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호2021년 [시] 해님 도둑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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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헝클어진 한 해였다. 무얼 하겠다고 예정했던 일이 수없이 취소되고 연기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이 이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내일의 모습이라는 걸 느끼고 또 느끼게 했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이충희 누님이 가셨다. 같은 시기에 <갈뫼>에 입회하여 43년간 함께 했었다. 편찮았던 시간이 오랜 기간이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다. 고운 성품의 누님을 보낸 아픔이 크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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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님 도둑
마을에 CCTV가 달렸다
처음엔 겁이 나 주자고
모형을 달더니
요즘은 진짜를 단다
사람들도 드문드문 사는 곳에
이유야 어쨌거나
이 집에서 다니
저 집도 달았다
장 단지에 장이 줄어든다고
할머니 댁도 달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누가 그걸 손대겠냐고
한여름 땡볕을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던
해님 도둑은 잰걸음으로
서산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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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임과 매듭
꼬이므로 단단해지고
매듭으로 풀리지 않는다
만남도 그렇다
수십 년 같이한 날들
수만 번 꼬아진 오라기들
행여 손바닥에서 부서져 버릴까?
간간이 짚 오라기 물로 축이며
밤샘 꼬아댄 새끼줄이 한 타래
이런저런 연으로 꼬아댄 줄
가늘었다가 굵어지길 여러 번
투박스럽다 탓하진 말자
꼬임과 매듭으로 하나 된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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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누이들에게 미역을 보낸다
공현진 얕은 갓바다에서
손으로 뜯은 햇미역을
석단씩 보낸다
누님은 미역 줄거리 무침을 좋아하고
두 동생은 생미역 쌈밥을 좋아하니
내일은 밥상 놓고
환하게 웃으리라
미역이 대접받던 시절
그게 농사고 식량이었다
부모님들은 봄 한철
미역 배에 매달렸고
우리 남매들은 모래밭에서
미역 올과 같이 뒹굴었다.
종일 미역 붙이기에도
허리 하나 안 아프다던 어머니
마른미역 단을 쌓아 놓고
그냥 배부르다 웃던 아버지
누구네 집을 찾아다니며
펄럭거리는 미역밭 사이로
넘실넘실 바다만큼 차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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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꽃
어둡고 조금 칙칙한
이끼 꽃
장마 속에서도
가뭄 속에서도
별 내색 없이 웅크리고 있다가
스르륵 스며든
한 점 먹물
햇볕에 말릴 수도 없고
쉬 닦아낼 수 없는 흔적
그 속에서 바람 일고
구름이 날린다
가슴에 박힌 무채색 점
참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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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뚜레 선물
신축년 선물로
코뚜레 받았다
부엌과 통하게
외양간 늘리고
송아지 한 마리 들여놓으면
온 가족 웃던 시절
늦도록 풀 뜯기고 꼴 베고
쇠여물 끓였다
소만큼 힘써라
소만큼 걸어라
이런저런 말도 없이
코뚜레 하나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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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나무는
따뜻한 쪽으로
가지를 키우고
나는
가지 못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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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
누님이 보내준
댑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었다.
우리 남매들
옹기종기 놀던 마당
환하게 쓸었다.
어찌나 잘 쓸리는지
아버지 계신
하늘도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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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게
자꾸 웅크리면
가시가 자란다
가시가 몸을 덮으니
가시만 보인다
바다가 밀어낸
성게 한 마리
넓은 모래밭을
가시로 지키자 한다
눈도 귀도 없는
밤송이 조개도
가슴 속에는
샛노란 알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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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 확인
어미는 자식을 낳고도
어미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첫째를 그랬고
둘째 때도 그랬다
육십이 된 셋째 아들은
한이나 풀자고
친자 확인 소송을 냈고
어미와 아들은 유전자 검사를 했다
돌배나무에서 돌배 달리고
단감나무에선 단감 열리면 됐지
그깟 확인서가 뭐가 대단하냐며
이름 석 자 올리지 못하고
넷째도 낳고 막내도 낳았던
어미는 그저 담담하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연들 있고
평생을 함께 산 어미 아들이
친자 확인 하는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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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하늘
시월 한 달을
선물로 받고 싶다던 당신
드리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이 푸르디푸른 날들
보라색 보자기에 곱게 담아
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바늘 끝 초침이
가슴 찌르며 뛰어다니던 날
갈바리 병원 남쪽 창가에서
한 벌의 옷
혼자 챙기던 당신
시월의 한 달이
한 올 한 올 풀리다가
몇 가닥
푸르디푸른 계단이 되어
하늘로 이어졌습니다.
하늘과 당신을 이어 논
한 올의 실 가볍게 당기면
빙그레 웃는 하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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