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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실눈일 때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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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75회 작성일 21-12-10 13:35

본문

난감하다

나이 들수록 많아지는 말

말(言)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타우라스 고산 독수리 서식지를

돌을 물고 날아 넘는 두루미떼처럼

3년 동안 입에 돌을 물고 침묵을 배운

수도사 아가톤처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주머니 속 돌멩이 달아오르도록

입속인 양 만지작거린다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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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눈일 때



보이는 별도 다 세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별이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면서

천문학이 계산하지 못하고

인문, 철학이 증명하지 못하는

그저 내게서 가장 먼 별 하나


반짝이며 운행하며

너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는지


거리나 시간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말고

웃고 울고, 살고 죽고 하는 시시한 이야기도 말고


지금처럼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실눈일 때

설핏 보이다 마는

내게서 가장 먼 별이 다녀간 흔적


나도 너에게

그렇게 다녀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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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눈보라



연두 노랑 분홍분홍 하더니

간질간질 봄비가 내린다

찬바람 함께 어둑해지나 싶더니

그예 눈보라 저녁이 되었다

 

벚꽃 절정인 사월 초입

불빛 속으로

꽃잎 함께 날아오르는 눈발들


겨우내 참았던 웃음

막 시작한 봄의 노래들을

한 손이 내밀어 멈추었고

높이 든 한 손이

연미복 펄럭이며 현란하다


간주 음만 들려오는 오케스트라

밤새도록

지휘자의 뒷모습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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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경계



높이 걸린 창문턱 위에

작은 돌멩이 하나 올려놓았다

보인다

겹겹의 먼 산들과

숲을 지나는 바람

 

오래된 마을

커다란 나무와 낮은 지붕들

골목길 돌담 아래 돌멩이를 놓아두고

멀리서 바라본다

처음부터 함께 살아온 옛사람처럼

내가 그곳에 서 있다


높은 산 정상

광활한 풍경 위에 나를 세워 두고

먼 하늘

사선斜線의 각도에서

또 다른 시선視線으로 내려다본다


무한과 순간이 드나드는 관점의 경계

내 안의 나

나 밖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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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동그라미 두 개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

하얀  눈目 두 개뿐인 사람

 

온몸이 눈물인 사람이 있다

그칠 수 없는 울음

다 울고 나면 생을 다 하는 사람


그 눈물 닦아줄 수도

그 울음 멈추게 할 수도 없어


섰다가 앉았다가

이제는 쓰러져

혼자 임종을 지키는

젖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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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보다 그리운 고요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감옥이 있다

 

억울한 죄명

끌려다닌 치열의 역사는

끝내 변호하지 못하고

나는 갇혔다


무죄다  나는 무죄다

방향감각을 잃은 죄수가

귀를 막고 소리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달팽이 감옥


매미 떼가 목청을 잃으면

폭포가 멈추어 서면

울돌목이 모래밭이 된다면…

이 세상

시끄러운 소리의 차례가 다 지나면

출구가 있을까


자유보다 아름다운 고요를 돌아 나와

맨 먼저 내 울음소리를 듣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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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영혼을 위하여



밤 깊도록

불 당기고 바느질을 한다

여러 번 덧대어 붙인 낡은 옷

짓궂은 바람이 들추고 달아나는 것은

속살만이 아니라

메마른 영혼의 방

 

근엄한 미소의 낮이 지나면

조각조각 위선과 탐욕으로 가리고 덮은

겉옷 속

부끄러운 영혼의 남루와 마주하는 밤


대낮의 햇빛과 바람 속 유유히 걸어 돌아와

누추한 바느질 멈춘 겉옷을 벗고

아무도 깨우지 않는 깊은 평온에 들고 싶다


빛나는 영혼 지닐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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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입맞춤



안경 쓴  연인들은

안경을 벗고 입맞춤한다는데

마스크 시대를 사는 연인들

참 불편하겠다

 

사랑하는 일에야 무슨 대수냐

생각하다가도

웃음이 난다


백신 2차 접종도 마쳤고

집에서는 마스크를 벗으니

우리는 상관없지만


결혼한 지 오래되어

우리는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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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은



커다란 나무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바닷가 모래밭 위에

가다 멈춘 발자국이 있습니다

 

꽃 피고 지고 눈비 내리고

바람과 시간이 치열하게 몰아가는

어느 길 위에서

또는 언덕 위에서

누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생각하던 아이들이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 가는 세상에서

따뜻한 이야기와 노래

웃음소리가 자라 갑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떠밀려 가는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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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비둘기 사랑의 방식



옛적 결혼 선물로 받았던 하얀 공작비둘기 한 쌍

딱 두 개의 알을 낳고 부화 되면 둘이서 평생 부부가 되었다

어쩌다 하나밖에 부화 되지 못하여 혼자 된 비둘기들은 끝내 혼자 살았다

비 오는 날이면 긴 지붕 선 위에 앉아

둘씩 둘씩 부리 맞대며 서로 야단스럽게 깃을 빗어 주는데

짝 잃은 비둘기들 양쪽 맨 끝자리 한 마리씩 가슴에 부리를 묻은 채 고요했다 그 둘을 품에 안고 먼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날려 보내면

나란히 집 쪽으로 날아갔고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는 끝내 곁을 주지 않았고 늘 멀찍이서 그렇게 외롭게 살아갔다


멀리서도 그리움만으로도 서로 사랑은 증명이 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것이 그들 사랑의 방식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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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적 공식



나무 나이테는

바람의 속도를 꿈꾸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강물로 수심을 채워도

바다는 해변을 넘어서지 않는다


열 손가락이

제일 큰 숫자였던 아이는

자라면서 어른의 셈법에 감염되었고

땅따먹기 놀이에 중독되었다


골목마다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부르는 이름 따라

돌아가는 집


하나 둘 셋…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고


해바라기 옆에

민들레 피어나 웃고 있는 길 위로

다시

낯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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