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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시인론] 이충희 詩에 나타난 야생화와 정신의 구원이 된 詩들 살펴보기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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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896회 작성일 21-12-1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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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희 詩에 나타난 야생화와

정신의 구원이 된 詩들 살펴보기


권 정 남




1. 들어가는 말


시를 쓰는 데 있어 마음 바탕은 상상력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은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감정 이입과 더불어 작용한다. 즉 마음의 거울에 비친 어떤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코로나가 일 년 이상 지속 되고 있어 모든 문화강좌가 비대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이야 말로 원래부터 혼자서 창작하는 비대면 예술이다. 대부분 문인들은 각종 문예지나 개인 저서를 통해 작가 보다 작품을 먼저 만나는 경우가 많다. 위기가 기회이듯 문학이야말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일수록 창작에 몰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충희 시인은 193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강릉 노암초등학교를 시작으로 향리에서 33년간 초등교사로 근무했다. 1979년 《현대문학》에 「동해구곡」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가을 회신』, 『마음 재우며 보는 먼 불빛』, 『겨울 강릉행』, 『이순의 달빛』, 『청축』을 출간했으며 강원문학상, 관동문학상, 허난설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강릉 여성문학인회, 강원여류시 <산까치회> 회장을 역임 했으며, 속초 설악문우회 <갈뫼>, <해안> 동인을 비롯하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시인협회에서 활동을 해왔다.

셸리가 “시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선한 마음의, 가장 선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했듯이 이충희 시인의 시 세계는 삶과 자연을 관조하는 순수 무구한 사랑과 선禪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이충희 시인의 시는 맑고 투명하며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 내려갔으며 그림으로 말한다면 물감을 붓에 묻혀서 한 번에 그려낸 수채화나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느낌이 들어 읽고 나면 감동이 크다.

이충희 시인의 시집 『가을 회신』, 『겨울 강릉행』, 『이순의 달빛』, 『청축』과 『갈뫼』 2012년 이후부터 2019년까지 발표된 시 중에 자연을 주제로 한 야생화와 정신의 구원이 되는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야생화, 식물성 언어로 그린 수채화


현대사회는 산업화로 인해 물질문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로 인한 금속성 언어 공해가 심각하다. 하지만 이충희 시인의 야생화를 소재로 쓴 시를 읽다가 보면 사계절 식물도감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식물성 언어로 쓴 시들은 한 폭의 투명한 수채화로 다가오기도 하고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 헤르만 헷세의 잔잔한 그림을 감상하는 듯하다. 이충희 시인의 시들은 삶의 모서리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아픔을 쓰다듬어주고 온갖 들꽃이 만발한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영혼을 쉬게 하는 치유의 시들이다. 시의 특징은 설명이나 진술보다 맑고 투명한 이미지를 묘사했다.

이충희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꽃은 각종 축하 행사장이나 입학 졸업식장에서 사랑을 받는 이름 있는 꽃이 아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딴 산속이나 들길에 혼자 피었다가 지는 야생화다. 그 꽃들은 거의 사람들한테 잘 알려지지 않은 꽃들이다. 나름대로 색깔과 향기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며 들판이나 도시 골목 보도블록에서 짧은 생을 빛나게 피우는 꽃들이다. 이충희 시인은 그런 소박하고 순수한 꽃들을 몸처럼 사랑하다가 끝내 물아일체物我一體 경에 들고 만다.



긴산꼬리 풀꽃

오늘 나는 사단 났다


집에 가기 틀렸다


어찌 저 미색을 내친단 말인가


곰배령 초입

긴산꼬리풀

연연한 꽃빛에 홀려

산안개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기로서니

뭘.


― 「긴산꼬리 풀꽃」 전문




여름 끝자락 질질 끌고 은비령으로 간다



잠을 설친 잡것

눈 하나 깜짝 않을 뱃심 그래 좋다

나 오늘 느리게 흐를란다

은비령 산자락 마타리 꽃으로 피어

눈 짓무르도록 누굴 기다려보고 싶다

기다림에도 힘에 부치는 세월에 떠밀려

서랍을 비우는 이즈음

은비령에 아직 눈 내리지 않고

눈 내려야 제격이지 싶던

완강한 고정관념 불쑥 튕겨져 나와

온산이 하얗다

적설 아니고 적막하다


은비령 마타리.


― 「은비령 마타리」 전문



곰배령 초입 보랏빛 솜털이 약간 있는 꽃 이름조차 시적 분위기인 ‘긴산꼬리 풀꽃’에 시인은 홀려 버렸다. ‘집에 가기 틀렸다’ ‘사단이 나다.’ ‘하룻밤 만리장성 쌓기로 했다.’ 시인의 마음을 아는지 꽃조차 은근히 시인의 치맛자락을 당긴다. 그러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이름 없는 풀꽃에 영혼까지 끌려간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아무나 ‘긴산꼬리 풀꽃’에 홀리는 건 아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들꽃의 초연한 모습에 그냥 지나 칠 수 없다. 자석처럼 빨려 들어가 보랏빛 풀꽃과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기로 한 이충희 시인의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은비령, 곰배령. 령嶺 이름에서도 풀꽃 냄새가 난다. 시인은 긴산꼬리 풀꽃하고 몸 섞으려고 하더니 마타리를 보고는 아예 마타리 꽃으로 피어 은비령에 눌러앉길 소원한다. 괴테가 “내가 시를 만든 것이 아니다. 시가 나를 만든 것이다.”라고 했듯이 시인은 곰배령 긴산꼬리 풀꽃, 은비령 마타리를 보면 시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괴테의 말처럼 즉 시인의 마음 보다 시를 쓰게 하는 풀꽃들의 마음이다. 시인은 야인으로 살며 눈이 짓무르도록 누군가를 기다리며 순정을 바치는 느림의 미학인 꽃이 되고자 소원한다. 긴산꼬리 풀꽃하고 몸을 섞더니 은비령에서는 속세를 떠난 다음 생에는 마타리로 환생하고 싶어 한다. 가을 은비령에 눈이 온 듯 설경에 들었을 때 그 적막 속에 숨어 버리고 싶어 한다. 소리 없이 피었다가 홀연히 지는 야생화와 물아일체 경지에 든 이충희 시인의 선善한 마음에도 풀꽃 냄새가 난다.



왕산리를 아시는지요

<중략>

백두대간 등줄기 그 아래

능경봉 산자락에 순하게 엎드린 마을입니다

버들개지가 눈 녹은 물에 발을 담그고 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동박꽃 산벚꽃 돌배꽃 진달래 함박꽃*

키를 낮춘 은방울꽃 둥글레 붓꽃 용담이 핍니다

그리움 하나 소롯이 받쳐 들고

뻐국새 산달래 마타리가 핍니다

원추리 산나리 각시취 놀 오줌 싸리꽃 칡꽃 산국

구절초 투구꽃 모싯대

숨 가삐 불러 주지 않아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핍니다

햇살이 깊어지면 감자꽃이 부드러운 꽃잎을 열고

눈이 시리게 핍니다

가을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왕산리

초록이 가을빛으로 옮겨 앉기 시작하면

왕산리는 숙연해집니다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 스밉니다

<중략>

왕산리 물소리는 여전히 맑고 그리고 깨끗합니다


* 동박꽃 : 생강나무. 황매. 강원도 지방에는 이 꽃을 동박꽃이라 함(김유정의 동백꽃도 이 꽃임) 열매로 동백기름을 짬, 산수유와 꽃피는 시기 꽃이 비슷함.


