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호2021년 [시] 환승의 이중 구조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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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 없는 일상과
그 일상의 침전물들을
여과도 없이 날마다 옮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가을에,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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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의 이중 구조
이번 역은 소요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불빛 쪽 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안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익숙한 듯 올라타 자리를 잡는 열 시
거기는 임산부와 노약자 자리입니다
덜 익은 어둠이 주춤거리는 사이
만삭의 열한 시가 뒤뚱거리며 올라탄다
소요를 떠나보낸 고요역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열두 시가 사라지고
시간의 숲으로 울음도 없이 태어나는
또 다른 하루
오늘과 내일의 환승역에서
흘러내리는 피곤을 바닥에서 떼어 내며
길에게 끌려가는 시든 청춘들
다시 못 볼 것 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배웅하고
어둠이 반기는 골목을 오른다
공중 부양된 역사에서
형광색 불빛 하나 마중을 나오고
힘 얻은 바닥이 바닥을 밀며 다다른 곳
그곳은 어린 것의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등이 휜 아비의 하루가 펴지는
환승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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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봄이었을까
길가에 버려진 찔레꽃 가지
꺾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발바닥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오는 길 매웠으면 사는 길은 고와야지
손목 잡고 집으로 와 꽃병에 꽂는다
얼마가 지났을까
구겨 넣었던 봄이 꿈틀거리면서
시든 꽃잎 위로 살아나는 길
그렇게 꽃의 한 시절은 열렸다가 닫히고
아무렇지도 않게 꽃병을 비우려는 순간
깊디깊은 심연에서
살뜰히 죽어가는 곡진한 생의 뿌리
정작 그 봄은 누구의 것일까
찔레 가지는 찢긴 발로 꽃의 길을 만드는 동안
나는 그저 꽃만, 꽃의 낯만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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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속의 작은 길
낮은 곳에 드니 사방이 길이다
마음의 창 열어 놓고
등짐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 모두 길 아닌 게 없다
눈 닫고 귀 하나만 열어도
내 안 온통 무릉도원인데
빈손이 빈손을 밀어내던
수많은 날들
길 위에서 길 찾느라
반평생이 흘렀고
내 쪽으로 돌아 눕히느라
또 반생을 보냈다
나를 지우면 더 잘 보이는 길
굽이굽이 길지만
마침표가 없는 그곳은
내가 찍는 생의 부호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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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비
위층 사는 젊은 부부
우레로 휴일 한낮 단잠을 깨우더니
진자리 채 마르기도 전
두 손 잡고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염치없이 남의 잠 훔쳤거나 말거나
또각또각 무료를 깨우는 상쾌한 구두 소리
음식물 쓰레기봉투 치마 뒤로 물리고
그럼요, 그럼요 안녕하다 말다요
빤빤함이 예뻐 생긋 웃어줬다
부러움에 또 한 번 쌩쌩끗 웃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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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
야식을 먹었다
늦은 시간에 일을 시켜 화가 났는지
위벽을 슬슬 긁어대기 시작한다
젊을 때는 상처 꽃 여기저기 피워대도
누가 볼세라 꽃 진 자리 잎으로 덮어 주더니
툭하면 쓸 만한 기둥에 구멍을 내고
사통팔달 열린 길을 막으려 든다
막으면 뚫고 뚫으면 메우고
적당한 밀당이 일상이 된 집
나이를 먹으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며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자식 걱정인 어머니
깊은 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응집된 어제를 허무는 몸의 무례를
말없이 견디는 딸이 안타까웠는지
약봉지를 들고 거울 앞에 나타나
기우뚱거리는 집을 가만히 지켜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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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남의 문패 아래 산 적이 있다
온실에서 막 나와
바람만 스쳐도 휘청였던
제 터 잃고 남의 터에 몸 푼
그 맘 내 모를까
오면서 녹는 마음
그 또한 내 모를까
볕 한 올에도 눈물이 흐르던
더부살이 속내
말 안 해도 알지, 그 맘 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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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회귀
산책을 함께 나온 어린 조카
길에 버려진 종이컵을 줍더니
낙엽 몇 잎 걷어 내고 나무 아래 묻는다
종이컵의 엄마는 나무이니까
엄마와 함께 있게 해 줘야 된단다
그리고 이다음에
흙이 돼서 모두 만나는 거란다
서늘한 등줄기 위에다
어른의 어미를 태우고 집으로 오는 길
멀리 엄마가 보이자
등에서 내린 종이컵
달려가서 엄마의 두 팔에 안긴다, 아니
먼저 된 종이컵에
애기 나무 한 그루 쏘옥 담긴다
그 뒤로 오래된 미래 한 갈피
푸른 경적을 울리며 힘차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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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의 서사
식어가는 체온을 바람에 맡기며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한다
힘없는 것들이 힘 있는 것처럼
한꺼번에 떨어지고
우듬지에 서서 끝까지 버티겠다던 그에게
남은 힘을 모아 손을 흔들어 준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누군가 불러주는 참 예쁜 벚나무 잎이라는 말을
만장처럼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들면 죽는다는 소리를 유언처럼 건네며
나무의 울안을 서서히 벗어난다
입동을 지나며 모두 조급해졌는지
볕에 기대 스스로를 말리며
편히 갈 수 있도록 둥글게 마는 몸
어디선가 검은 바람이 달려와
해 진 쪽을 향하여 몸을 받아 눕히고
그 위로 어둠을 무덤처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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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무렵
사시사철 등이 아프다고 했다 단단히 휘어져 더 이상 펴질 것 같지 않은 무례한 마흔 길 여자는 손목에다 두 번의 금을 그었다 부적 같은 아랫도리 그 문이 그녀의 밥줄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귀에선 검은 물소리가 쉼 없이 났다 사각모를 쓰고 환하게 웃던 그녀의 스물셋 빛나고 탄탄하던 이력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조금씩 흐려지고 조금씩 더 낡아가는 마음 길에 앉아 그녀의 굽은 등이 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 후 불면의 새벽을 몇 해나 보냈을까 풍문도 그믐처럼 길이 휘었던지 사내들이 먹다 버린 뼈만 남은 한 여자의 부재 증명서를 받아 든 건 허공에도 내 등에도 그믐이 걸린 어느 눈 내리던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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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참
포도나무를 심어 놓고
포도가 익어가길 기다리던 첫해
말랑해지는 모습이 그저 신기해
따먹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는데
자고 일어나니 새들이 제 영역처럼
포도알에 콕콕 오목새김을 해놓았네
그 후 여름이면 포도나무 아래 서서
오는 새를 일처럼 쫓아내곤 했는데
어디선가 지켜보며
신 포도의 여우가 되었던 건 아닌지
서로를 잠시 믿었던 것인데
포도알 몇 개 그게 뭐라고
눈치 보며 눈치 주며 돌아보니 그렇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지 않아도 될 곳에 먼저 가 있는
산다는 게 참 그렇네, 내가 아직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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