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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평론] 評 論 수복지구에서의 실향민 삶을 그린 ‘분단 희곡’ / 최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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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78회 작성일 22-12-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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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복지구 속초’를 소재로 한 ‘분단 희곡’


희곡 분야에서 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 곧 ‘분단 희곡’을 꼽으라 하면, 이재현의 「바꼬지」, 「포로들」, 「멀고 긴 터널」, 「적과 백」, 박조열의 「오 장군의 발톱」, 「관광지대」,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 노경식의 「달 집」, 「하늘만큼 먼 나라」, 「타인의 하늘」, 이반의 「그날 그날에」, 「아버지 바다」, 이강백의 「호머 세파라투스」, 「칠산리」, 오태영의 「통일 익스프레 스」, 「불타는 소파」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차범석의 「산불」도 ‘이념의 객관적 묘사’라는 점에서 분단 희곡의 대표작으로 분류되고 있다.

대체로 ‘분단 희곡’에서는 실향민들이 자신의 고향에 대한 강력한 그리 움을 드러내거나, 전쟁 난민으로 남한에 정착한 후 여러 수난을 겪으며 역사적 희생물로 사라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6.25 포로 문제를 외세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거나, 이념을 떠나 강력한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작품들도 다수 있으며, 리얼리티를 벗어나 이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작품들도 여럿 있다. 빨갱이라는 편견으로 겪은 설움을 형상화함으로써 획일적인 우익논리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작품도 있다. 또한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 이산가족 문제, 미군으로 대표되는 외세를 바라보는 시각의 점검, 분단 현실의 환기, 분단 상황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조롱 등이 주요 소재로 다뤄져 왔다.

‘분단 희곡’ 중 수복지구를 무대로 설정한 작품을 골라내라 하면 그 수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설령 수복지구를 무대로 했다 하더라도 그지명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일쑤여서 구체적인 장소가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가령 오태영의 「통일 익스프레스」에서는 비밀통로를 통해 ‘통일 장사꾼’들이 남북을 서로 오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품 전개상 그 무대가 ‘고성 명파리’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를 확정할 수는 없다. 또한 이해성의 「고래」에서는 속초 앞바다 정치망 그물에 걸린 북한 잠수함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수복지구를 무대로 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쑥스럽다. 등장인물들의 삶이 그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된 게 아니기 때문 이다.

그러니 수복지구를 무대로 펼쳐지는 분단 희곡으로는 극작가 이반의 작품이 거의 유일한 듯싶다. 그는 ‘수복지구 속초’를 무대로 삼아 여러 편의 ‘분단 희곡’을 집필해 왔다. 물론, 그 작품 무대는 그저 ‘동해안의 작은 어촌’이라고만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정황상 그곳이 ‘속초항’임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고, 심지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선술집의 구체적인 장소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복지구에서의 실향민 삶’을 그린 ‘분단 희곡’으로 이반의 「그날 그날에」, 「아버지 바다」 등을 꼽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더불어 최재도의 「붉은 훈장」도 수복지구에 정착한 실향민의 삶이 드러나는바, 이 글에서는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수복지구 속초’에서의 실향민 삶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극작가 이반(李盤)과 ‘수복지구 속초’


1951년 1월 4일 서울마저 중공군에게 빼앗기자 대대적인 난민 철수가 이루어진다. 선박을 이용해 월남한 난민들은 ‘38선 이남’ 주문진항에 머물다가, 우리 정부의 지침대로 ‘39선 이남’인 포항이나 부산, 거제도 등지로 이동하게 된다. 일부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고, 또 다른 이들은 서울 이나 대구 등의 도회지로 옮겨 갔으며, 또 어떤 이들은 고향 땅 가까운 ‘수 복지구 속초’로 모여든다.

휴전 직후 속초에 정착한 난민은 5만 명을 상회한다. 1975년 속초시 인구 71,475명 중 피난민이 5만 3천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한다. 이로써 속초는 남한에서 난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되었다.