― 「왕산리ㆍ1–아름다운 청정구역」 중에서




돌배꽃 개복사꽃 잎 틔운 나무가

어우러 그려 놓은

왕산리 봄은 너무나도 완벽해

감히 붓끝으로

어떻다 쓸 경지를 벗어나 있었네

안개비가 어루만지며 가는

저 기막힌 선경仙境을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내 이승 나들이는

썩 괜찮은 듯싶네


― 「왕산리ㆍ2 -안개비」 전문



< 상략 >

왕산리 꼴짜기엔 무더기 무더기로

막무가내로 하이얀 찔레꽃이 피어

온 골짜기가 찔레꽃 향기로 눈이 부십니다

옷자락에도 발치에도 젖가슴께도

찔레꽃 내가 찰랑찰랑 넘쳐

샤넬 넘버 어쩌구 저쩌구 한다면

정말 아니올시다입니다

혹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중략 >

지난밤 당신 꿈이 어지간하시거든

왕산리 찔레꽃 보러 오시길


― 「왕산리ㆍ3–찔레꽃대 쓴 편지」 중에서



누구든 여름 어스름 녘

왕산리 골짜기 달맞이 꽃숲에 들면

달맞이꽃 서느란 눈빛에 홀려

얼마간 세상일

까마득히 잊고

이름도 잊고

그렇게 아주 고른 고요에 들게다


― 「왕산리ㆍ4–달맞이꽃」 전문



이충희 시인은 세 번째 시집 『겨울 강릉행』에서 능경 산자락에 순하게 엎드린 ‘왕산리’를 주제로 쓴 시가 12편이나 된다. 사계절 왕산리 풍경은 일필휘지 색색 물감으로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다. 시를 읽노라면 왕산리 풍경이 동영상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 누군가 시인은 자연을 복사하는 서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CD 루이스가 말했듯이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말을 새삼 절감한다. 주로 왕산의 자연경관은 물론 흙과 몸 섞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하디 순한 이야기다.

「왕산리ㆍ1」의 동박, 산벚꽃, 돌배꽃, 진달래, 함박꽃, 은방울꽃, 둥글레 붓꽃, 용담산달래, 마타리, 원추리, 산나리, 각시취, 놀오줌, 싸리꽃, 칡꽃, 산국, 구절초, 투구꽃, 모싯대 등 들꽃이 함빡 피어난 들판은 한 권의 식물도감이다. 이충희 시인은 왕산리 야생화들의 담임 선생님이듯 운동장에서 아이들 이름을 호명하듯 들판에서 숨 가쁘게 들꽃들의 이름을 모두 불러본다. 사계절 중 눈부신 가을이 되면 눈물이 스민다고 한다. 청정 구역에 대한 시 중에 「왕산리ㆍ2」 돌배꽃, 개복사꽃 피어나는 완벽한 왕산리 봄을 노래했다. 붓끝으로 어떻다고 쓸 경지를 벗어나 안개비가 어루만지며 가는 기막힌 선경仙境을 한 폭 수묵화로 터치하며 이승 나들이에 만족해하고 있다. 「왕산리ㆍ3」과 「왕산리ㆍ4」는 찔레꽃 피는 왕산리 초여름의 신선함과 7월 해 질 녘에 피는 달맞이꽃 숲에서 세상사 일들 모두 망각하고 피안의 세계이듯 고요한 선禪의 경지에 들게 된다. 산간 마을에 눈이 오면 통제가 되고 자연이 모두 침묵하므로 이충희 시인은 겨울 왕산에 관해서는 시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왕산리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거대한 아이맥스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충희 시인이 왕산리에 농가 주택을 사서 별장처럼 사용했던 적이 있다. 1995년경 강원여성시인 <산까치> 모임을 그곳에서 가졌다. 이충희 시인이 손수 감자 찌고 된장 끓이고 고등어 조려서 점심을 해주셔서 모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멀리 산안개가 내려앉은 여름 왕산리 풍경은 선경 그대로였다.



그대 만나러 왔네

오늘 그대 괘방산 봄철쭉으로 피어

온 몸이 오직 분홍 빰인 수줍은 스무 살

돌아보니 내 스무 살도 그대 꽃잎이었네

<중략>

가뿐숨 고르며 오른 산행에서

스무 살 꽃잎이었던 나를

봄볕에 눈부시게 걸어 놓고

얼마를 흔들렸네


꿈결인 듯 꽃잎으로 가는 길이었네


― 「꽃잎으로 가는 길」 중에서




산길은 철쭉 꽃길과 닿아 있습니다 / 산 아래 안인진 마을은 막 올라온 바다 안개가 길을 만듭니다 / 삼우봉 바위에 걸터앉아 굽어보는 / 망망대해 바닷길 아득합니다 / <중략> /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운 만큼의 자유입니다 / 저 하늘과 물의 구분 / 수평선을 어우르는 안개가 만든 길이나 / 산길에 잇대어 핀 철쭉 꽃길이나 / 마을 길이나 모두 아름답습니다 / 그래요 매이지 않아 아름답습니다.


― 「자유, 아름다운 허방다리」 중에서




꽃잎이 내준 길을 따라갔습니다

어찌나 맑은지

어찌나 밝은지

그만 깊어지고 싶습니다

꽃도 이쯤의 이치에 이르면

너끈히

길 하나를 만듭니다.

無量壽殿 투명한 길을


― 「길」 전문



이층희 시인은 들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있는 들길을 또한 좋아한다. 산길은 철쭉 꽃길과 닿아 있고 안인진 바닷길, 안개길, 마을길 모두 얽매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그 길은 결국 산길에 잇대어 핀 철쭉 꽃길이다. 시에 등장하는 모든 꽃길은 공을 쓸고 지나가는 그 무한한 자유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또한 괘방산 봄철쭉을 보고 시인의 스무살도 그대 꽃잎이었고 돌아보니 그 길 역시 꿈결인 듯 꽃잎으로 가는 길로 귀착이 된다.

작품 「길」에서도 맑고 밝은 꽃의 길은 이충희 시인의 화두이며 삶의 길이다. 꽃의 이치를 닮아 시인도 너끈히 무량수전無量壽殿 같은 투명한 길을 만들고자 예언한다. 강원도 산골짝과 계곡에 계절마다 피어 있는 야생화들이 모두 집결하여 이충희 시인의 생의 길을 밝고 환하게 비추며 안내하고 있다.



진동약수 가는 길에 분홍 물봉선 노랑 물봉선 보이길래 다 왔지 싶어 한 구비 도니 약수보다 먼저 산물봉선이 마중 나왔습니다 앞이마에 발그라니 분홍빛 수줍게 웃으며 험한 길 잘 오셨다고 눈으로 말합니다 눈으로 말하다니요 그래요 깊은 말은 눈으로 합니다 마음 하나 내려놓을 곳 아느냐고 물었더니 예의 그 눈빛으로 이릅니다 안다는지 모른다는지 딱하다는지 전혀 감 잡을 수 없는 눈빛의 선함이라니요 어찌나 무안턴지 어찌나 한심하던지 산물봉선에서 길을 물으려던 내 아둔함까지 가지도 못하고 약수 한 사발 얻어 마시고 서둘러 진동계곡을 빠져나왔습니다


― 「산물봉선 만나 길을 묻다가」 전문



<상략>

동행한 친구가 꽃 무더기 다치지 않게

볼펜 심지만 한 곁부리 캐 손수건에 싸길래

설마 살리겠냐며 만류하던 내 기우를 덥고

실한 새순 쑥쑥 올리더니

이듬해 봄 휘어지게 조롱조롱 꽃을 매달았다

이름도 모르던 복주머니꽃으로 부르던 금낭화!

