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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그 겨울 상사화 외 9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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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751회 작성일 21-12-1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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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을 둘러싼 안전성 논의가 분분하던 4월 말에 잔여백신을 맞으며 올 여름방학 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리라 야심 찬 계획을 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봄에 전자책 작은 시집을 내고 가을에 다시 종이 시집을 묶어 내게 돼니 감개부량합니다. 다양한 문화사업 공모에 도전해서 한가할 틈이 없었던 와중에도 지리산 청학동과 화개장터, 남해 독일마을 등을 둘러본 여행은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를 영문으로 번역해 보며 재미를 느꼈던 경험과 춘천사랑 생태시에 도전했던 것이 앞으로 어떤 시를 써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루하지 않아 살만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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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상사화



눈이 내리네

눈 내리네

눈썹 위로 흐르는 그대 눈망울


눈이 내리네

눈 내리네

감춰진 길 위로 소곤대던 목소리


나는 여기서 무성한 잎 내고

그댄 거기서 고운 목선 꽃대 올려

우린 만나지 못하는 화사한 분홍이지


눈이 내리네

눈 내리네

휘저으며 저으며 헤매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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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차를 마시며



고귀한 것은

일찍 떨어질 운명인가

4월도 되기 전 잠깐 핀

목련이 지고 있다


움추려 떨며 지낸 시간은 말하지 말자

뭉툭한 붓끝으로 소망을 적어

파란 하늘에 고고한 꿈을 펴던

내 순백의 날개여


나뭇가지 위에서 태어났기에

속절없이 뜯기고 해진 채 뒹구는

한 조각 세월이 되기 싫어

온전한 꽃봉오리로 찻잔에 들었네


막힌 코를 틔우는 청량한 향기로

다시 살아난 비련의 주인공

막막한 봄날 목련꽃차 마시며

고단한 꿈의 부활을 꿈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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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선다는 것



바람 불지 않을 땐

홀로 움직여도

바람이 불 땐

흔들리지 않는 독활獨活


땅속에 발 넣어

온전히 몸 잠기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밥 먹고 숨 쉬는 것

꽝꽝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

죽지 않으려 웅크리는 것


그래야 손 내밀어

푸슬푸슬해진 흙을 짚고

부슬부슬 봄비 내리는 날

땅 위로 고개 들 수 있는 거 아냐?


땅에 서서 볼 위로

햇살 기운 받을 수 있다는 건

쉼 없는 바람과 타협 않고

자신의 향내를 품을 수 있다는 건


한없이 독한 걸까

철없이 순한 걸까

홀로 자유로운

사월의 땅두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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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박 사장



‘Grück Auf’ 살아 돌아오라

지하 1,200미터 갱도로 내려가기 전

두 눈 질끈 감고 보아야 했던 문구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

고향에선 주먹깨나 썼다지만

석탄 캐는 데 주먹은 소용없었어


씨부럴 씨브럴 개새끼

말끝마다 욕 붙여 긴장 풀다 보니

고치지 못하는 버릇되어 미안하다 웃었지

간호사로 온 부산 여자 만나

아이들 낳고 돈 모아 캐나다에 정착했고

여름마다 연수 오는 선생님들 앞에서

고향 까마귀 반갑다고

긴장 풀려 욕바가지 쏟아지면

백번 베푼 친절 한 순간에 날리곤 했지


정이 넘치던 그 이

나이 들어 외로운지

국제전화 오래오래 하곤 했는데

언제나 당당하던 그 표정으로

불쑥 찾아오던 고국 나들이도 뜸하더니

돌아가셨다 소문 들리고

안부처럼 가끔 그 웃음소리 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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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통



사지마비가 올 수도 있고

피떡이 생겨 죽을 수도 있다는데

코로나19 AZ 백신을 맞았다

죽음이 일상이 된 오늘

차례를 못 지킨 이를 대신하여

수상한 소문들 안쪽으로 들어섰다


인도에선 장작더미 불꽃으로

영혼들 연기되어 올라가고

더 많은 살아 있는 목숨들이

산소통을 구하려다 쓰러진다 했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이 가빠요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가