낯선 땅에 내던져진 난민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생계수단의 확보였다. 기존에 누렸던 사회적 신분은 월남과 동시에 상실되었으니, 토지도 기술도 자본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들이 이 생소한 곳에서 삶을 일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육체노동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중 일용 선원으로 나서는 것이 그 유일한 탈출구였다. 사실 수산업은 고용 창출 효과가 대단히 큰 산업이다. 어선을 타고 조업을 하는 선원뿐 아니라, 그들이 잡아 온 수산물을 가공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거리가 파생된다. 명태나 오징어를 할복ㆍ건조ㆍ수송ㆍ판매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용효과가 나타난다. 어선을 건조하고 수리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산업이 생겨난다. 속초에 정착한 난민들도 이런 ‘막벌이’ 직종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갔다.

난민들의 상당수가 어업 또는 그 관련 산업에 종사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주거지도 어촌 촌락에 밀집하게 된다. 이들은 속초항 주변인 청호동ㆍ영랑동ㆍ금호동 등과 그 인접 내륙지역인 중앙동ㆍ청학동 등에 몰려 살게 된다. 이들 지역은 그 이전엔 야산이거나 모래벌판에 불과했다.

난민들은 여기에다 판잣집을 짓고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난민들은 그러나 그 후 수십 년이 지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을 실향민(失鄕民)이라 부르게 된다. ‘고향을 잃은 백성’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수복지구 속초’는 실향민들의 임시 정착지가 되고, 저들은 낯선 땅에서 기존의 모든 사회적 기득권을 상실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들이 머문 ‘속초’라는 공간 역시, 기실 북조선 통치에서 막 벗어나 새로이 남한 영토로 편입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속초는 전쟁 난민이 라는 새 구성원으로 재편된, 또한 ‘적성국’으로부터 탈환해 뒤늦게 남한에 편입된 ‘이 나라 이방(異邦)지대’로 자리매김 된다.

난민들은 이 나라 백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남한의 신민 으로 등록하기 위하여 자신의 본적지를 ‘속초’로 정하고 가족관계를 새로이 설정해 일가(一家)를 창립한다. 한편 본디 속초에 살고 있던 주민들도 농토 등 일부 생계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피난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도 여느 실향민과 같이 북한 통치를 받던 이들이었으므로, 남한 정부 입장에서는 적성국에서 유입된 난민에 불과 했다. 오히려 실향민들이 반공투사를 자처할 때, 본토인들은 북한 정부에 협조한 경력 때문에 ‘빨갱이’로 매도되어 사회적 고립의 위기에 처하기 까지 한다.

이렇게 형성된 ‘수복지구 속초’는 얼마 전까지 자기를 통치하던 북조선 정부를 적대시해야 하고, 그 구성원들은 북에 남겨진 가족과 지인(知人)들을 적성국가 국민으로 인식해야 할 처지에 이른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고, 또 그 시절을 그리워하다간 자칫 적성국을 고무 찬양한다는 누명을 쓰기에 십상이어서 함부로 내색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묘한 처지의 ‘수복지구 주민’들이 내적으로 겪는 갈등은 곧 이 시대 한반도의 비극을 압축해 놓은 것이라 할 만했다.

바로 이러한 갈등을 적확하게 포착해 ‘망향의 그리움’과 ‘실향의 아픔’ 을 절묘하게 극(劇)으로 표출해 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극작가 이반(李 盤)이다.

이반(본명 이명수)은 1940년생으로 그 자신이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실향민이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속초에 정착했다. 아버지를 ‘실향 1세대’라 부른다면 그 아들인 이반은 ‘실향 1.5세대’인 셈이다. 이반은 ‘수복지구 속초’에 거주하는 전쟁 난민들의 생활상을 가장 근접하여 관찰하고 체험한 작가이다. 당연히 그는 작품 활동 대부분을 속초 실향민들의 삶을 그리는 데 바쳐 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에 그의 작품 절반은 ‘종교’가 소재가 되고, 다른 절반은 ‘실향’이 소재가 된다. 그는 「그날 그날에」, 「아버지 바다」, 「샛바람」 등 일련의 분단 희곡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피난 생활을 경험 했고 수복지구 속초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기에, 그 누구의 작품보다도 생생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그날 그날에」나 「아버지 바다」 등의 작품이 특히 그러하다. 낚시꾼에게 있어 ‘놓쳐버린 고기’는 늘 ‘월척’이듯, 실향민에게 있어 ‘잃어버린 고향’은 늘 ‘낙원’이다. 행복과 그리움이 영원히 머물러 있는 곳이기에, 이들의 실향은 그 자체가 실낙원(失樂園)이다. 전 생애를 걸고서라도 꼭 되찾아야 하고,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곳이다.