그래 맞다 야생의 질긴 근성

모래땅에 뿌리박고 꽃 피운 조상의 고난사

그 DNA 치열한 경영으로

분가를 거듭하며 일가를 이루었으니

그 생명력 소임 눈물겹지 않으리


봄이면 어김없이 내린천으로 회귀하는

꽃의 물길 하나 터주는

옹졸한 나의 詩

내린천이 그리운 꽃도 있다


― 「내린천이 그리운 꽃도 있다」 중에서



산세가 아름다운 인제를 무대로 쓴 시다. 「산물봉선 만나 길을 묻다가」는 진동계곡에 약수 뜨러 갔다가 마중 나온 선한 분홍 물봉선이랑 즉 산 물봉선과 눈으로 대화를 한다. 그러면서 깊은 말은 눈으로 한다며 산물봉선한테 마음 하나 내려놓고 약수 한 사발 마시고 진동계곡을 빠져나온다. 「내린천이 그리운 꽃도 있다」는 동행한 친구가 볼펜 심지만한 곁 부리를 캐 옮기더니 금남화가 분가를 하여 생명력 소임을 눈물겨워한다. 강릉이든 인제든 지역과는 상관없다. 70리 내린천으로 회귀하는 물철죽과 금낭화가 시인의 마음에 낚여서 시로 쓸 수밖에 없다. 위 두 편의 시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인제가 이충희 시인 詩의 산실産室이 되었다.



새벽시장에서 두부 한 모 더 사

대문 밑으로 밀어 넣고 오고 싶은

그 마음 건너와

채송화 꽃이 피었다


이쁘기도 해라

베개 모에 수놓인 꽃들이

피어올라 꽃 세상일 적에

이런 호사 몇 겁의 인연이였을까를


살면서 받은 위안 흘리며 지낸 일

뒤적여 뉘우치는 노년의 한가가

법구경 같기도 한 이런 무욕을


마음이 건너와 양식이 되는 이치를

골똘히 궁리한다

그만 나도

꽃으로 피기로 했다.


― 「두부 한 모의 유추」 전문




대문 기둥 밑 콘크리트 아스콘 바른 틈서리로

<중략>

천 일 홍!

사람씨나 풀씨나 제 식솔 늘이려

안간힘 다해 바락바락 용을 쓰는

본능적 강인함 어찌나 기특던지

저 하잘것없는 풀씨 한 톨

나름 한 생을 꽃피웠으니

그대 한 살이도 갸륵했다 적는다


― 「천일홍 꽃에 바치는 詩」 중에서



「두부 한 모의 유추」는 대문 밑으로 누군가 두부 한 모를 밀어 넣은 그 마음이 채송화 꽃으로 피어 환하다. 여지껏 살펴본 꽃들은 물리적인 꽃이지만 몇 억겁 인연이 마음 꽃으로 환생하여 법구경의 무욕으로 피어나게 한다. 두부 한 모의 유추가 역발상으로 시인의 마음도 채송화로 피어나게 한다. 다시 말해 이충희 시인의 마음이 그날은 온통 꽃밭으로 출렁인다.

위에서 살펴본 야생화들은 산과 계곡에 피어났다. 하지만 집 대문 기둥 밑 콘크리트 아스콘 바른 틈서리로 씨앗 한 톨 움터 쑥쑥 자란 붉은 꽃송이 천일홍을 보며 안간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에 탄복한다.



1980년대 중반쯤 강릉명륜고등학교 학생백일장

심사로 오신 조병화 선생님과 안목 죽도봉을

돌아가다 바위틈에 늘어져 핀 보랏빛 꽃을 가리키며

꽃 이름을 물으셨고 동행한 시인 아무도

모른다 대답 드렸더니

그 고장에 사는 시인은 그 고장

꽃 이름은 알고 있어야 한다셨고

나는 그 말씀에 적잖이 무안했었다

<중략>

바람에 실려 온 꽃씨가 여기 동해 바닷가

바위틈에 뿌리내리고 일가를 이룬

해마다 꽃피워 세상을 밝혀 놓는

맑은 보랏빛 해국만 보면 고인이 되신

시인 한 분 맞는 듯 반갑다.


― 「해국에 대한 한 소절」 중에서



보랏빛 해국만 보면 조병화 시인이 생각이 난 이충희 시인은 안목 죽도봉 벼랑에 핀 꽃 이름을 물었는데 그때 답을 못해 무안했던 생각을 한다. 훗날 동해 바닷가 바위틈에 뿌리내린 그 꽃 이름이 해국임을 알고 해국만 보면 이미 고인이 되신 조병화 시인을 만난 듯 반가워한다. 시인은 야생화 한 송이에도 마음을 담아 놓고 이승을 떠난 원로 시인 만난 듯 그리워하며 잠깐 스친 인연의 기억을 잊은 듯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놓치지 않고 시로 형상화 한다.



<상략>

매화꽃이 터뜨리는 향기에게

냉이 새순에게

목 내밀자말자 꽃 피운 민들레에게

빈 집에 혼자 꽃등을 단 목련에게

폐교 된 빈 운동장 연초록 느티나무에게

얼음 풀린 시냇물 노래에게

초록빛 봄 바다에게도

온 세상에게 오신 이쁘고 이쁜 고마운 봄님에게

공손히 절하며 다니느라

봄님이 저만큼 가시는 걸 못 보았네요


― 「봄님에게 절하며 다닌 이야기」 중에서




지는 꽃들의 환한 일몰 / 속으로 들어가 보신 일 있으신지요 <중략> 살 으깨는 산고의 고통 견뎌보셨는지요 / 실뿌리 몇 가닥 돌 틈으로 단단히 내리고 / 햇살 한 올 부끄러이 이마에 꽂고 / 눈 부셔 눈 부셔 보셨는지요 / 다시 꽃으로 회귀하는 / 저 환한 적멸寂滅 / 일천강의 달로 뜨는 이치에 다름 아님을 / 짐작는 꽃 지는 아침


― 「저 환한 적멸寂滅」 중에서



자연을 경배하고 숭배하는 자세가 이충희 시인 몸에 배어 있다. 봄꽃들이 태동을 하며 작은 미동에도 감격하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시인의 겸허한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렇게 봄님한테 절하듯 햇살을 거느리고 왔던 꽃들이 회귀하는 적멸의 모습에서 시인은 숨을 죽인다. 그렇게 왔던 꽃들이 일천강의 달로 뜨는 이치임을 꽃 지는 아침에 숭엄하다. 세상의 이치가 모두 왔던 자리로 돌아가는 회귀본능回歸本能의 순리인 것을 알면서도 절감한다. 시가 이렇게 맑고 투명할 수가 있을까, 시인의 심성이 글에 물든 것 같다. 식물성 언어가 몸 속 혈맥으로 돌고 있다. 야생화와 전원을 사랑하는 헤르만 헷세의 정신이 이역만리 청정 강원도 이충희 시인한테까지 그 피가 흐르고 있다.

