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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해우소 외 9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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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759회 작성일 21-12-14 10:17

본문

풀을 뽑다, 강아지 똥을 치우다,...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이 늘 내게 말을 걸어오는 걸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올 한 해, 비로소 그들의 말에 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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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어지러운 마음에

산사에 올랐다


믿음 없는 발걸음 탓에

배탈이 났나 보다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삼킨 것들이 너무 많아


버리고

비우고

쏟아도

쉽게 가벼워지지 않는

무지근한 뒤끝


떨어지는 높이만큼

더 무거워지는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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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장롱



들어 올려야

이가 맞고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를 내야만

열리는 문


마분지 몇 조각

구겨 넣어야

오른쪽 왼쪽

가까스로 수평이 되는


손대지 않아도

스르르 절로 열리는


색이 바랜

오래된 장롱


그 속에

구겨진 옷가지처럼

널부러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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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층



작은 먼지 한 움큼

고운 진흙 한 줌


부스러진 자갈 몇 개

불쑥 끼어든 돌멩이 서너 개


바람에 날려가다 떨어진 나뭇잎 몇 장

날아가다 숨 떨어진 곤충 한 마리


그렇게 머리 맞대고

가슴 부대끼며

누르고 눌리면서


한 오십만 년 쯤 뒤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


우리가 사는 이유

그렇게 지층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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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를 기다리며



인생

한방이라는데


아파트는 너무 비싸서

주식은 잘 몰라서

비트코인은 더 낯설어서


저물어 가는 저녁 길

기댈 곳은

로또 한 방 뿐


금요일마다

성지 순례하듯

로또 명당을 찾아

주週 기도문을 올린다


자동! 두 장 주세요


하루 쯤

헛된 꿈에 취해 살아도

신이 용서해 줄 것 같은 나이라는


똥배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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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



삭아 내린 장승이

지켜 주던

느티나무 넓은 그늘 아래


페인트 칠 벗겨져 가는

오래된 구멍가게 처마 아래


엉덩이 한 뼘

들이밀 수 있으면

누구나 쉽게 걸터앉는 곳


허름하고 오래된

그런

평평한 상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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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찌지직 탁!


전자 파리채를 휘두르며

하루가 전부인 그의 생을

쇼크사로 조기 마감시켰다


하루를 살다

간다고

불쌍하다 말하지 말자


나의 한 갑자는

그들의 하루만큼 뜨거웠는지


저물어 가는 저녁

그들의 소신공양으로


밤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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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판



대형마트 수족관에 꼬물대는 낙지를 보았어

유리 벽에 붙은 낙지의 빨판을 보다

조금은 더 큰 오징어의 빨판을 떠올리고

좀체 떨어지지 않는 문어의 빨판과

심해에 사는 대왕오징어의 거대 빨판을 거쳐

마침내 귀신고래에 붙은 빨판상어의 흡반에 이르렀어


그 모든 빨판들이

내 핏줄 곳곳에 달라붙어

쪽쪽 피를 빠는 환상이

마트 광고판에 홀로그램으로 떴어


쥐뿔 서민의 피로 배를 채운 그들이

벌렁 자빠지자

붉은 뱃가죽에 글자들이 선명했어


거 · 대 · 기 · 업


그렇게 피를 빨리고도

이튿날이면

우린 또 장바구니를 들고

빨판이 가득한

진열대 사이를 헤매고 다녀

편안함–다양함–익숙함이라는

단어에 중독되어


과대포장 물건 사이를 돌며

전자 광고판에

보이지 않는 반성문 한 줄 썼어


나는 누구에게 빨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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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페이스



38 광땡이 아닌

그저 한 끗, 따라지다


이기기 위한 포석이 아니라

버리는 돌

바둑판의 사석이다


늘 지기만 하는

운발 없는 삶이 지겨워


오늘은

블러핑이다


기를 쓰고

포커페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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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뽑으며



비 개인 아침

콘크리트로 덮인 마당가

풀을 뽑는다


물렁해진 흙의 힘에

넓게 퍼진 수염뿌리는 쉬 뽑히는데

척박한 곳에 내린 곧은 뿌리는

몇 번의 호미질과

온몸으로 당겨도

결코 뿌리 끝을 내주지 않는다


담벼락 틈새

끝내 끝을 보여 주지 않는

엉겅퀴 뿌리를 보며

그를 떠올린다


자갈밭 같은 세상에서

꼿꼿이 내린 그의 곧은 뿌리를 위해

수염뿌리 같은 세상을 살아온 값으로

오늘,

술 한 잔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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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더운 여름

오일장에 감자 팔러 갔던

어머니

땀 뻘뻘 흘리며 들어서

펌프 물 한 바가지 들이키고

어! 시원타~

기척을 내도


낮술 한잔 걸치고

그늘 밑 평상에 늘어진 아버지도

바닷바람 솔솔 들어오는

대청마루에서

낮잠에 빠진 삼 형제도

일어날 줄 모르고

마루 밑 그늘에서 잠자던

똥개 백구만 달려가

꼬리 친다


설악산 곰탱이 같은 영감태기나

물치천 뚝버구 같은 자식새끼들보다

백구 니가 그 중 젤 낫다

들으란 듯 내뱉은 엄마의 푸념이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란 욕이란 걸 깨닫는데

오십 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