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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2021년 [이충희 시인 추모특집] 대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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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1,765회 작성일 21-12-1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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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산꼬리 풀꽃



긴산꼬리 풀꽃


오늘 나는 사단 났다


집에 가기 틀렸다


어찌 저 미색을 내친단 말인가


곰배령 초입

긴산꼬리풀

연연한 꽃빛에 홀려

산안개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애라 모르겠다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기로서니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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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리. 3

― 찔레꽃 때 쓴 엽서



아우님, 아무래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은

아닙니다

왕산리 꼴짜기엔 무더기 무더기로

막무가내로 하이얀 찔레꽃이 피어

온 골짜기가 찔레꽃 향기로 눈이 부십니다

옷자락에도 발치에도 젖가슴께도

찔레꽃 내가 찰랑찰랑 넘쳐

샤넬 넘버 어쩌구 저쩌구 한다면

정말 아니올시다입니다

혹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꽃잎 끝에 아닌 듯 찍힌 핏기

그걸 보면 붉게 핀다는 노랫말도

마냥 어거지는 아닌 듯싶습니다만

그래도 찔레꽃은 희게 핍니다

지난밤 당신 꿈이 어지간하시거든

왕산리 찔레꽃 보러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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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한 모의 유추



새벽시장에서 두부 한 모 더 사

대문 밑으로 밀어 넣고 오고 싶은

그 마음 건너와

채송화 꽃이 피었다


이쁘기도 해라

베개 모에 수놓인 꽃들이

피어올라 꽃 세상일 적에

이런 호사 몇 겁의 인연이였을까를


살면서 받은 위안 흘리며 지낸 일

뒤적여 뉘우치는 노년의 한가가

법구경 같기도 한 이런 무욕을


마음이 건너와 양식이 되는 이치를

골똘히 궁리한다

그만 나도

꽃으로 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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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맑아라



서창으로 바람결 겨운 하오

풀여치 가락 따라 들어온

보송보송한 햇볕에

오랜만에 탈고한

詩 한편을 널어놓았더니

마뜩찮던 행간에서

신통하게도 톡톡 새움 트듯

詩語가 돋아나

모자란 필력을 일으켜 세우는


처서 지난 이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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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詩에 대한 뼈아픈 헌가



내 시詩 너는 첫사랑이다 입 속 개운한 박하 향 첫사랑이다 내 시詩 너를 두고 상사병으로 몸져눕는 일도 이골이 나 사나흘 열꽃 피다 수그러들고 주치의도 거들도 보지 않는다 내 시詩 너는 기둥서방이다 아니다 정부情夫다 내 처녀를 바치고 내 숫총각을 딱지 떼고 내 눈물로 너를 세례하고 정화하고 맹신하고 그래 내 임종을 지켜 줄 오직 한 사람 정인情人이다 석 달 열흘 꺼이꺼이 울어줄 곡비哭婢다 암수가 공존하는 단세포 아메바다 무의식계無意識界다 내 시詩 조강지처 굽은 허리로 조석을 끓여주는 늙은 마누라다 내 반쪽이다 그리움이 온갖 이름으로 둔갑하고 나서도 귀신 같이 알아채는 내 시詩 언제 어디서고 너를 불러내면 발밑에 당도하는 충직한 가신家臣이다 스물네 시간 깨어 있는 휴대 전화기다 내 침상을 지켜주는 늙은 내 몸을 연민으로 쓰다듬는 내 시詩 치사하다 감언이설로 너를 홀려 감금하고 가학해도 천연스레 웃는 번연히 알면서도 번번이 속아주는 내 시詩 너는 머저리다 젊은 날 비릿하던 내 새피즙까지도 수용하던 내 배필 천생연분 내 시詩 그런가 나를 떠나 천리만리 달아나 천둥벌거숭이로 헤매다가도 슬그머니 내 치마폭에 안기는 것 보면 너는 나를 단단히 고삐 매고 그래 맞다 결국 나를 원격 조정하는 리모컨이다 내 시詩 이쯤에서 나는 기진하고 어떻다 변명할 말도 못 찾고 국어대사전을 몇 번 훑어도 못 찾고 이슥하다 뭘 더 숨기라 고백이다 내 시詩여 암만해도 나는 너를 지독히 지독히 은혜 하나보다 너를 향한 내 간절함은 지나쳐 시름시름 몸 상하고 마음도 허해 뼈아픈 내 헌가獻歌도 듣는 이 없고 적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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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꽃의 변주