조지훈 시인이 시는 ‘시인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했듯이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원초적 이미지인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자연은 장황스런 설명 없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보여준다. 물가나 산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보는 순간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특히 은비령, 곰배령, 왕산리 강릉의 굽이진 산길, 인제 진동계곡 안목 죽도봉 등 무공해 청정지역 바람 냄새 풀 냄새 날리는 들꽃들을 시로 형상화 했다. 시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서의 감상이 아니라 직관으로 다가오는 전체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의 본모습을 깨닫도록 해준다. 모든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무런 꾸밈이나 기교 없이 명징하게 생명의 참모습들과 현상들, 더 나아가서는 그 생명의 아름다운 속내와 본질을 알려주기도 한다.




3. 정신의 구원과 깨달음이 된 詩들



이충희 시인은 생각하며 행동하는 분이다. 식물성 언어로 그린 야생화 시들을 살펴봤듯이 글 속에는 항상 성찰하는 삶이 시인의 내면에 산소처럼 스며 있다. 그러한 삶 속에 정신의 구원을 받고 살아가는 이치를 발견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가 위로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에서 이충희 시인의 인간적인 모습을 느끼게 된다. 그 예로 시인의 삶에 버팀목이 되고 정신의 구원이 된 시詩와 불교를 주제로 한 신앙 시詩, 그리고 원형질 이미지인 모성회귀母性回歸, 즉 어머니에 대해서 쓴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 연애하듯 詩를 통해 만나는 自我

이충희 시인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간 많은 시들은 신앙이고 애인이고 자아이며 꼿꼿한 자존심이다. 또한 흐르는 물처럼 소용돌이 치는 대로 흐르는 물 위에 시인의 마음을 얹어 거침없이 시를 써 내려간 것이 특징이다. 시인이 주술처럼 마음속 시를 불러내는 순간은 시와 영혼이 합일하듯 접신接神의 경지에 드는 순간이다.



무슨 주술처럼


너를 불러내면


시공을 가로질러


숨소리 없이 오는 너를


가시를


오! 詩여!


― 「雅歌4 -詩」 전문




서창으로 바람결 겨운 하오

풀여치 가락 따라 들어온

보송보송한 햇볕에

오랜만에 탈고한

詩 한편을 널어놓았더니

마득찮던 행간에서

신통하게도 톡톡 새움 트듯

詩語가 돋아나

모자란 필력을 일으켜 세우는


처서 지난 이튿날


― 「하 맑아라」 전문



이충희 시인에게 詩는 운명의 타래다. 그런 운명의 밧줄에 꽁꽁 묶이면서 즐기는 구원의 타래가 ‘오! 시詩’인 것을 그래도 생명이고 숨통이 트임을 느끼게 한다.

이충희 시인한테 시 창작은 삶의 성찰이고 정신의 구원 역할을 해왔다. 육신을 살찌우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 밥이고 음식이라면 영혼의 풍요와 정신을 구원하는 도구는 시와 신앙이다. 그 중 「하 맑아라」 시는 순수한 영혼과 맑은 심성을 소유한 이충희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풀여치 가락 따라 들어온 / 보송보송한 햇볕에” 탈고한 詩 한 편을 널어놓고 행간에서 새움 트듯 詩語가 돋아나는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는 시인을 본다. 하 맑은 눈부심으로 詩人과 詩가 일체 되는 경쾌한 모습이다.



내 시詩 너는 첫사랑이다 입 속 개운한 박하 향 첫사랑이다 내 시詩 너를 두고 상사병으로 몸져눕는 일도 이골이 나 사나흘 열꽃 피다 수그러들고 주치의도 거들도 보지 않는다 내 시詩 너는 기둥서방이다 아니다 정부情夫다 내 처녀를 바치고 내 숫총각을 딱지 떼고 내 눈물로 너를 세례하고 정화하고 맹신하고 그래 내 임종을 지켜 줄 오직 한사람 정인情人이다 석 달 열흘 꺼이꺼이 울어줄 곡비哭婢다 암수가 공존하는 단세포 아메바다 무의식계無意識界다 내 시詩 조강지처 굽은 허리로 조석을 끓여주는 늙은 마누라다 내 반쪽이다 그리움이 온갖 이름으로 둔갑하고 나서도 귀신 같이 알아채는 내 시詩 언제 어디서고 너를 불러내면 발밑에 당도하는 충직한 충직한 가신家臣이다 스물네 시간 깨어 있는 휴대 전화기다 내 침상을 지켜주는 늙은 내 몸을 연민으로 쓰다듬는 내 시詩 치사하다 감언이설로 너를 홀려 감금하고 가학해도 천연스레 웃는 번연히 알면서도 번번이 속아주는 내 시詩 너는 머저리다 젊은 날 비릿하던 내 새피즙까지도 수용하던 내 배필 천생연분 내 시詩 그런가 나를 떠나 천리만리 달아나 천둥벌거숭이로 헤매다가도 슬그머니 내 치마폭에 안기는 것 보면 너는 나를 단단히 고삐 매고 그래 맞다 결국 나를 원격 조정하는 리모컨이다 내 시詩 이쯤에서 나는 기진하고 어떻다 변명할 말도 못 찾고 국어대사전을 몇 번 훑어도 못 찾고 이슥하다 뭘 더 숨기라 고백이다 내 시詩여 암만해도 나는 너를 지독히 지독히 은혜 하나보다 너를 향한 내 간절함은 지나쳐 시름시름 몸 상하고 마음도 허해 뼈아픈 내 헌가獻歌도 듣는 이 없고 적막하다.


― 「내 시詩에 대한 뼈아픈 헌가」 전문



시에게 바치는 뼈아픈 노래 시를 분신 이상의 절절한 관계로 묘사한 헌가다. 제목부터 독자들의 정신을 후려치듯 시에 홀리게 한다. 늘 점잖고 조신하던 이충희 시인이 열정적이며 격양된 언어로 써 내려간 시에 대한 뼈 아픈 헌가 앞에 독자들은 문득 화상을 입는다. 첫사랑이다 기둥서방이고 정부情夫였다가 임종을 지켜 주는 정인이고 곡비다. 늙은 마누라였다가 충직한 가신家臣이다, 휴대 전화기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너는 머저리고 원격 조정하는 리모컨이다. 시를 사랑하여 적막한 현실 앞에서 뼈아픈 헌가를 짓다가 몸과 마음이 허해 외골수 사랑 앞에 굴복하고 만다.



내가 내게 물었다



시詩 한 송이를 받겠느냐

꽃 백 송이를 받겠느냐

나는 토 달지 않고

시詩 한 송이라 했다


길을 막고 물어 봐라

누가 읽지도 않는 시시한 시詩를 받겠느냐

향그롭고 고운 꽃을

그러네 그러나 안을 열고 들어서면

시詩는 새록새록 돋아나 숲을 이루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은 시들어 바스러지나니

아니네, 그도 저도 아니네

시詩는 시詩의 마음이 눈물이고

꽃은 꽃의 마음이 눈물이네

본래무량本來無量이네

무얼 어떻다 비기는 것 부질없네

그냥 조금 헛헛했을 뿐이네.


