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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거지들의 아름다운 대화 외 9편 / 장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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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73회 작성일 21-12-10 11:13

본문

흰머리는 염색으로 메꾸었으나

가슴에 난 구멍은 무엇으로 메꾸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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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들의 아름다운 대화



끼리끼리 논다고 할까

노총각 후배와 홀아비인 내가

한밤중에 말로 만리장성을 쌓는데

후배 하는 말

형! 땅 사둔 거 있어

아니면 산이라도

나는 자존심이 상하여

땅은 없지만 바다는 가지고 있어

집 앞 바다가 전부 내 꺼야

덧붙여서 알싸한 해삼도 있고

아름다운 해녀들도 있어 했더니

언변 좋은 노총위원장 후배도

기가 죽어 밤을 새워 해녀 생각만 하니

이 나라에선 땅 한 평도 마련하지 못했으면

거진데

혹여 파도 잠잠한 날이면

바다에도 투기꾼들이 몰려올까 걱정인데

아직까진 선보는 자리서 땅 가진 거 있으세요

묻지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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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개



친구네 가게에 앉아 있는데

개가 똥을 싸놓았다

냄새난다고 옆집 아줌마가

은근히 핀잔을 주신다


자유로운 건 가출한 개뿐이로구나

입었던 체크무늬 옷은

다 물어뜯어 산산조각 내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아스팔트와 흙길을 마음대로 누비며

배고프면 쓰레기 있는 곳에

눈을 번뜩거리다

한 사나흘 굶기도 하고

그래도 힘이 남으면

같은 신세인 떠돌이 암캐와

소비적 사랑을 나누고

아무 데나 변을 보는 그 개도

황금만은 좋아하는지

친구네 금은방 앞에다

굵직한 똥을 싸놓았구나

아니지 황금을 개똥같이 보라는

얘기일 거야


혹 그 개 詩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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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사회학



해당화 상회 뒷방에서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친다

탁탁 비 내리는 소리에

북어를 쫙쫙 찢고 소주를 마신다

간간이 들리는 소리

똥 밟고 지나가네


학생문구점 이층에서는

쌍심지를 세우고 내기 바둑이 한창이다

주인에게 개평 주고

남은 것이 없다고 툴툴거린다

하마터면 싸움 날 뻔했다


챔피언당구장에서는

다방 아가씨를 앉혀 놓고

낮달을 불러 내기 당구를 친다

다방 아가씨에게 밤에 나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낮달이 머쓱해져서 잠깐 실내가

컴컴해졌다


캐디에게 골프채를 받아든 골퍼들이

그린 위로 셧을 날리며

호사스런 뒤풀이를 예고한다

골퍼들은 어디서 젊은 여자들을 호출하더니

비버리힐즈 C.C를 떠났다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하는

하얀 백지를 수없이 찢으며

먹물을 찍찍 싸며

오징어를 씹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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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땅 땅


이것은 공사장에서

땀 흘리며 힘차게 망치로 못을 박는

소리가 아닙니다


혹은 의사당에서

정의로운 법을 만드느라고

밤새워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도 아닙니다


마른하늘에서 단비 쏟을려고

천둥 내리치는 소리도

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뭇 여심과 남심을 훔치는

신문 전면을 차지한

부동산 광고의

커다란 헤드라인입니다


땅 땅 땅

보도에 떨어진 만 원짜리 지폐에도

벌벌 떠는

당신의 가냘픈 가슴에다

계속 총질해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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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



국화꽃으로 장식한 목선 안에

곤히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

한평생 작은 배도 없이

어떻게 험난한 물길을 건넜는지

이제 자그마한 목선 한 척 놓았으니

은하수 건너는 일 한결 가벼우실까


사진은 이제 나이를 더 잡숫지 않는다고

더 이상 건너야 할 강도 없다고

허허로운 미소를 짓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자세히 보니 한쪽 어깨가 늘어져 있다

그 어깨로 얼마나 많은 세상의 짐들을 끌어올렸을까

남 앞에서 쓰러지지 않을려고 얼마나 애쓰셨을까


상복 입은 청초한 여자들

누르면 터질 것 같은 퉁퉁 부은 눈 속에

아버지와의 애잔한 기억이 스며 있어

꽈리방울처럼 확대된 동공 속을 들여다보면

잠 깬 아버지가 환하게 걸어 나오실 것 같다

슬픔에게는 조그만 사악함도 없다

그 안에는 날개가 있어

아버지 목선 타고 천국 가시는지

비바람도 한결 잠잠해진다

슬픔이 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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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창문을 여니

