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호2021년 [시] 실눈일 때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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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다
나이 들수록 많아지는 말
말(言)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타우라스 고산 독수리 서식지를
돌을 물고 날아 넘는 두루미떼처럼
3년 동안 입에 돌을 물고 침묵을 배운
수도사 아가톤처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주머니 속 돌멩이 달아오르도록
입속인 양 만지작거린다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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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눈일 때
보이는 별도 다 세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별이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면서
천문학이 계산하지 못하고
인문, 철학이 증명하지 못하는
그저 내게서 가장 먼 별 하나
반짝이며 운행하며
너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는지
거리나 시간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말고
웃고 울고, 살고 죽고 하는 시시한 이야기도 말고
지금처럼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실눈일 때
설핏 보이다 마는
내게서 가장 먼 별이 다녀간 흔적
나도 너에게
그렇게 다녀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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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눈보라
연두 노랑 분홍분홍 하더니
간질간질 봄비가 내린다
찬바람 함께 어둑해지나 싶더니
그예 눈보라 저녁이 되었다
벚꽃 절정인 사월 초입
불빛 속으로
꽃잎 함께 날아오르는 눈발들
겨우내 참았던 웃음
막 시작한 봄의 노래들을
한 손이 내밀어 멈추었고
높이 든 한 손이
연미복 펄럭이며 현란하다
간주 음만 들려오는 오케스트라
밤새도록
지휘자의 뒷모습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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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경계
높이 걸린 창문턱 위에
작은 돌멩이 하나 올려놓았다
보인다
겹겹의 먼 산들과
숲을 지나는 바람
오래된 마을
커다란 나무와 낮은 지붕들
골목길 돌담 아래 돌멩이를 놓아두고
멀리서 바라본다
처음부터 함께 살아온 옛사람처럼
내가 그곳에 서 있다
높은 산 정상
광활한 풍경 위에 나를 세워 두고
먼 하늘
사선斜線의 각도에서
또 다른 시선視線으로 내려다본다
무한과 순간이 드나드는 관점의 경계
내 안의 나
나 밖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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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동그라미 두 개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
하얀 눈目 두 개뿐인 사람
온몸이 눈물인 사람이 있다
그칠 수 없는 울음
다 울고 나면 생을 다 하는 사람
그 눈물 닦아줄 수도
그 울음 멈추게 할 수도 없어
섰다가 앉았다가
이제는 쓰러져
혼자 임종을 지키는
젖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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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보다 그리운 고요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감옥이 있다
억울한 죄명
끌려다닌 치열의 역사는
끝내 변호하지 못하고
나는 갇혔다
무죄다 나는 무죄다
방향감각을 잃은 죄수가
귀를 막고 소리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달팽이 감옥
매미 떼가 목청을 잃으면
폭포가 멈추어 서면
울돌목이 모래밭이 된다면…
이 세상
시끄러운 소리의 차례가 다 지나면
출구가 있을까
자유보다 아름다운 고요를 돌아 나와
나
맨 먼저 내 울음소리를 듣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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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영혼을 위하여
밤 깊도록
불 당기고 바느질을 한다
여러 번 덧대어 붙인 낡은 옷
짓궂은 바람이 들추고 달아나는 것은
속살만이 아니라
메마른 영혼의 방
근엄한 미소의 낮이 지나면
조각조각 위선과 탐욕으로 가리고 덮은
겉옷 속
부끄러운 영혼의 남루와 마주하는 밤
대낮의 햇빛과 바람 속 유유히 걸어 돌아와
누추한 바느질 멈춘 겉옷을 벗고
아무도 깨우지 않는 깊은 평온에 들고 싶다
빛나는 영혼 지닐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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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입맞춤
안경 쓴 연인들은
안경을 벗고 입맞춤한다는데
마스크 시대를 사는 연인들
참 불편하겠다
사랑하는 일에야 무슨 대수냐
생각하다가도
웃음이 난다
백신 2차 접종도 마쳤고
집에서는 마스크를 벗으니
우리는 상관없지만
결혼한 지 오래되어
우리는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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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은
커다란 나무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바닷가 모래밭 위에
가다 멈춘 발자국이 있습니다
꽃 피고 지고 눈비 내리고
바람과 시간이 치열하게 몰아가는
어느 길 위에서
또는 언덕 위에서
누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생각하던 아이들이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 가는 세상에서
따뜻한 이야기와 노래
웃음소리가 자라 갑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떠밀려 가는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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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비둘기 사랑의 방식
옛적 결혼 선물로 받았던 하얀 공작비둘기 한 쌍
딱 두 개의 알을 낳고 부화 되면 둘이서 평생 부부가 되었다
어쩌다 하나밖에 부화 되지 못하여 혼자 된 비둘기들은 끝내 혼자 살았다
비 오는 날이면 긴 지붕 선 위에 앉아
둘씩 둘씩 부리 맞대며 서로 야단스럽게 깃을 빗어 주는데
짝 잃은 비둘기들 양쪽 맨 끝자리 한 마리씩 가슴에 부리를 묻은 채 고요했다 그 둘을 품에 안고 먼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날려 보내면
나란히 집 쪽으로 날아갔고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는 끝내 곁을 주지 않았고 늘 멀찍이서 그렇게 외롭게 살아갔다
멀리서도 그리움만으로도 서로 사랑은 증명이 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것이 그들 사랑의 방식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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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적 공식
나무 나이테는
바람의 속도를 꿈꾸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강물로 수심을 채워도
바다는 해변을 넘어서지 않는다
열 손가락이
제일 큰 숫자였던 아이는
자라면서 어른의 셈법에 감염되었고
땅따먹기 놀이에 중독되었다
골목마다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부르는 이름 따라
돌아가는 집
하나 둘 셋…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고
해바라기 옆에
민들레 피어나 웃고 있는 길 위로
다시
낯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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