― 「시詩와 꽃의 변주」 전문




시인은 정신의 구원이 된 시를 꽃 백 송이 무게를 달아본다. 시와 꽃을 향기로 비하면 어느 쪽이 더 그윽할까? 내가 내게 물은 “시詩 한 송이를 받겠느냐 / 꽃 백 송이를 받겠느냐” 이충희 시인이 아니면 아무도 못 하는 기가 막힌 질문이다. 문득 답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시 한 송이가 꽃 백 송이 보다 낫다고 하며 삶을 일깨우다가도 “시詩는 새록새록 돋아나 숲을 이루고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은 시들어 바스러지나니” 했다가 시인은 자문자답으로 최상의 답을 한다. “詩는 詩의 마음이 눈물이고 / 꽃은 꽃의 마음이 눈물이네” 하며 정확한 결론을 내린다. 시와 꽃 그 모두 무량無量이라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시와 꽃 백 송이를 비기는 것은 부질없는 일 즉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있고 없음이 한 빛깔임을 결론으로 맺는다. 그런 질문조차 조금은 무의미를 초월한 듯 마무리 짓는다.



뻐꾸기 울음도 아카시아 꽃내도 물빛이 되는 오월

장호리 봄바다는 너무 잔잔해 바다 아닌 듯싶구나

하는 대목만 새록새록 떠오르고 십칠 년이나 지났는

데도 도무지 詩로 쓸 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요


생미역 퍼들퍼들한 줄기 입안 가득 베어 문 듯 목에

차올라 답답하기 그지없어도 詩로 나토지 못해요

한 해도 몇 번씩 그 갈피를 뒤져 詩로 내세우려고

이리저리 재고 재봐도 내 필력으로는 당초 턱없는

일이어요 그래요 오월 그 기막힌 장호리 봄바다는

아무래도 그냥 둬야 할까 봐요


― 「詩로 쓰지 못한 오월 장호리 봄바다」 전문



<상략>

더디 새살 돋게 하시고

통증으로 내 안의 부정을 몰아내게 하십시오

수 삼 년 종문 소식이었던 친정 오라비

인편에 보낸 연필 자국 선연한 안부 편지 받은 듯

그런 흥건한 느낌으로 청결케 하십시오

살아있음에 저릿저릿 느끼는 이 오롯한 감동

한동안 네 안에 물결치도록 눈감아주시고

지상 어딘가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여겨도 좋을

시詩나무 한 그루 사무치게 당당하다 그리 믿게 하시고

그 그늘바다를 덮는다 여기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나의 하느님!


―「시詩나무 한 그루」 중에서



삼척 근덕면 장호리 봄바다 십칠 년이나 바라봤는데 도무지 시로서 표현할 수 없는 일 앞에 무슨 조화인지 시인은 의구심이 난다. 차마 시로 표현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듯 쓰지 못한다. “생미역 퍼들퍼들한 줄기 입 안 가득 베어 문득 목에 / 차올라 답답하기 그지없어도 詩로 나토지 못해요”바다를 한 움큼 입에 넣듯이 퍼들거리는 입 안 가득 생미역을 넣어도 시는 떠오르질 않는다. 장호리 봄바다를 시로 쓰려고 해마다 몇 번씩 갈피를 뒤져도 시로 내세울 순 없다는 시인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수많은 어휘들이 있지만 시로서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결국 장호리 봄 바다는 시로 쓰지 않고 내버려 두기로 했으면서도 시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쓰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장호리 봄 바다에 대한 모순된 시 즉 아이러니컬한 시를 이충희 시인은 쓰고 말았다.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행에 있어 역설적 표현에 있다.

일흔일곱 생신 때 시인은 가슴으로 찍은 시집을 받고 통증을 느낀다. 시를 읽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오롯한 감동에 젖어 행복해한다. 삶의 버팀목인 시 나무 한 그루가 당당하게 자라 시인의 삶을 떠받들고 그늘을 덮도록 허락해주었다. 또 다른 자아인 시 나무는 구원의 나무이고 나의 하느님으로 귀착이 된다.



- 기원祈願의 삶과 성찰, 그리고 경배敬拜

살다가 보면 누구나 간절한 기원이나 삶을 거듭나고자 할 때 절대자한테 의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보니 사람들은 정신의 구원과 기원의 성취를 위해 신앙의 힘을 빌리게 된다. 힘들 때 절대자한테 의지하며 위로 받으며 치유하게 되고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이충희 시인의 불교에 심취하여 쓴 깊고 그윽한 시를 읽을 때마다 촛불 켜고 예를 갖추어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부처님을 경배하고 불심 가득한 이충희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향香냄새가 온몸을 싸고도는 듯하다. 그윽한 시를 공유하는 독자들도 공감대를 갖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충희 시인은 승복만 안 입었을 뿐 정신적 세계는 이미 승僧이나 다름없다.




가을 산 適所에 들어

나무의 눈(目)으로 나무를 보니

前生에 나무였던 내가

가을 나무로 서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저 깨끗한 완 전 연 소

無心


― 「適所에 들다- 가을나무」 전문



한 폭의 스냅 사진이다. 일필휘지 붓질 한 번으로 그린 가을 수채화다. 자세히 읽어보니 불심佛心 가득한 탱화다. 시인은 이승에서 전생의 자신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前生에 나무였던 내가 가을 나무로 서서 / 활활 불타고 있었다 // 저 깨끗한 완 전 연 소 / 無心” 이 시를 읽으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전생의 나무였던 시인이 이승에서 불타는 단풍나무로 환생한 윤회의 삶 속에서 까마득 잊혀졌던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시 구절마다 촌철살인 사리 같은 시어가 반짝인다. 7행의 짧은 시가 한 권의 경전이듯 법문 가득하다. ‘無心’ 끝내 자신을 태우고 마는 영혼의 승화와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독자들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른 새벽 대중목욕탕

비구니 스님 한 분

고요히 눈감고 가부좌로 계시네


나도 몸을 담군다

물살로 건너온 청정 산내 스미는 듯

이내 이쪽도 고요롭다


조심스리 등을 밀어드렸더니

한사코 마다는 내 등을 밀어주신다


스님 제 겉때 말고 속때 좀 밀어주셔요

전생에 업장이 너무 깊어서 했더니

알고 있으면 반은 벗긴 셈이라시며

물안개로 답하시네


그런가 반은 벗긴 셈이라고 반은

그 반의 무게가 다른 이의

온전한 무게보다 더할는지 모르지


그 생각에 이르러

속절없이 갇혔네


― 「한 생각에 이르러」 전문



어서 나오세요!!!


마지막 예禮까지 마다하신


관도 수의도 만장도 조사도 없이


내가 어떻게 가나 보라시던 말씀 따라


무소유의 간결한 법어法語를 놓고 가신 스님!


나오시란다고 나오실 리 만무하지만


너무 안타깝고 너무 송구해 도리 없어


빌미로 외친 절규라는 걸 아셨을까


스님,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세요!!!


이도 결국 이승의 위안이었네


스님, 그래도 어서 나오세요!!!


