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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고요 일기 18 외 9편 / 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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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12회 작성일 21-12-14 14:49

본문

일상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순간

나는 그것을 고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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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18



봄이다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 앉을 시간이다

눈 그늘에서 내려온 갓 덥혀진

탱글탱글한 바람도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온몸을 슬쩍 흔들어 볼 시간이다

거꾸로 매달려

뒤집어진 세상을 바로 볼 시간이다

그러다

안에 감추었던 해묵은 서운함이 떨어져

조그마한 풀싹 위에 꽃처럼 해바라기할 시간이다


가벼이 날리는 향기에 엄지발가락을 걸고

제자리 찾아갈 시간이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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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19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감정밭을 걸었다

네 탓이 무성한 풀밭을

발밑에 뾰족뾰족 솟아 있는 너를 밟으며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그 사이 벌어진 길을 따라

그래 옳지 내가 옳지

그래 옳지 네가 옳지

누가 옳은지도 모를

옳지밭도 걸었다

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더 걷다간 옳고 그름도 없어지고

다름만 남겠다


살다 보면 그러고 싶듯이

오늘만이라도 철저히 내 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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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22



봄비가 띄엄띄엄 내리는 날

큰 바위 위에 꼿꼿이 봄길을 바라보는

왜가리 한 마리

울컥, 왜가리가 날던 광산벌판이 떠올라

따뜻했던 외로움이

날아와 앉도록 무릎을 세운다

모든 순간이 흘러 이만큼 오기는 했으나

아무렇게나 던져진 말들이

꼬리를 잡고

꼬리와 꼬리 사이에 또 꼬리가 있는지

내 목은 언제나 무거운데

왜가리 가슴 속엔 어떤 노래가 곰삭고 있기에

바라보는 저 시선에 설레일까

그이는 늘 나를 새가슴이라 했다


끈끈하게 울리는 노래를 타고

왜가리

새가슴으로 날아온다

꼬리 끝에 새하얀 다리를 곧게 뻗어

당당히 내릴 큰 바위를 그리며

날아온다 자꾸만 온다

나는 새가슴이 좋다

단단히 익은 노래를 부르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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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23



어쩔 수 없이 봄이다


흙인가 싶어 밟으려 하다 보면

뾰죽한 싹에

비껴 딛으려다 보면 또 새싹

길 밑엔 봄들로 가득해

날아다녀야 하는데

햇살 바람에

흰 머리카락 날려 주면

연둣빛으로 물들까


이 봄

발자국 뚫고

필생의 싹으로 거듭나고 싶어


어쩔 수 없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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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27



다 쏟아내고야 말 테다

장기 여기저기 쑤셔 박아 논

버릴 말들 샅샅이 찾아내어

크리스실바가, 닉 젠트리가

쓰레기로 세상에 하나 뿐인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듯

곪아 터지기 직전의 말들로

시를 만들어 낼 테다


그러기 전에

발굴하듯 솔질해야 할 텐데

부서지면 그 가치가 같이 무너지거든

바로 서야 하는 이유가 무너질지도 몰라

그래도 곰삭아야 시가 될 텐데

이를 어쩐다, 어쩐다


에잇, 도로 덮어

시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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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28



꽃이 열매로 보인 날

맹장 자리도 아물어갔다

내 것 하나 떨어져 나갔는데

멀쩡히 막국수를 먹고

햇살에 팔을 내밀었다

툭툭 불거지는 푸른 핏줄기 따라

봄이 핀다


따끈따꼼 부풀어 터지는 충수에

물물물 좀 주세요

한거풀 일어나는 입술꽃

미음 한 숟가락의 감사에

울음 송이들이 앞다투어 피어난다

함빡 자고 나니

세상이 온통 꽃 열매라

이런 정도에 깨달음이라면

아픔도 감사다


꽃들이 열매로 보이던 날

충수 자리에선 새로운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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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29



기운이 없어

맛있는 거 먹어요

그럼 힘이 날까?


점심點心을 나누니

맛있어서라기보다

마음으로 솟은 기운을 딛고

봄비에 젖은 공기를 바라보는데

온몸에 푸른 기가 솟아

한 초록 이룬다


누구에겐가

싱그러운 잎이 되어 준 적이 있던가

나무의 불만을 들은 바 없기에

한 자리에 평생 살면서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하늘을 한 조각씩 나누어 주는 그들보다

낮게 살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어쩌다 한 번쯤은

푸른 하늘을 안겨 주는 일일 거다


따뜻한 마음 한 점이

잠시 나무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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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0



그가

어머니는 눈물이라 한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아들이

어머니를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어스름한 나뭇가지에 걸린 별이다

하늘 높이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기에


백두 살의 어머니를 가진 나는

백두산 같이 비빌 큰 언덕이 있어서

아직 그 슬픔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덜 꺾이는 울음소리

들을 수 없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이 아름다운 건

나뭇가지가 흘리는 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뉘우침과 그리움

함께 못다 한 일상이 스며든

누군가의 눈물이기에

내 눈물이 될 것이기에


울지 말자

어머니는 자식의 눈물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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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2



이제는 사랑을 파 볼 때다

그 뿌리에 달려 있던 눈물 줄기들이

속으로 노래하던 것들을

검버섯 드믄드믄한, 반지가 따로 노는 손으로

후드득 뜯어 가을 햇살에 비춰 볼 때다

실핏줄 뜯어지던 아픔이

고스란히 잎맥으로 남아 길을 내고 있다

이만큼 살아온 길을


이별 만남 행복 상처 반복에서

이별로 눈물의 따뜻함을 깨닫고

사랑으로 아프게 고개 숙이기도 하지만

죽음이 축복인 것처럼

사랑을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사랑을 드러내 말해 볼 때다

내겐 무엇이었는지

무어라 정의할 수 있는지


…그러나


살아 있다면

사랑은 진행형이다

바란다면 아름다운 길 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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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3



지금 무엇으로 제일 아픈가

역을 지날 때마다

긴 기차를 꾸준히 털어 내어

빈칸만 덜컹거릴 텐데

해마다 늘어나 이제 예순세 칸을 달고 달린다


한때는

만화책과 과자를 가득 싣고 싶었고

따뜻한 남자를 태우고 소피아 로렌을 이야기하며

해바라기 가득한 들을 달리고 싶었다

커피 향 가득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피아노를 가득 싣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달리면서

쾌쾌한 돈 냄새라도 한 칸 그득하길 바라며

시를 풍성히 싣고

메마른 대지에 촉촉이 뿌려

세상 풀들의 환호를 바라기도 했다


예순 칸이 넘으니

제대로 된 부드러운 비누 향기칸과

들어가 앉으면 바로 평화인 칸

일상의 감사칸

뭐 이런 칸을 꿈꾸는데

무게가 나가는 칸이 달아질 때마다

아픔이 크다는 걸


긴,

고요 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