「그날 그날에」와 「아버지 바다」는 서울연극제 등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거니와 속초지역 연극인들에 의해서도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이들 작품은 그가 ‘수복지구 속초’에서 직접 체험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북녘 고향 땅에 묻어주기 위하여 아내의 시신을 다락에 감춰둔 채보관해 온 김 노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복받쳐 현역 장교 신분으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다녀온 형철 등 실향의 한을 강하게 느끼는 인물 들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들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 체험과 염원이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있다.

또 주목할 것은, 이반 희곡의 대사가 함경남도 방언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극작가 중 함경도 사투리를 이반처럼 잘구사하고 많이 사용한 작가는 드물 것이다. 천승세가 희곡 「만선」에서 호남 사투리를 쓰고, 안수길이 소설 「북간도」에서 함경북도 사투리를 활용할 때, 이반은 함경남도 동해안 사투리를 이용해 대사에 영혼을 담아냈 다. 그는 이 언어로 전쟁 난민들의 ‘망향의 그리움’과 ‘실향의 아픔’을 밀도 있게 그려 낸다.



3. 망향의 한이 종식되는 시간 <그날 그날에>, 실향의 삶이 머무는 공간 <아버지 바다>


「그날 그날에」는 1979년 12월 극단 <광장>에 의해 세실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당시 이반의 나이는 40세였으며 실향한 지 30년쯤 되는 때였다.

이 작품은 ‘고향을 잃은 지 20년째 되는 해’인 1970년의 속초가 무대가 된다. 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청초호 끝자락 속초항 한 켠의 주막집. 이 주막은 실향민 김 노인 소유로, 북청댁을 주모(酒母)로 두고 있다. 김 노인은 배를 한 척 가지고 있는 선주(船 主)인데, 이 배에는 친구 박 노인을 선장(船長)으로 세워 놓고 있다. 이 배 선원들이 주막에 들어와 털어놓는 푸념에 의해, 선장 박 노인이 걸핏하면 북쪽을 향해 기수를 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문에 어군(魚群)을 놓쳐 어획(漁獲)이 부진할 뿐 아니라, 월북조업의 위험도 있다는 것이다. 박 노인 역시 실향민으로서, ‘이름도 못 지어주고 나온 어린 딸’이 고향에 남아 있다. 그때문에 늘 가슴 아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조급한 마음이 유별나다. 김노인은 박 노인을 선장직에서 해임하려 하나, 주모 북청댁이 강하게 박 노인을 옹호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사실 박 노인이 배를 지니고 있던 시절, 김 노인은 그 배의 선장으로 고용되어 조업 중 ‘마량도에 가서 깨어 먹고’ 온 바 있다. 그럼에도 박 노인은 김 노인을 격려하며 일체 문책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김 노인이 배를 장만했을 때, 군말 않고 박 노인을 선장으로 세운 것이 었다. 그러니 김 노인으로서는 박 노인을 해임하기가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한편 김 노인의 아들 창길이 대학을 마치고 은행원으로 취직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김 노인은 아들이 배 사업을 이어받길 원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실망이 적지 않다. 창길은 현재의 판잣집이 너무 누추하니 새 집을 짓자고 김 노인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김 노인은 이북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에다 짓자며 응하지 않는다. 창길은 ‘통일이 요원하다’는 점을 내세워 설득해 보지만 김 노인은 꿈쩍도 않는다.

이때, 출항했던 배가 이북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어로한계선 부근에서 조업하고 있던 중 별안간 북한경비정이 접근하며 나포하려 하자 박 노인은 선원들을 모두 바다에 밀어 넣고 자신만 끌려갔다는 것이다. 이소식을 접한 김 노인은 사실상 박 노인이 의도적으로 월북한 것임을 직감한다. 박 노인과 동병상련인 김 노인은, 아들 창길을 다락으로 올려보낸다. 창길은 그곳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한다. ‘고향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이루기 위해, 김 노인이 그 시체를 횟가루로 둘러싸 20년 동안이나 다락에 보관해 왔음을 이때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박 노인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염원을 실천하려 하고, 김 노인은 통일의 그날이 꼭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채 죽은 아내를 고향 땅에 묻어 주려 하고 있다. 실향 1세대들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이 이상 극명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 다.