내가 내게 물었다


시詩 한 송이를 받겠느냐

꽃 백 송이를 받겠느냐

나는 토 달지 않고

시詩 한 송이라 했다


길을 막고 물어 봐라

누가 읽지도 않는 시시한 시詩를 받겠느냐

향그롭고 고운 꽃을

그러네 그러나 안을 열고 들어서면

시詩는 새록새록 돋아나 숲을 이루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은 시들어 바스러지나니

아니네, 그도 저도 아니네

시詩는 시詩의 마음이 눈물이고

꽃은 꽃의 마음이 눈물이네

본래무량本來無量이네

무얼 어떻다 비기는 것 부질없네

그냥 조금 헛헛했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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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에 이르러



이른 새벽 대중목욕탕

비구니 스님 한 분

고요히 눈감고 가부좌로 계시네


나도 몸을 담군다

물살로 건너온 청정 산내 스미는 듯

이내 이쪽도 고요롭다


조심스리 등을 밀어드렸더니

한사코 마다는 내 등을 밀어주신다


스님 제 겉때 말고 속때 좀 밀어주셔요

전생에 업장이 너무 깊어서 했더니

알고 있으면 반은 벗긴 셈이라시며

물안개로 답하시네


그런가 반은 벗긴 셈이라고 반은

그 반의 무게가 다른 이의

온전한 무게보다 더할는지 모르지


그 생각에 이르러

속절없이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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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쟁이



내 어머니 책 사게 돈 달라 조르면

꼬치꼬치 물은 끝에

치마 걷어붙이고 고쟁이 오른 쪽 주머니

옷핀 빼 입에 물고

꼬깃꼬깃 접은 지전 한 장 펴서

아껴 써라 신신당부 한 말씀 얹어

자애로 내 손에 건네주시더니

오늘 별 밝은 날 잡아

몇 년 벼르던 장 속 정리 숙제하듯 하던 참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고쟁이 찾아들고

누렇게 바랜 어머니의 현금 출납고를

찾아들고 아득했네 50년대 그 가난했던 시절이 걸어 나와

넘고처진 오늘 이 풍요를 때려눕히고

풀 먹인 속곳 빳빳한 서슬로

쓸쓸한 내 허기를 달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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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보로 여우비



북해도 신궁에서 일본 귀신을 곁눈질하는 내내

태풍 여파로 소낙비 오락가락 사이로

고양이를 주신으로 모신 절에 이르러 아연


시음한 한 모금 비루 탓인가

헛디딘 발치에 놓인 셀부르의 우산

치기와 치기의 기하학을 푸는 사이

곡예 하듯 빠져나간 삿보로 여우비


그래, 그런 거리쯤의 안부

가끔 아련하다면 더러 위안이라면

여우비 햇살 사이로 흠씬 쏟아져도


늘 거기 당신 젖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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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사에 길이 빛날 귀감임을 되새기며

― 갈뫼 윤홍렬 유고집 헌정에 부쳐



말문이 막힌다는 경우가

바로 이런 심정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회장님 생전 소원이셨으리라 짐작하면

절절한 송구함에 젖습니다.


오늘 회장님 1주기에 필생의 문학적 자취인 소설집

『역풍은 불어도 강물은 흐른다』와 『갈매기집』을

영전에 바치며 뜨거운 눈물에 젖습니다.

작품집 출판을 권유 드리면 미진하다시며

그토록 완벽을 추구하시던

대쪽 같은 선비 정신은 오래 회자되어

문단의 큰 족적으로 새겨 마땅하다 적습니다

와병 중임에도 퇴고를 해야신다며 출간을 미뤄 오신

작가 정신은 홍수처럼 찍어내는 오늘 우리 문단의

허접한 현실을 반성케 합니다.


오늘 갈뫼 회원 모두는 상주가 되어

회장님 생전 갈뫼에 바친 헌신적 열정과 사랑

높고 깊어 헤아릴 길 없음에 비통합니다.

갈뫼의 정신적 지주이셨던 큰 스승 빈자리가

이토록 사무치리라 짐작 못했음을 뉘우칩니다.


이승은 저승에 기대었다 믿으며

회장님 크신 음덕을 기리는 갈뫼 가족 다독여주시지

그리 믿으며 1주기를 맞아 출간한 유고집 출판기념회

저승에서도 파안대소로 반기시리라 믿습니다.


갈뫼 마흔다섯 중년의 역사를 지방 문예지 윗자리에

계시도록 대동의 산파역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아드님 윤강준 원장님의 한결같은

후원의 큰 힘 전국 어디에도 그 예가 없지 싶습니다.


서가에 회장님 유고 작품집 반듯하게 꽂아 두고

큰 스승이셨던 당신의 훈도를 새기며

글쓰기의 매운 귀감으로 가보로 쓰다듬겠습니다.

저승에 기댄 이승의 조촐한 유고집 출간 淸祝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