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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無題 1 외 4편 / 이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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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999회 작성일 21-12-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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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살아 움직일 수 잇게 하신 이가

또 날 언제 데려가실지 알 수는 없지만

세상 떠날 때까지 시를 쓰겠다, 세상 뜬 후에도

시인으로 불려지길 소망 하던 패기는 어디로 갔나.

사람은 시간의 존재라서 서서히 낡아지고

연약해 짐을 실감한다.

그래도 순수함은 잃지 말아야지.

시가 잘 안 써진다는 변명을 길게 늘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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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題 1



네 곁에

마주 서 있으면

후리지아 꽃내가 난다


네 꽃내를 흠치고 싶은

이 찬란한 충동


씻은 듯 정갈한 내음

너를 닮은

꽃이 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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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題 2



네가

움직일 적마다

초록 바람이 일렁인다

오월 보리밭에서처럼


네가

노래할 적마다

종다리 투명한 소리

높이 날며 폴포로롱


네가

숨 쉴 적마다

내뿜는 청량함은

새벽 내음


네가

웃을 적마다 감추어진

비밀을 안다

갓 피어난 제비꽃 같은

그 기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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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題 3



슬펐던 날을 울어 본 우리

그럴 수밖에 없었던

기억을 생각지 말자


모순된 세상이 진저리나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부르자


앵두나무 꽃잎이 떨어져

눈처럼 하얀 밭두렁에서

냉이, 꽃다지, 벌금자리

무릇도 캐고


노을 녘이면

다홍빛 꽃구름이

물가에 내려와 헤살짓던

우리 유년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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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의 하오



땡볕 한낮

사람들은 바다로 떠나고

텅 빈 옥상에

빨래 걷으러 나갔더니

아직도 이글거리는 햇덩이

뒷집 감나무 무성한 잎 사이로

풋감 노려보고

그 서슬에

내 화단의 봉숭아꽃들

풀 죽어 있는데

채송화만 빳빳이 치켜든 얼굴에

벌 한 마리 날아와 분칠하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데

몇 그루 토마토 빨개진 열매와

나는 숨 가쁘고 지루한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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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의 봄



집 앞 길 건너

이층집이 헐렸다


<머리가 예쁜 나라> 간판 달고 있을 땐

몰랐는데

뒤뜰이 보였다


거기 우두커니 나무 한 그루

거무튀튀한 맨몸으로

빈 뜰 지키며 혼자 서 있더니

어느 날 발그스럼 꽃망울이 보였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데

오며 가며 말 걸어 주었다


넌 꽃 피울 생각하며

추운 겨울 홀로 견디었구나

그래, 꽃 피고 나면

맛있는 열매가 달릴 거야


주문진 봄바람은 거칠고 사나워

장독 뚜껑도 날리는데

용케도 분홍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곱다는 말 보다 더 좋은 말로

칭찬해 주고 싶은 저 살구나무

엷은 분홍 꽃잎을 온 동네 흩날리는데

집 팔고 이사 간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거 같다


아무래도 올봄은

사람의 봄이 아니라

마스크 안 써도 되는

너의 봄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