‘꼭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수복지구에서의 삶을 매우 척박하게 만든다. 김 노인이 아들 창길과 더불어 청호동을 내려다보며 나눈 대화에서 그 조악한 삶이 드러난다.



김노인 그렇지비. 모두 판자촌이지비.


창길 저게 어디 사람 사는 거예요?


김노인 사는기 아이라구? …그렇지비, 사람 사는 기 아이지비. 니 거기서 어떻게 사는지 아니?


창길 이십 년 전이나 꼭 같겠죠.


김노인 같지비. 저기 왼쪽에 모여 있는 집들이 있잲니? 그기 신포마을이 다. 그리고, 그 옆이 몇 가호가 아이 되지? 그기 흥원 마을이다.

가운디가 서호진, 삼호, 북청읍이구, 저쪽 끝이 이원 마을이다.


창길 몇십 년을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발전이라는 게 없잖아요? 저기에 무슨 행복이 있고 생활이 있겠어요? 저게 뭐예요? 최소한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해야 될거 아녜요?


김노인 그렇다. 저기는 행복이란기 없지비. 나두 저 사람들과 마찬가지 지비. 고향을 떠나는 그날부터 우리에게는 생활이구, 행복이구다 없어졌지비. 그저 죽지 못해… 아이, 아이지비, 고향에 가는 그날, 그날이 올 때를 기다리며 사는 거지비. 고향으로 갈 때까진 개처럼 살면 어떻구, 돼지처럼 살면 어떻니? 그런 거는 문제두 아이된다.



확실히 저들에게 있어 실향은 고향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낙원을 뺏겼다는 뜻이다. 개나 돼지처럼 살지언정 끝까지 버티어 기어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향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삶의 가치나 행복을 논할수 있다. ‘수복지구 속초’에서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짐승처럼 살아내고 있는 삶’인 것이다.

이 작품의 대단원은 실향 1세대들이 얼마나 애타게 고향을 그리는지, 그 마음의 깊이를 ‘실향 2세대’들로서는 도저히 잴 수 없다는 절망을 충격적 방식으로 드러낸다. 김 노인은 아들 창길에게 다락을 뒤지게 하고, 이윽고 창길은 그곳에서 20년 동안이나 보관되던 어머니의 시체를 확인 한다.



창길 (크게 놀란) 저기 다락 위에….


김노인 무시기 있디?


창길 시체가, 시체가 있어요!


만길 시체가?


김노인 너어 어미다.


창길 이십 년 전에 죽은 어머니가?


김노인 너어 어미다.


창길 어머닌 여기서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그런 어머니가 어떻게?


김노인 너어 어미는, 거제도에서 죽었다.


창길 네, 그래요. 거제도에서 돌아가셨어요.


김노인 그 어미의 유언이 무시긴 줄 아니? 마지막 말이 무시긴 줄 아는가 말이다. 이남 흙을 아이 쓰구 고향 흙을 쓰구 자겠다는 기다.

저 귀신이 고향 흙을 쓰구 자겠다구 저기서 지드럭을 쓰구 아이 내려온다. 고향에 가는 날이나 저기서 내려오겠다구, 저러구 있다.


창길 아, 아버지!


김노인 사람은, 제 물에서 살아야 된다. 고향에 가서 살아야지비. 그렇잴 고는 사는 기 아이다. 그날, 그날이 곧 온다. 꼭 오고야 만다. 그날, 그날은, 빠르면 봄에 늦어두 가슬까지는….



실향민들이 ‘늙은 아바이들’이 되어 머물고 있는 이 땅은 여전히 그들이 뿌리내릴 곳이 아니다. 남한에서의 생활은 단지 ‘잠시 머무르는 과도 기적 삶’에 불과한 것일 뿐, 진정한 그들의 삶터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찾을 수 있다. ‘수복지구 속초’는 분명 이들에게 ‘객지’이며 임시 거처일 따름이다. 실향민들 그렇기에 이곳에선 그저 ‘나그네’일 뿐이 다.


이 작품을 발표한 지 10년 후에 이반은 다시 「아버지 바다」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이 작품도 역시 ‘수복지구 속초’, 그 어판장의 한 귀퉁이 포장마차가 무대다. 「그날 그날에」가 그러했듯, 「아버지 바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상황도 상당 부분 실제에 근거했다. 이반은 이 작품 후기에다 이렇게 밝혔다.



