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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집 45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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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699회 작성일 21-12-1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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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집에서 시를 쓰며, 책을 읽고 미래의 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배롱나무, 홍단풍으로 화사해질 그 집 정원. 지금까지 살아온 집, 만나온 집, 인연을 나눈 사람들이 이 시들을 쓰게 했다. 새들 지저귐으로도 환해진 집을 그리며, 특히 노을이 아름다운 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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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5



하루를 다녀오느라 허허로워진 마음 나누며

마주 보고 앉아 연근 조림을 먹는 저녁

그 많은 허공을 가진 걸 보니 너도 울었구나

이런 간격을 가지느라 어지간히도 진펄이었구나

가만히 스친 손등 까실해서

겨우 떠먹고 있는 저녁밥

그 마음 알기나 하는지

좀체 그칠 기미 없는 장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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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6



모든 집들은 말을 한다


왜 이리도 멀리 돌아왔는지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묻고 말하고 싶지만

집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막막하게 걸어온 길 내려놓고

뒤란 밤나무 아래 서서

나무의 말부터 들어보라고


객지에서도 들렸던 말

불 끄고 그만 자거라


불 꺼진 창과 빈방의 적막을 견디며

이따금 혼잣말 하면서

기다려 온 시간들

이젠 길고 긴 집의 말을 들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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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7



이 집엔 무슨 우여곡절이 있었던 걸까

무성한 소문이 바랭이로 들어차고

가끔 살림살이가 궁금한 바람이 문 여닫는데

담쟁이넝쿨옷 입고 하안거에 들어간

낡을 대로 낡아가는 집


마당 구석 명아주의 넋두리 듣고 있는

구름 한 점

달리 아무것도 기록할 것 없다며

거미줄들 늘어갈 뿐이지만

밤이면 방 한 칸, 부엌 한 칸

달빛 가득 들어차는 집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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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8



이 집은 북향집입니다

영하의 겨울 어느 날을 떠올리며

온몸에 서리 내려앉은 듯 시려올 테지만

햇살 플러그를 꽂고 싶어지는 날

당신 얼굴이 문득 생각나

한낮에도 등을 켜고

설렘을 주소로 적은 후

여기에 시를 쓰지요

추위 가득 들어찬 그 집에선

서로를 안으로 들여놓으며

새로 생긴 별들과 가스구름이 함께 만든

깃털 구름 모양 장미성운 얘길하다가

작은 창으로 뒤늦게 간신히 깃든 빛줄기를

시 행간에 담아 낭독하고

구름 한 잎, 한 잎 정독하는 배롱나무,

정원 가득 홍단풍이 머금은 온기라든가

마음까지 온전히 스며드는 저녁노을을

필사하는 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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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9



상처를 안으로 쟁여 넣고

낭떠러지에 간신히 뿌리내린 소나무와

입 다문 적 없는 폭포를 앞에 두고

뒤로 문을 낸 이팝나무 울타리 집

빨강 우편함 속으로 들락거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 기척으로

이팝나무 꽃향기 일렁이고


디딜 마음 비좁아도 뻗어나간 시간들

벼랑으로 쏟아 낸 그 많은 말들

애면글면 살아가던 어느 날

시나브로 나를 부려 놓는 순간

딸깍, 캄캄절벽이 켜지고

지나간 것은 더러 놓치며

새들 지저귐만으로도 환해질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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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0



한 나무를 보았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수많은 작은 새들 둥지 달고 있는

파닥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집

고단한 새 눈 번쩍 뜨게 하는 일렁임

웅크린 채 표정이 심상치 않은 새들

가만가만 다독이고 있는 나무

바스락거리다 다시 졸고 있는

새의 어룽진 얼굴

흔들리며 흔들리며

움켜쥔 걸 내려놓고 들여다보는

저녁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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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1



집이라고는 낙엽 몇 장인

벌레들의 한겨울

진눈깨비 내리는 날

집의 안쪽으로 옮기고 옮겨

반질거리는 나뭇잎


몸의 상처 싸안느라

나뭇잎 뒷면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시간들

눈보라 들이치는 날

제 온기로 바닥을 데우며

간신히 봄을 기다리는 창 없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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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2



지붕도

문도

벽도 없이

간신히 집이었음을 알려주는

몇 개의 밥그릇 조각들

가슴 벅찬 공허로 발굴된

이따금 근처에서 속삭임 들려올 듯도 한데

바람과 햇빛만 다녀가고

흙먼지 뒤엉켜 단단해가는 바닥


바닥이 하늘 올려다보는

이토록 크나큰 허공을 가진 집이라니

거대한 천장에 떠 있는 구름 읽다가

뜨겁게 달구며 살다 간 시간들 더듬다가

하도 여러 겹이라 맥락조차 잊어버리고

적멸에 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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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3

코뿔새가 나무꼭대기에 집을 짓듯

내 영혼의 꼭대기에 다락을 얹는다


흙벽을 깎아 집을 지었던 흔적 위로

저를 포개는 바람

딴전 피우며 살아온 시간을 깨우는


밤이 깊도록 눅눅한 쪽을 향해

뒤꿈치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동안

생각의 틈새로 새벽이 오고 있는지

볕뉘 사이로 눈부신 잎들이 피어나는데

그 순간 할 일이라곤

오래 한곳에 박혀 있던 것 들어내고

우묵하게 고인 걸

우두커니 들여다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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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4



이미 와 있는 봄 헛기침에

꽃샘추위가 슬며시 파고든다


석 달 열흘 앓고 난 후

출근하는 길


실컷 부려 먹다가 다쳐서 돌아올 때마다

무던히 받아준 집에 기대어

살만한 오늘

세상은 봄 천지


자고 나면 언제나

하루 더 쉬나 궁리했는데


집에 있으니

늘 밖으로 나갈 생각 뿐


나무 끝 꽃눈이 발그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