― 「스님, 불 들어갑니다」 전문



“물살로 건너온 청정 산내 스미는 듯 / 이내 이쪽도 고요롭다” 시인은 고요의 극치 목욕탕 뜨거운 물 속에서도 물살로 건너오는 스님의 청청산내를 느끼는 걸 보면 시인도 이미 승僧의 경지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 후각적 이미지로 표현되었으며 인간이 지닌 야누스적인 양면을 보게 된다. 시인은 자신을 겉은 보살이지만 속은 탐진치貪瞋痴 본능에 사로잡힌 속인俗人이고 전생업이 많다고 한다. 이미 시인은 깨달음의 경지에 들었다. 스님 말씀이 마음의 때가 있는 줄 알고 있으면 반은 벗긴 셈이라시며 물안개로 답한다고 하는 시인의 표현이 이미 목욕탕이 절간이고 불가佛家다. 스님과 이충희 시인의 대화가 깨끗한 선문선답禪問禪答이고 초월의 극치이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을 보며 불에서 나오시길 간곡히 바라며 외치는 이충희 시인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세요!!!” 아이러니컬한 역설이 더 절절하다 못 나오고 불가능한 일인 줄 번연히 알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다. 생명이 영원하길 바라며 잠깐이라도 생의 순간을 잡아 두고 싶은 마음일 게다. 이미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져서 극락세계에 드신 스님을 나오라고 외치지만 시인은 육신의 옷을 벗고 훨훨 날갯짓 하며 떠나는 스님의 영혼 앞에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한 생각에 이르러」는 물의 세계에서 여승으로 환생한 부처를 만나고 「스님, 불 들어갑니다」 스님의 다비식인 불의 세계에서 부처님을 친견한다. 시인은 물과 불에서 죽음과 삶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느끼게 된다.



혹시

혹여

나 죽어 환생한다면

오대산

깊숙한 산자락

나무이고 싶네

상원사 새벽 종소리

법문으로 듣는

나무이고 싶네.


― 「나무」 전문




울울 창창 전나무

몸통 안에

夏安居에 든

비구니 암자 六手庵

마가렛 흰 꽃

푸른 이끼

묵언 중


저만큼 山門을 벗어나니


왔다 가시는가 묻는다

오대산 뻐꾸기가


― 「六手庵」 전문



부처님 / 오늘 나는 봄비 맞으며 / 오대산 적멸보궁 부처님 앞에 왔습니다.

<중략> / 눈물로 백팔 배 올리고 우러르니 / 부처님은 아니 계시고 / 어디선가

그래 두고 가거라 / 자비롭기 그지없는 미소로 / 허락하신 부처님 봄비가

나슬나슬한 눈발 / 로 날립니다. // 참 아름답습니다


― 「참 아름다운 부처님」 전문



오십 줄의 제자 수녀님도 백발의 스승도 맑은 눈물 <중략> // 지난 밤 꿈에 스님 스쳐 가시더니 / 수녀님 월정사서 점심 공양 드시고 / 여기 커피 명소 보헤미안에 들어 망중한이셨다네요 // 새벽꿈 한 자락도 어찌 허투루 무관타하겠는지요.


― 「더없이 맑은 어느 날」 중에



시 「나무」, 「六手庵」, 「참 아름다운 부처님」, 「더없이 맑은 어느 날」 네 편의 시는 배경이 모두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다. 이충희 시인은 죽으면 오대산 상원사 종소리 법문으로 듣는 나무로 환생하길 간절히 소원했다. 2021년 2월 9일에 작고하시고 왕산 ‘록유사’에서 49제를 지내신 이충희 시인은 극락왕생極樂往生하셨으리라 믿는다. 「나무」 하안거에 든 적멸의 세계인 고요한 비구니 암자 「六手庵」이다. 한 바퀴 돌고 나오자 부처로 환생한 뻐꾸기가 문득 한마디 건넨다. 선禪의 세계다. 「참 아름다운 부처님」에서는 오대산 적멸보궁 부처님 앞에 왔다. 하지만 “눈물로 백팔배 올리고 우러르니 / 부처님은 아니 계시고 / <중략> 그래 두고 가거라 / 자비롭기 그지없는 미소로 / 허락하신 부처님”을 생각한다. 부처님은 안 계셔도 우주 같으신 부처님을 친견하고 벅찬 마음에 시인은 감개무량해 한다.

오대산 부처님을 사랑하는 시인이 쓴 네 편 시의 주제가 모두 ‘상원사’와 전나무 우렁찬 월정사 암자인 ‘六手庵’과 ‘적멸보궁’이 등장한다. 시인이 조용히 자신과 마주하며 영혼의 구원을 소망하며 참배에 든 잔잔한 모습이 실루엣으로 스친다.



<상략> 뽀족하던 모서리도 둥그스럼하게 닳고 / 어지러이 괴던 거품도 삭아

말갛게 가라앉는다. / 한 천 번 쓰다듬고 나면 / 흐르고 흘러 / 무상무념 그런

<중략> 어줍잖은 내 참선은 / 결국 길을 잃고 / 몸만 버리고 / 다시 속인으로 간다


― 「어떤 참선」 중에서




금수산 절벽 아래 매달린 듯 계시다

<중략>

정방사 자드락 길 따라 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세상에서 제일로 맑은 뒷간

정방사 해우소에 볼일 안 계셔도

뒷내도 향그롭다는 걸

몸으로 만나 보시고

수채화 한 폭 덤으로 받아 가시는

인연 계시면 참 그윽하겠습니다.


― 「 정방사 해우소 」 중에서



수행은 뽀족한 모서리가 둥글어지도록 나를 다스리는 일일 게다. 시인은 인간 세상에서 마음 다쳐 본능대로 움직이다가 참선을 하며 마음속 앙금을 가라앉히며 일체 무아지경에 든다. 「어떤 참선」 중에서 “뽀족하던 모서리도 둥그스럼하게 닳고 / 어지러이 괴던 거품도 삭아 / 말갛게 가라앉는다. <중략> 어줍잖은 내 참선은 / 결국 길을 잃고 / 몸만 버리고 / 다시 속인으로 간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禪의 세계에 들다가도 길을 잃은 듯 어쩔 수 없이 다시 속인으로 돌아가 희노애락의 세계인 속세의 인간이길 자처한다.

또한 「정방사 해우소에서」 시인의 눈빛은 일상에서 고정 관념을 이미 뛰어넘었다. 해우소를 시의 소재로 선택하심과 “볼일 보신 분 아시겠지만 / 뒷 내도 곰삭아 어찌나 순하던지요 / 전혀 그래요 전혀 / 역하지 않은 도리어 흠흠 맡고 싶은 뒷내라니요” 역한 해우소 냄새를 반어법으로 곰삭아 순하고 맡고 싶은 냄새라고 표현했다. 뒷간의 냄새를 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없다. 역발상이 시인의 재치다. 누구든 뒷간 냄새를 싫어하는데 향그럽다는 시인이 역설에 놀랍다. 절간의 해우소라 통달한 것 같다. 그러면 배설하면서 창틀에 걸린 진경산수인 수채화에 매료되어 감상하는 멋스러움의 경지에 들다. 속인의 경지를 뛰어넘은 이충희 시인은 이미 부처의 경지에 든 듯 금수산 절벽의 정방사 한 폭의 그림 속 보살이다.



노보살님 친구분 영전에 절하시는 모습

서너 살 적 아이 그 모습이네


사뿐사뿐 백팔 배 올리시던 지성의 공덕 쌓여

천 근의 무게로 삼 배 올리시는 저 장중함이라니

천진의 모습으로 회향하시는 절 지켜보면서

내 모습 거기 계심을 예견하는

절 한 채, 합장으로 받아 건다.