뒤돌아서며 말하는 것 같았다


뿌연 하늘 같은 내 마음에

슬픔과 감사의 두 개 화살이 날아든다

어깨 파고들던 따끔한 주사 바늘

길다란 산소통으로 변해

자꾸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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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다



뭘 잘 못 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찍어둔 휴대폰 속 사진들이

속절없이 사라졌다

딱히 동동거릴 장면도 생각 안 나

허망했다


초점 맞추느라 진땀 흘린

아주 작은 풀꽃은

카메라 속에 아직 살아 있다

사실 이 꽃을 휴대폰에

옮겨 놓으려다 벌어진 일이다


됐다 됐다

지상에서 곧 사라질

너를 잡았으니

기억도 안 나는 추억의 강가에

가녀린 널 붙잡고

나도 아직 살아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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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독사



그가 그에게 왔다

이름처럼 독하게 그를 물었지만

비명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혼자 밥 먹고 잠자고 놀았다

혼자 읽고 쓰고 주장하고

혼자 웃고

혼자 술 먹고

혼자 울었다


“몸살감기로 폐인이 되었다가

소생하고 있는 중…

이제 죽이라도 먹어야 되겠다…”

3일 후에 짧게

“결국 링겔 주사를 한 시간 맞고 왔다”

마지막 남긴 글이었다


정확히 언제

잠긴 문을 열고 그가 들어와

힘없는 그를 물었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어졌다

무심한 시간의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그는 지금도 계속 먹이를 찾아

골목길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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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증거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말하지?


애꿎은 손가락 펼쳐 놓고

끝없이 탁본하는 사람들

휴대폰에도 지문 등록 힘들어

홍채 등록했는데

보안상 늘 불충분한 이 몸을 어이하리


난 어떤 우주에서 온 걸까

열 손가락 무늬로도 판별 안 되니

이 땅에서 나눴던 수많은 악수와

떨리던 감촉과 축축이 땀 배던 흥분과

손 걸고 다짐한 소중한 약속들

출처 미상의 난수표가 되는 건가


아름다운 지구별 여행 마치고

언젠가 돌아가는 날

내 암호 같은 그림자 하나

손잡아 맞아 줄 이에게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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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친구



어느 날 금방 수락한 친구가

메신저로 전화를 했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놀라서 받지 않았지

일확천금 기회를 주겠다던 문자를

예전에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비슷한 얼굴을 피하고 있다네


읽어주길 바라는 책들처럼

새 얼굴들 올라오네

친구로 선택 받거나

대기 명단에 몇 년간 머무르거나

몇 년 전 죽은 친구도

여기선 아직 살아 있네!


지구촌 어디에 있든

곁에서 속삭여 준다니

끊어버리기도 쉽지 않네

가끔 눈속임으로 물건을 팔거나

허튼 관심을 유도하거나

섹스를 권하기도 해서 쉽진 않지만


나는 누구에게

읽어볼 만한 책일까

얼굴을 바꿔 달며 피어나는 꽃들처럼

언제나 방긋방긋 웃어야 할까

뭐라고 끝없이 지껄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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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이 필요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소식 듣고 한 마디 남긴다

나만 가만 있을 수 없다며

너도나도 같은 말을 복사한다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가브리엘 웰즈*는 묘비명에 적었고

‘당신들은 정신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정신이다’라고 죽어 매장된

자신의 육신을 보고 말했다


나의 묘비명을 누가 묻는다

나는 준비하며 살아왔나 되묻는다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도 똑같은 기도를 복사한다


강물처럼 말랑말랑

살려고 해 봤어?

훨훨 밝은 영혼으로

날아가고 싶지 않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 소설 「죽음」의 주인공인 프랑스 인기 추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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