안 온통 무릉도원인데

빈손이 빈손을 밀어내던

수많은 날들


길 위에서 길 찾느라

반평생이 흘렀고

내 쪽으로 돌아 눕히느라

또 반생을 보냈다


나를 지우면 더 잘 보이는 길

굽이굽이 길지만

마침표가 없는 그곳은

내가 찍는 생의 부호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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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비



위층 사는 젊은 부부

우레로 휴일 한낮 단잠을 깨우더니

진자리 채 마르기도 전

두 손 잡고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염치없이 남의 잠 훔쳤거나 말거나

또각또각 무료를 깨우는 상쾌한 구두 소리


음식물 쓰레기봉투 치마 뒤로 물리고

그럼요, 그럼요 안녕하다 말다요


빤빤함이 예뻐 생긋 웃어줬다

부러움에 또 한 번 쌩쌩끗 웃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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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



야식을 먹었다

늦은 시간에 일을 시켜 화가 났는지

위벽을 슬슬 긁어대기 시작한다


젊을 때는 상처 꽃 여기저기 피워대도

누가 볼세라 꽃 진 자리 잎으로 덮어 주더니

툭하면 쓸 만한 기둥에 구멍을 내고

사통팔달 열린 길을 막으려 든다


막으면 뚫고 뚫으면 메우고

적당한 밀당이 일상이 된 집


나이를 먹으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며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자식 걱정인 어머니

깊은 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응집된 어제를 허무는 몸의 무례를

말없이 견디는 딸이 안타까웠는지


약봉지를 들고 거울 앞에 나타나

기우뚱거리는 집을 가만히 지켜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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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남의 문패 아래 산 적이 있다


온실에서 막 나와

바람만 스쳐도 휘청였던


제 터 잃고 남의 터에 몸 푼

그 맘 내 모를까


오면서 녹는 마음

그 또한 내 모를까


볕 한 올에도 눈물이 흐르던

더부살이 속내


말 안 해도 알지, 그 맘 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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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회귀



산책을 함께 나온 어린 조카

길에 버려진 종이컵을 줍더니

낙엽 몇 잎 걷어 내고 나무 아래 묻는다


종이컵의 엄마는 나무이니까

엄마와 함께 있게 해 줘야 된단다

그리고 이다음에

흙이 돼서 모두 만나는 거란다


서늘한 등줄기 위에다

어른의 어미를 태우고 집으로 오는 길


멀리 엄마가 보이자

등에서 내린 종이컵

달려가서 엄마의 두 팔에 안긴다, 아니

먼저 된 종이컵에

애기 나무 한 그루 쏘옥 담긴다


그 뒤로 오래된 미래 한 갈피

푸른 경적을 울리며 힘차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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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의 서사



식어가는 체온을 바람에 맡기며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한다


힘없는 것들이 힘 있는 것처럼

한꺼번에 떨어지고

우듬지에 서서 끝까지 버티겠다던 그에게

남은 힘을 모아 손을 흔들어 준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누군가 불러주는 참 예쁜 벚나무 잎이라는 말을

만장처럼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들면 죽는다는 소리를 유언처럼 건네며

나무의 울안을 서서히 벗어난다


입동을 지나며 모두 조급해졌는지

볕에 기대 스스로를 말리며

편히 갈 수 있도록 둥글게 마는 몸


어디선가 검은 바람이 달려와

해 진 쪽을 향하여 몸을 받아 눕히고

그 위로 어둠을 무덤처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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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무렵



사시사철 등이 아프다고 했다 단단히 휘어져 더 이상 펴질 것 같지 않은 무례한 마흔 길 여자는 손목에다 두 번의 금을 그었다 부적 같은 아랫도리 그 문이 그녀의 밥줄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귀에선 검은 물소리가 쉼 없이 났다 사각모를 쓰고 환하게 웃던 그녀의 스물셋 빛나고 탄탄하던 이력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조금씩 흐려지고 조금씩 더 낡아가는 마음 길에 앉아 그녀의 굽은 등이 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 후 불면의 새벽을 몇 해나 보냈을까 풍문도 그믐처럼 길이 휘었던지 사내들이 먹다 버린 뼈만 남은 한 여자의 부재 증명서를 받아 든 건 허공에도 내 등에도 그믐이 걸린 어느 눈 내리던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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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참



포도나무를 심어 놓고

포도가 익어가길 기다리던 첫해

말랑해지는 모습이 그저 신기해

따먹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는데

자고 일어나니 새들이 제 영역처럼

포도알에 콕콕 오목새김을 해놓았네


그 후 여름이면 포도나무 아래 서서

오는 새를 일처럼 쫓아내곤 했는데

어디선가 지켜보며

신 포도의 여우가 되었던 건 아닌지


서로를 잠시 믿었던 것인데

포도알 몇 개 그게 뭐라고

눈치 보며 눈치 주며 돌아보니 그렇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지 않아도 될 곳에 먼저 가 있는

산다는 게 참 그렇네, 내가 아직 그렇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