― 「절 排」 중에서



절은 경배의 상징이고 존엄의 처소라서 그런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시를 읽으니 숙연해진다. 친구의 49제에 불편한 몸으로 장중하게 절하시는 노보살님 모습에 이충희 시인은 혼연일체에 든다. “백팔 배 올리시던 지성의 공덕 쌓여 / 천근의 무게로 삼 배 올리시는 저 장중함이라니” 예사롭지 않은 노보살의 지극한 정성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시인은 훗날 자신의 모습을 예견하며 합장으로 정중히 절한 채를 받는 모습이 숭엄하다.



- 모성회귀母性回歸와 무의식無意識의 세계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본능적으로 모성회귀를 갖게 된다. 이충희 시인도 엄마가 되고 보니 어렵게 살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문득 떠오른다. 태胎를 함께 나눈 어머니야말로 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잠재적인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모성에 대한 그리움은 절절하다. 탯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질긴 끈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신神은 모든 곳에 신을 둘 수가 없어 어머니를 세상에 보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머니란 자식이 어둠에 갇혀 밖을 볼 수 없을 때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내 어머니 책 사게 돈 달라 조르면

꼬치꼬치 물은 끝에

치마 걷어붙이고 고쟁이 오른 쪽 주머니

옷핀 빼 입에 물고

꼬깃꼬깃 접은 지전 한 장 펴서

아껴 써라 신신당부 한 말씀 얹어

자애로 내 손에 건네주시더니

오늘 별 밝은 날 잡아

몇 년 벼르던 장 속 정리 숙제하듯 하던 참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고쟁이 찾아들고

누렇게 바랜 어머니의 현금 출납고를

찾아들고 아득했네 50년대 그 가난했던 시절이 걸어 나와

넘고처진 오늘 이 풍요를 때려눕히고

풀 먹인 속곳 빳빳한 서슬로

쓸쓸한 내 허기를 달래고 있었네.


― 「고쟁이」 전문



위의 「고쟁이」 시는 수십 년 전 무의식無意識의 세계를 건져 올린 작품이다. 의식 바깥에 있던 경험이 어떤 대상과 직면했을 때 심연 깊숙이 잠재해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현상이다.

몇 년을 벼르다가 숙제하듯 장롱을 정리하다가 장롱 서랍 구석에서 어머니의 빛바랜 현금 출납고 고쟁이를 찾아들고 가난하던 시절 50년대를 기억한다. 시인이 책 사게 돈 달라 조르면 치마 걷어붙이고 고쟁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옷핀을 빼서 입에 물고 꼬깃꼬깃 접은 지전 한 장을 펴서 아껴 써라 신신 당부 한 말씀 얹어 건네주시던 손이 생각나 시인은 그만 까무룩해진다. 그러다가 빳빳한 풀 먹인 속곳을 보며 시인은 쓸쓸한 허기를 달랜다. 요즘 어머니들은 디자인이 다양하고 세련된 지갑 속에서 돈을 꺼내 주지만 50년 60년대 또는 그 이전의 어머니들은 고쟁이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자식들에게 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 했으리라 절절히 공감대가 가는 대목이다. 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의 ‘고쟁이’에서 까마득한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 올려 형상화 시킨 작품이다.



설거지통에 밥그릇 밀어 넣고

전에 붙은 밥풀 못 본 채 돌아서다

다시 꺼내 뜯어 입에 넣으며

쉰 보리밥 몇 번이나 헹궈 폭폭 끓여 자시던

내 어머니 목에 걸려 한 톨 밥풀에 넘어진다

걱정스러워 만류하자면 끄덕없다

<중략>

꿀꺽 소리에 소스라치던 허기졌던

피난 시절 기억하는가

짤래줄 바지랑대 곁 배 보자기에 싸여 대롱대롱 매달려

풀여치 울음 밤이슬 촉촉이 젖어 주무시던

아이 삶은 보리쌀 어디 계시는가

달빛 한 가닥 얹혀 주무시는 날은

모깃불 연기도 성가시지 않던 아련함이라니

밥풀 한 알 피톨에 스며들어 나를 댑히는 공덕

여든여덟의 손끝이 닿은 어머니의 경전이다.


― 「밥풀에 결려 넘어지다」 전문



「밥풀에 결려 넘어지다」 이 작품도 「고쟁이」 시와 마찬가지로 절절한 사모곡思母曲이다. 설거지통 밥그릇 전에 붙은 밥풀을 못 본 체하고 돌아 서다가 다시 뜯어 입에 넣으며 까마득 기억 저편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문득 50년대 그 가난을 견뎠으니 밥풀 한 톨인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쉰 보리밥 몇 번이나 헹궈 폭폭 끓여 자시던 / 내 어머니 목에 걸려 한 톨 밥풀에 넘어 진다”라는 구절이 한평생 가난하게 살으셨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다. 보릿고개 가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시다. “어찌 밥을 버리시냐며 대경실색 하시던 / 죄 받는다며 손사래 치시던 어머니 그리운 / 감자 다진 밀기울 버무리 몰래 삼키다 / 꿀꺽 소리에 소스라치던 허기졌던 / 피난 시절 기억하는가.”가난하던 시절 시인에게 삶의 이치를 가르쳐 주신 밥풀 한 톨이 “여든여덟의 손끝이 어머니의 경전”이라고 시인은 표현한다. 「밥풀에 걸려 넘어지다」와 「고쟁이」 작품은 시인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하고 계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무의식 세계에 두레박을 내려서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걸작이다.



살기름 타는 냄새 역한

화장실 爐 앞에서 茫然自失

흰 수의 뼈를 감싼 살 흔적 없고

바스라질 듯싶은 뼈

저 손목으로 나를 키우셨고

저 발목으로 나를 찾아오셨던가.

아닐려나

마지막 기름 불꽃 世俗의 緣에 엉켜 가시덤불

살아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쇠절구에 쿵쿵 소리 나던 어머님 이승은

몇 움큼의 뼛가루 그게 고작.

<중략>

석 스님의 금강경 독경 소리만 쩌렁쩌렁

살아있고

굴뚝의 가느다란 연기로 육신이 풀리나니.

佛生의 茶毘 인 듯도 싶지만

덧없음이 이에 더 할까.

正月 초사흘 매운 눈바람 속에서도

살기름 타는 냄새는 역했다.

너무 역해 정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랬구나, 정을 때려 냄새를 주셨구나.

가엾는 나의 어머님

이승이 살얼음 강은 어머님 당신이

더 머물 곳이 아니올시다.

부디 往生極樂 하옵소서

極樂往生 하옵소서.


― 「達芳里 화장터에서」 중에서



五分거리 누옥에 병풍으로 바람 가리고

정히 앉아 讀經하시던 어머님.

아니면 앞마당에서 꽃 가꾸시던 어머님

<중략>

혼연히 잠드신 고운 모습

어머님 그 잠은 어찌 그리도 깊사옵니까.

<중략>

어버이날 아침에 문득이는 봉한의 바람

不孝를 뉘우치며. 가슴을 치며

<중략>

흰 카네이션 흰 강물로 웁니다.