나에게는 동호, 형철, 길모, 성자, 장근이라는 어릴 때의 동무들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판장에서 몇 번 스친 친구도 있고 함께 배를 타고 고기잡 이를 한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벌써 바다에서 실종되어 자기 몸이 바다가 된친구도 있고 아직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꼬리도 대가리도 없는 소문 속에서 ‘소대원들과 휴전선을 넘어갔다’ 온 친구도 있다.



이 ‘친구’들은 모두 이 작품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다. 이반은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리얼리즘’극의 형태로 이북 사투리를 그대로 구사하는 대본을 완성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속초항 부둣가. 어판장 경비원 길모와 작은 어선의 선장 동호, 포장마차를 하는 성자는 모두 친구사이이다. 이곳에 낯선 사내가 찾아든다. 알고 보니 30 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 이들 친구 형철이다. 형철은 장교로 전방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휴전선을 넘어갔던 적이 있다. 그 죄로 20년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형철의 아버지는 등대지기였는데, 6.25전쟁 때군 작전상 불을 켜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어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불을 밝혔다가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바 있다.

한편, 선주(船主)가 새 배 마련을 위해 노임을 주지 않고 빼돌리자 선원들은 파업을 계획하는 등 갈등이 격화된다. 이에 동호가 중재에 나서고, 여기에 깨달은 바가 있어 선주는 노임을 해결하기로 약속한다. 이 과정을 지켜본 길모는 어판장의 갖은 부정을 뿌리 뽑겠다며 새로운 다짐을 굳힌다.

형철도 친구들이 동요없이 강하게 사는 모습에 활력소를 얻는다.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둠을 밝힌 아버지에 강한 자부 심을 가지며, 아버지가 어둠을 밝혀준 등불이 되었던 것처럼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간절히 고향을 그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철책 근무 중 고향을 둘러보겠다며 북한 영역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돌아온’ 형철이 바로 그다. 그 바람에 20년이나 옥살이를 했다. 단지 형제자매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겠다는 열망을 실천했을 뿐인데, 그 처벌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사실 이 무렵, 이들이 당하는 가장 큰 곤혹은 과연 북한 사람을 적으로 보아야 하느냐,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실향민들에게 있어 분명 저들은 형제자매임에 분명하나, 이 나라에서는 저들을 ‘적(敵)’ 이라 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총과 칼을 들이대며 살육하고 규탄하고 있으니 감히 고향을 그리워할 수도 없었다. 내 핏줄을 적으로 대해야 하는 모순, 그 아픔이 ‘수복지구 속초’를 가득 메워 떠돌아다녔다.

언제나 그렇듯 뱃사람들은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착취를 당해야 했다.

마땅히 선원들에게 주어야 할 노임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있는 선주의 횡포에 선원들은 파업을 하며 거칠게 대항한다. 선원들은 오징어 ‘스무 마리’를 잡으면 뱃삯으로 ‘열세 마리 반’을 내놓아야 되는 ‘분배의 불공정’ 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부두엔 여러 부정과 비리들이 얼룩져 있어 선원들을 이중삼중으로 착취하고 있다. 전쟁 난민들을 위한 해방의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각자도생, 스스로 살길을 찾아 연명에 성공하는 게 이들의 최대 생존 목표였다. 수복지구 속초에서의 실향민 삶이 그러했다.



4. 이념의 희생자들에게 수여된 <붉은 훈장>


남북이 분단되고 남북 사이에 전쟁을 벌인 것은 이념과 사상 때문이었 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실향민들은 이념 따위엔 관심도 없는, 단지 그 희생자들일 뿐이다. 이를 인식한 전후 세대 극작가들은 실향 세대인 이반과는 달리, 다소 객관적 접근으로 실향과 망향을 묘사하고 대립과 화해를 논한다.