벌 한 마리가 들락날락한다

전부터 드나들던 벌이다

언제부턴가 정이 들었다

벌에게 잘 보일려고

연하게 화장을 했다

벌이 사정없이 공격해 온다

쏘일 것 같아 겁이 나면서도

벌이 안 보이면 궁금하다


나의 사랑도 이와 같으려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대 가시에 찔려

심장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그대 주위를 위성처럼

끊임없이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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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미용사



숲속에 나뭇잎들이 풍성해지자

때맞춰 훈풍이 새 떼들을 몰며 온다


가위도 없이 성글은 빗으로

구름처럼 풀어헤친 머릿결을

단정하게 빗어 내린다


한 컷 두 컷 몰려갔다 몰려오는 바람의 체위로

일찍 피어난 꽃들이 떨어지고

새 꽃잎들이 돋아난다

습기를 머금은 샛바람은

무표정한 목각 인형들을 촉촉이 젖게 한다


읍내까지 장 보러 온 시골 아주머니들의

수다가 피어나는 미용실

바람은 세상살이에 납작 눌렸던 흰머리들을

요즈음 유행하는 연초록 머릿결로

윤나도록 물들여 주었다


하늘거리는 나무들 풍욕할 순서가 되자

저마다 부끄럽다고 잎을 움츠린다

바람 미용사는

기꺼이 사랑의 가교가 되어 주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나무들은

꽃술을 활짝 열고 멀리 향기를 내뿜는다

이마를 슬쩍 들자 십 년은 젊어 보인다고

한바탕 웃음이 가득 찬다

시골 아주머니들 귀가길이 가볍다


일을 마치자 바람 미용사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후회 없이 스스로 제 날개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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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해탈이



속리산 중턱 냉천골 휴게소에서

밥을 얻어먹는

개 이름이 해탈이다

잡종견이고 못생겼고

홀로 살아서

자손도 못 퍼뜨렸다

무려 십여 성상을

개울물 흐르는 소리나 듣고

무아의 단풍 지는 나무들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니

그 이름 합당하다

드디어 득도의 경지에 이르니

알록달록 등산객들이

함께 사진 찍자 하니

지긋이 미소 지으며

포즈도 잘 취해 주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부대중의 말을 묵묵히 청취할 뿐

결코 짖는 법이 없다

하긴 산중에 개라고 다르겠느냐

다른 무엇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짖어야 하겠느냐

개도 마음을 비우는데

산객들이여 여기까지

속세의 마음을 끌고 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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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행복은 기다리지 않을 때 온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렇게 온다


먼 곳에 있는 친구가

손수 쓴 편지를 전해 주는

집배원처럼 그렇게 온다


그러니 상심해가는 마음을

흠뻑 두드려 맞는 북처럼

소리치지 말아라


행복은 고요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해서

실없는 웃음을 짓는

개울물 소리처럼 슬며시 오니


가을날 가지에서 툭 떨어지는

홍시처럼 오니

슬픔의 표정을 짓지 말고

잠잠히 기다림의 자세를

간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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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개업한 상점 앞에서

매미 날개 같은 치마를 입은

도우미 아가씨들이 춤을 춥니다

그녀들의 미소는 너무 자연스러워

슬픔의 눈동자를 완벽히 감추고 있습니다


주유소 옆 키다리 풍선 인형이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다

줄이 풀어져 하늘 높이 달아납니다

한참 올라가다 바람이 빠져

보도로 곤두박질칩니다

누군가 날개를 달아 줘야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천수만에 도착한 흑두루미들이

먹이를 찿아 고공낙하 합니다

이것은 쇼가 아닙니다

북쪽으로 비행하기 위해선

충분한 영양소가 저장되어야 합니다

화면 하단에는 건강식품 광고가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그것은 벌써 진부하여

빠르게 다음 화면으로 넘어갑니다

시청자들은 방부제 냄새 안 나는

산소 같은 화면을 원합니다

그렇다고 광고에 폭언을 해선 안 됩니다

사실 우리들도 새 떼들처럼 열을 맞추며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를 반복하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