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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 해님 도둑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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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918회 작성일 21-12-1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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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헝클어진 한 해였다. 무얼 하겠다고 예정했던 일이 수없이 취소되고 연기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이 이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내일의 모습이라는 걸 느끼고 또 느끼게 했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이충희 누님이 가셨다. 같은 시기에 <갈뫼>에 입회하여 43년간 함께 했었다. 편찮았던 시간이 오랜 기간이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다. 고운 성품의 누님을 보낸 아픔이 크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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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님 도둑



마을에 CCTV가 달렸다

처음엔 겁이 나 주자고

모형을 달더니

요즘은 진짜를 단다


사람들도 드문드문 사는 곳에

이유야 어쨌거나

이 집에서 다니

저 집도 달았다


장 단지에 장이 줄어든다고

할머니 댁도 달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누가 그걸 손대겠냐고

한여름 땡볕을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던

해님 도둑은 잰걸음으로

서산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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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임과 매듭



꼬이므로 단단해지고

매듭으로 풀리지 않는다


만남도 그렇다

수십 년 같이한 날들

수만 번 꼬아진 오라기들

행여 손바닥에서 부서져 버릴까?

간간이 짚 오라기 물로 축이며

밤샘 꼬아댄 새끼줄이 한 타래


이런저런 연으로 꼬아댄 줄

가늘었다가 굵어지길 여러 번

투박스럽다 탓하진 말자


꼬임과 매듭으로 하나 된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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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누이들에게 미역을 보낸다

공현진 얕은 갓바다에서

손으로 뜯은 햇미역을

석단씩 보낸다


누님은 미역 줄거리 무침을 좋아하고

두 동생은 생미역 쌈밥을 좋아하니

내일은 밥상 놓고

환하게 웃으리라


미역이 대접받던 시절

그게 농사고 식량이었다

부모님들은 봄 한철

미역 배에 매달렸고

우리 남매들은 모래밭에서

미역 올과 같이 뒹굴었다.


종일 미역 붙이기에도

허리 하나 안 아프다던 어머니

마른미역 단을 쌓아 놓고

그냥 배부르다 웃던 아버지


누구네 집을 찾아다니며

펄럭거리는 미역밭 사이로

넘실넘실 바다만큼 차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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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꽃



어둡고 조금 칙칙한

이끼 꽃

장마 속에서도

가뭄 속에서도

별 내색 없이 웅크리고 있다가

스르륵 스며든

한 점 먹물


햇볕에 말릴 수도 없고

쉬 닦아낼 수 없는 흔적

그 속에서 바람 일고

구름이 날린다


가슴에 박힌 무채색 점

참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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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뚜레 선물



신축년 선물로

코뚜레 받았다


부엌과 통하게

외양간 늘리고

송아지 한 마리 들여놓으면

온 가족 웃던 시절


늦도록 풀 뜯기고 꼴 베고

쇠여물 끓였다


소만큼 힘써라

소만큼 걸어라


이런저런 말도 없이

코뚜레 하나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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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나무는

따뜻한 쪽으로

가지를 키우고

나는

가지 못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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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



누님이 보내준

댑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었다.


우리 남매들

옹기종기 놀던 마당

환하게 쓸었다.


어찌나 잘 쓸리는지

아버지 계신

하늘도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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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게



자꾸 웅크리면

가시가 자란다

가시가 몸을 덮으니

가시만 보인다


바다가 밀어낸

성게 한 마리

넓은 모래밭을

가시로 지키자 한다


눈도 귀도 없는

밤송이 조개도

가슴 속에는

샛노란 알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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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 확인



어미는 자식을 낳고도

어미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첫째를 그랬고

둘째 때도 그랬다


육십이 된 셋째 아들은

한이나 풀자고

친자 확인 소송을 냈고

어미와 아들은 유전자 검사를 했다


돌배나무에서 돌배 달리고

단감나무에선 단감 열리면 됐지

그깟 확인서가 뭐가 대단하냐며


이름 석 자 올리지 못하고

넷째도 낳고 막내도 낳았던

어미는 그저 담담하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연들 있고

평생을 함께 산 어미 아들이

친자 확인 하는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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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하늘



시월 한 달을

선물로 받고 싶다던 당신


드리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이 푸르디푸른 날들

보라색 보자기에 곱게 담아

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바늘 끝 초침이

가슴 찌르며 뛰어다니던 날

갈바리 병원 남쪽 창가에서

한 벌의 옷

혼자 챙기던 당신


시월의 한 달이

한 올 한 올 풀리다가

몇 가닥

푸르디푸른 계단이 되어

하늘로 이어졌습니다.


하늘과 당신을 이어 논

한 올의 실 가볍게 당기면

빙그레 웃는 하늘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