正月 초사흘 그 중 깨끗한 해송 밭에 뼈를 뿌리며

당신의 유언대로 뼈를 뿌리며

눈물 함께 뿌리며

돌아서던 발자국 천근의 무게

五月 훈풍 속에서 선듯선듯 만나는 찬 바닷바람

어머님 당신과의 前生의 緣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었기에

어버이날 푸른 아침에

매운 연기로 아득해야 합니까

不孝를 뉘우치며 가슴을 치며

<중략>

당신의 靈駕앞에 삼가 흰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 「어버이날 저승의 어머님께」 중에서



「達芳里 화장터에서」와 「어버이날 저승의 어머님께」 올리는 시는 시인의 피맺힌 통곡이다. 「達芳里 화장터에서」는 ‘살기름 타는 냄새 역한’ 어머니 시신을 화장하는 화장실 爐 앞에서 地水火風이 되어 돌아가시는 어머니 모습에서 시인은 망연자실 한다. 어머니는 딸하고 정을 때려고 하셨다며 역한 살기름 냄새를 보내셨다고 했다. 어미와 딸로 이승의 인연을 하직한다. “뼈를 감싼 살 흔적 없고 / 바스라 질 듯 싶은 뼈” 앞에서 저 손목으로 자신을 키우셨고 / 저 발목으로 자신을 찾아 오셨던가하고 통곡한다. “마지막 기름불꽃 世俗의 緣에 엉켜 가시덤불 / 살아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 쇠절구에 쿵쿵 소리 나던 어머님 이승은 / 몇 움큼의 뼛가루 그게 고작” 삶이 뼛가루 몇 움큼 밖에 안 되는 허무함을 절감한다. 하지만 어머님 육신은 정월 초사흘 매운 연기로 풀리고 영혼은 스님의 금강경 독경 소리 들으시며 극락왕생을 기원해드리는 간절한 딸의 모습이다.

「어버이날 저승의 어머님께」 붉은 카네이션을 상징했던 어머님이 흰 카네이션으로 바뀌었다. 어머님의 빈자리에서 시인은 세상이 텅 빈 듯하다. “흰카네이션 흰 강물로 웁니다. / 正月 초사흘 그 중 깨끗한 해송 밭에 뼈를 뿌리며 / 당신의 유언대로 뼈를 뿌리며 / 눈물 함께 뿌리며’ 어머니를 보내던 날을 기억하며 가슴이 으깨어진다. 불효막심 매운 연기로 아득한 어버이 날 푸른 아침에 시인은 어머님 영가 앞에 흰 카네이션을 바치며 가슴을 친다. 가슴에 화인火印으로 박힌 어머니의 사랑과 모성성은 神의 사랑과 맞먹는 아가페 사랑임을 이충희 시인은 어머님을 떠나보낸 후 절실히 느낀다.




4. 나가는 말



과학과 수학은 정확한 정의를 찾아내는 학문이고 문학과 예술은 다양성의 미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마음의 거울인 시 창작은 인간의 삶과 필수적으로 연관이 된다. 우주와 인생 그 모두를 마음의 눈으로 비쳐내는 것이 시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책 한 권을 쓰느니 보다 하나의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게 낫다라고 했다.

이충희 시인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간 시들은 신앙이고 애인이고 꼿꼿한 자존심이다. 또한 흐르는 물 위에 마음을 얹어 주술하듯 써 내려 간 기법이 시작법에 있어 특징이다. 마치 영혼이 합일하듯 시인의 마음과 시와 만나는 순간은 접신接神의 경지에 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충희 시인의 시집 『가을 회신』, 『겨울 강릉행』, 『이순의 달빛』, 『청축』과 『갈뫼』 2012년 이후부터 2019년까지 발표된 시 중에 야생화와 정신의 구원이 되는 시들을 살펴보았다.

먼저 야생화를 주제로 쓴 시들은 한 권의 식물도감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이충희 시인은 깊은 산 속이나 들길에 혼자 피었다가 지는 꽃들을 소재로 한 식물성 언어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시를 썼다. 조지훈 시인이 ‘시는 시인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했듯이 시인은 물가나 산속에 피어 있는 야생화들을 보는 순간 불꽃 같은 영감을 받게 된다. 강원도 산골짝 청정지역의 바람 냄새 가득한 들꽃들을 시로 탄생시켰다.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이 바로 자연임을 다시 한 번 각인 시키게 한다.

살다가보면 누구나 간절한 기원이나 삶을 거듭나고자 할 때 절대자한테 의지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정신의 구원과 기원의 성취를 위해 신앙의 힘을 빌리게 된 다. 힘들 때 위로 받으며 치유를 위해 자아를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이충희 시인에게 성찰하는 삶이 내면에 산소처럼 스며 있어 정신의 구원과 깨달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모습에서 이충희 시인의 인간적인 모습을 새삼 느끼게 된다. 시인한테 삶의 버팀목이 되고 정신의 구원과 깨달음을 주는 시적대상은 자신의 시와 불교, 그리고 어머니에 관해서 쓴 시들이 숭고하듯 가슴에 와 닿는다.

이충희 시인에게 詩는 운명의 타래다. 그런 시의 밧줄에 꽁꽁 묶이면서도 그걸 즐기는 구원의 타래가 ‘오! 시詩’인 것을 그것은 생명이고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시를 창작하는 일은 삶의 성찰이고 정신의 구원 역할을 해왔다. 늘 점잖고 조신한 이충희 시인이 열정적이며 격양된 언어로 써 내려간 「시의 헌가」에서는 시인이의 적막한 현실 앞에서 뼈아픈 헌가를 짓다가 몸과 마음이 허한 외골수 사랑 앞에 굴복하고 만다.

또한 불심 가득한 시인이 부처님을 경배드리며 쓴 시에는 향냄새가 온 몸을 싸고돌 듯하여 시인의 시를 읽을 때는 촛불 켜고 예를 갖추어야만 할 것 같다. 시와 불교는 이충희 시인에게 정신적인 구원의 세계이고 삶의 버팀목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본능적으로 모성회귀를 꿈꾸게 된다. 이충희 시인은 어렵게 살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태胎를 함께 나눈 어머니야 말로 마음속 깊숙이 잠재적인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탯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질긴 끈이다. 「達芳里 화장터에서」와 「고쟁이」에서 가슴에 화인火印으로 박힌 어머니의 사랑과 모성성은 아가페적 사랑임을 시인은 어머님을 떠나보낸 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상으로 이충희 시인의 시에 나타난 야생화와 정신의 구원을 주제로 쓴 시와 불교 그리고 모성 회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속초 <갈뫼> 모임이나 행사에 오실 때는 늘 회원들에게 밥을 사주셨다. 어머니처럼 자애로우시고 회원들 손을 한 사람씩 따뜻이 잡아 주시던 누나인 듯 큰 언니 같으신 선생님이 떠나셨다. 윤홍렬 회장님, 박명자 선생님, 이충희 선생님마저 안 계신 빈자리가 너무나 황량하고 막막하다. 작년 11월 6일 춘천 강원 여성문학 출판 기념행사에 다녀오면서 함께 차를 타고 왔다. 양양쯤 왔을 때 이충희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미시령이 보고 싶다고 하시기에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유지숙 시인과 꼭 단풍이 절정인 미시령을 보러 오시라고 당부를 드렸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고 지병이 악화되어 끝내 오시지 못하고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다. 그때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언젠가는 미시령을 꼭 구경 시켜 드려야지 했는데 작고 소식을 듣고 실천하지 못한 약속 때문에 가슴이 저리다. 이충희 선생님 극락왕생 하심을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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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정 남

· 1987년 《시와 의식》 등단. 2015년 《현대수필》 등단

· 시집으로 『속초바람』 외 4권, 수필집 『겨울비선대에서』 출간

· 전영택문학상 외 다수 수상

· 한국문인협회, 강원문인협회, 속초문인협회, 설악문우회 회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