최재도의 「붉은 훈장」은 전국연극제에서 작품상과 희곡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당위성이 매우 분명한 한 인물을 그리고 있다. 인민군 고급장교 출신으로 전쟁 중 포로가 되었다가 얼떨결에 반공 포로로 분류되어 석방된 주인공은 북조선 정부로부터 전쟁 중에 받은 ‘훈 장’을 한평생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것을 자랑할 수없을뿐더러 오히려 사회적 불행을 자초할 터. 북조선의 인민 영웅이 속초 에서 단지 뱃놈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에게는 더더욱 ‘실향’이 ‘실낙원

(失樂園)’으로 이해될 것이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인민군 고급장교였던 김일권(金一權)은 6.25 전쟁 중 생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얼떨결에 반공포로 석방조치로 풀려나 실향민 들이 밀집해 사는 속초에 정착한다.

김일권은 자신이 인민군 장교 출신이며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북한 정부에서 하사한 훈장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늘 과거를 회상하며 산다. 하지만 반공을 신봉하는 남한 체제에서 그것은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사회적 불이익을 자초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북한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당연히 인민의 영웅으로 대접받을 것이란 믿음 때문에늘 귀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술에 취하면 인민군가를 부르고, 인민 앞에서 호령을 하는 망상에 젖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 휴전 이후 40여 년 동안 그의 삶은 그러므로 자신의 낙원을 빼앗겼다는 ‘실낙원(失樂園)’의 한(恨)이 누적되어 있다.

한편, 그의 아들 동선과 동후는 이런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고통을 당한다. 그나마 동생 동후는 수재였기에 학교 대표로 반공궐기대회 에도 수시로 참여하는 등 반공 이념에 충실했으나,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그시련이 적지 않았다. 그럴수록 아버지를 미워하여 끝내는 아버지와 불목한 채, 도회지로 떠나 현재 은행의 중견간부로 살고 있다. 그러나 형 동선은 아버지의 세계를 나름대로 인정하며, ‘북한에 남겨진 아버지의 가족’에게 총칼을 겨누기 싫다 하여 고등학교 교련 교육을 거부하다 퇴학당하고 고기잡이 배를 타는 선원의 길을 택한다.

그러던 중 김일권은 금강산 유람선 취항 소식을 접한다. 아들 동선의 권고 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김일권은 금강산 관광을 거부한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영웅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펼친다. 남북 교류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념의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북한 정부의 명을 받고 싸운 것은 사실이나, 자신도 역시 민족을 위해 영광스런 혁명과업을 수행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으므로, 남한 정부는 북한 정부와 협의해 자신을 민족지도자로 예우하라고 요구한다.

해방 직후 아버지의 자진 월북으로 이른바 월북자 가족이 된 최봉하도 김일권의 주장을 옹호한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불이익을 받아온 최봉하는 김일권 일가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가 같음에 늘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김일권의 기행은 그 친구인 주대석에 의해 확대되며 널리 알려진다. 주대 석은 김일권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죽마고우이다. 남한에 정착한 후 꾸준히 김일권을 보살펴 왔다. 그러나 그는 김일권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다.

주대석은 김일권의 행동에 제동을 걸며 그의 반성을 촉구한다.

이런 와중에 김일권의 기행이 알려지자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난다. 91년에 귀순하여 현재 이 마을에서 북한음식점을 경영하는 고광철은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양쪽에서 모두 배척받는 민족 반역자가 될것’임을 두려워하며, 남북 화해에 앞서 자신들에 대한 신분보장을 요구한다.

주대석 또한 남한 기업들의 지나친 상업주의가 불만스럽다. ‘구걸하듯 금강산 여행을 해야 하는가’ 하는데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처럼 김일권 주변 인물들이 새삼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는 사이, 김일권은 지병이 악화되어 임종을 맞게 된다. 동후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향한다. 그는 최근의 일련의 사태와 아버지의 기행에 대해 들으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한다. 동후는 남한 정부가 만약 국시(國是)를 ‘반 공’에서 ‘통일’로 바꾸려 한다면, 반공 이념 아래서 희생당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과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을 수용한다.

동선과 동후 형제는 아버지의 영결식장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인민군 중좌 김일권’이라는 위패를 당당히 세운다. 통일 한국 시대에 이르면 남북 한의 영웅 모두가 추앙되는 세상이 될 것임을 이들 형제는 확신한다. 장례 행렬 뒤로, 비 그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 인민군 복장을 한 김일권 중좌가 말을 탄 채 위풍당당하게 무지개 위로 오르는 모습을 동선과 동후는 함께 목격한다.



