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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방호복 외 9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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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702회 작성일 21-12-1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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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도 모양도 없는 인류의 적(敵) 코로나와 전쟁을 치루고 있다. 승부가 없다. 흰 방호복에 갇혀 수비대들 물집 잡힌 손으로 이 순간도 생명줄을 당기며 강적을 지키고 있다. 땀방울이 진주가 된다. 코로나 종식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양양 선사유적지에 가면 원시인들 표정과 몸짓에서 고향회귀故鄕回歸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빗살무늬 토기를 휘감은 오산리 갈대밭 바람결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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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복



몸이 흰 옷에 갇혔다

얼굴 없는 적과

싸우기 위한 전투복이다


밤낮을 떠도는 코로나19

유령 같은 적을 전멸하기 위한

흰 로봇 수비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물집 잡힌 손으로

생명줄을 뜨겁게 당기면

이마 위 땀방울은 진주가 된다


팽팽한 강적을 지키기 위한

방호복 차림의 우주인

오늘도 흰 성城에 갇혀

수천의 날개로 비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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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冥府殿 꽃살문



죽음과 삶의 경계에 피어난

아름다운 나무꽃


초파일 명부전에 영가등 단다

지장보살님께 삼천 배 올리면

꽃문살마다 연둣빛 싹이 올라와

모란꽃 붉게 흔들리며 피어나고

만개한 국화꽃에 벌이 날아드는 날


반야선 타고 떠나신 아버지와 할머니

저승길 돌아돌아 삼베옷 벗어 두고

버선발로 나에게로 다시 오실까


신흥사 명부전 꽃살문 활짝 벙글어

향기 가득한 그날이 오면

캄캄한 공空의 세계


하늘빛 물길 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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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관세음보살은

고요에 들었는데

바위에 제 몸 때리며

천수경을 독송하는 파도

홍련암 법당 마루 밑

천 길 고뇌가 불길로 솟고

나를 만나러 왔는데 내가 없다

귀 밖에서 맴도는 파도 소리


화엄성중

화엄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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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귀



중국 여행지에서

당나귀 귀 요리를 먹었다


갈대밭에서 이발사가 외치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

그 요리를 먹을 수 없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절대 소문내지마 비밀이야’

쫀득한 남의 비밀을 귓속말로 해줄 때

내 귀는 즐거웠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말의 유혹들

그래서 당나귀 귀 요리가 더 맛있었던 것일까

혼자만 아는 비밀 때문에 가끔

허공을 향해 이발사처럼

나는 소리치기도 한다


문득, 당나귀 귀 요리를 생각하다가

차마고도 절벽 고갯길

짐 실은 당나귀 귀가 펄럭이던 모습이

실루엣으로 스치고

방울 소리 쩔렁쩔렁 내 귀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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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낚아채이다



돌창을 들고 있는 원시의 남자와

물고기를 손에 든 아들이

나를 보고 손 흔든다


활활 장작불에

물고기와 멧돼지 굽기에 골몰한

가슴이 드러난 그의 아낙을

스마트 폰으로 찍고 또 찍었더니


순간, 허벅지 근육이 탄탄한 원시의 남자가

빛보다 빠른 몸짓으로 달려와

잽싸게 내 손의 스마트폰을 낚아채며

갈대밭 쪽으로 몸을 날린다


원시 문화와 신문명이 번개 스치듯

쟁그랑 충돌한 자리에

오래된 바람은 타임머신을 돌리며

어지럼증을 앓고


움막을 지나 선사유적지를 벗어날 때 쯤

안내원이 달려 나와

내 손에 스마트폰을 꼭 쥐어 주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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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壁들의 아우성



아파트 위층이 리모델링하는지

벽들이 웅얼거리며 반란한다

벽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과 그림들이

고요를 거부하듯 함께 아우성친다

귀를 파고드는 금속성 드릴 소리

벽의 심장을 뚫는 비명 소리

시멘트 부스러기에 어깨를 파묻고

완강하게 버티던 벽이 무너진다

집이 흔들리고 내가 흔들린다

십수 년 견고하던 자존심이

해체될 때 오는 절박감

돌아갈 수 없는 먼 미로 같은

형상形象이 있다가 사라지는 공허함

내 안의 성城이 아우성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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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울음



납작한 돌멩이에 엉켜 있는

지렁이 두 마리

영랑호 습지 갈대밭 사이를 온몸으로

밀고 올라와 탈진되었다


종족 보존을 위해 짝짓기하던 몸

태양과 눈 맞추며 달구어진 돌멩이에서

울음 토하며 사투를 벌이다가

죽어간 지렁이


흰나비가 허공을 선회하고

민들레 홀씨가 허리 굽혀 조문한 뒤

죽고 사는 일을 어루만지듯

지렁이 운구를 끌고가는 개미들

마타리 꽃 숲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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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떠나고 있다



꽃잎마다

매미 울음이 매달려 있다

배롱나무 가지마다

연분홍 낙관 찍어 놓고

미시령을 넘어가고 있는


붉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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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



쓰레기장과 주차장을 배회하던 고양이

승용차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

쏜살같이 도망간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집요하게 나를 쫓아오던

흑진주 같은 애원의 눈망울을

못 본 척했다


언제부터인가 고양이가 사라졌다

이빨 빠진 밥그릇과

못 본 척했던 내 정情 하나가

세찬 바람에 뒹굴고 있다


한때,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 사람 눈빛을

싸늘히 멀리한 적이 있다

이젠 손닿을 수 없는 깊고 먼 시간 속

황량한 바람만 분다


자꾸만

고양이 울음이 환청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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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



마디들이 대나무를 키운다

우후죽순 매듭에서 자란

가지와 잎들

대숲을 푸르게 흔든다


몸속 대나무 줄기를 키워 낸 생장점들


숱한 날 잠 못 이루고 웅성거리던

내 안의 축軸들, 마디마다 욱신거린다

진액을 끌어올려 키워 낸

생장점들이 나를 흔든다


대나무처럼 올곧기 위해

삶의 매순간마다 나를 채찍질해 온

모성母性이라는 마디와 시詩라는 마디

그 단단한 매듭들이 생을 끌어올린다


내 안의 물관부와 푸른 잎들

나를 키워 온 마디 앞에 엎드려 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