이 시대 남북은 대립적 정치 이념으로 인해 각기 자국 구성원 중 상당 수를 희생자로 만들었다. 남한의 경우 ‘반공(反共)’ 이념을 유지하는 과정 에서 많은 사상적 제한이 있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하거나 그 신봉자로 의심되는 자는 과중한 사회적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반공 전초도시’를 자처하는 ‘수복지구 속초’는 이처럼 반공 사상을 강요했고, 따라서 난민들은 자신의 강한 반공의식을 수시로 고백해야 했다.

반공궐기대회장에서 손가락을 물어뜯어 혈서를 쓰는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행할 수 있어야 하고, 아들의 반공웅변대회 입상을 위해 웅변학원 등록은 필수였다. 자신이 월남한 이유가 ‘공산당이 싫어서’라고 명확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하고, 김일성 화형식 땐 남보다 한발 앞서 불을 지를 줄알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실향민들은 억울한 희생을 당해야 했다. 조업 중북한 경비정에 납치되기라도 하면 그 자체를 ‘불법 집단에의 탈출’로 간주했고 나중에 귀환했을 때 아주 가혹하게 처벌했다. 집안에 월북자라도 있으면 공직에 임용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며, 신원특이자로 지목되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붉은 훈장」은 바로 이런 이념의 희생자들 얘기다. 남한을 위한 자이 든, 북한을 위한 자이든 모두 ‘민족을 위한 이념’을 지키려 했던 자들을 상기하자는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는 지난 시대 반공이념 수호 과정의 정당성을 재평 가하고, 이념 보호의 명분 아래 국가 권력의 횡포에 시달린 당대 피해자 들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또한 국가가 그 구성원 보호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도 진지하게 제기된다. 납북당했다 귀환한 어부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국가가 그 구성원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해놓고 그 책임을 오히려 구성원한테 떠넘기고 있는 것아니냐는 것이다. ‘수복지구 속초’에서 실향민들의 삶은 이렇듯 이념 갈등에 함몰되어 있어야 했다.



5. 북녘 나그네들의 삶


전쟁 난민들은 한평생을 ‘수복지구 속초’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이곳은 객지였을 뿐,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저들의 다른 명칭은 ‘북녘 나그네’이다. 박 노인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가족을 만나고 싶다”며 북(北)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김 노인은 기어코 자신의 아내를 고향 땅에 묻어 주어야 한다며 고집을 피운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 저들의 삶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삶의 가치와 인간적 행복은 오직 고향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저들은 믿고 있다.

고향을 간절히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러나 정작 고향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적성 국가’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불법 집단’에 불과했다. 그러니 북한에 남아 있는 일가친척들은 모두 적(敵)인 셈이다. 내 핏줄을 적으로 대하고 내 고향을 적국으로 대해야 했다. 나아가 반공 이념을 과장해 드러내야만 했다. 반공 궐기대회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고, 반공 영화를 의무적으로 감상해야 했다. 자칫 조업 중 북으로 끌려갔다 오기라도 하면 의도적인 월북으로 간주해 장기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

난민이 되어 수복지구에 머물렀지만,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당하는 착취는 여전했다. 당연히 주어야 할 노임을 ‘가불’ 형태로 지급하고 그 이자를 떼어 가는 자본가들의 악행도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면서도 각자도생 끝에 살아남았으니, 수복지구 속초에서의 실향 민들 삶은 지난하기만 했다.

수복지구에서의 삶을 그린 ‘분단 희곡’들은 바로 이런 상황들을 정교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비록 ‘분단 희곡’들이 “「광장」 등 ‘분단 소설’에 비해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본질을 본격적으로 집요하게 추구하지 못한 게아쉽다.”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적 묘사’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 시대의 상황을 정밀하게 그려 냈고, 다양한 사건들을 근접해서 추적했으며, 당대 사람들의 감정을 진지하게 보여주 었다. 이렇듯 몇몇 작가들의 ‘분단 희곡’은 ‘수복지구 속초’에 살았던 전쟁 난민들의 처참한 삶을 박제처럼 남겨놓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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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16일 <설악문화예술포럼>(대표 이상국) 주최로 “문학으로 본 수복지 구”라는 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여기에서는 “수복지구와 분단 시”, “수복지구와 분단소설”, “수복지구와 분단희곡” 등을 주제로 한 발제가 이루어졌다. 이 원고는 그 중 「수복지구에서의 삶을 그린 분단희곡」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