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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수필] 인간이 갖는 두 얼굴의 성정(性情) 외 1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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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61회 작성일 22-12-2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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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책을 중년이 되어 다시 읽었다. 느낌에서 오는 차이가 엄청 났다. 깊어가는 세월 속에서 그저 세상을 그윽이 바라봐야 된다는 것을, 픽션이지만 두 소설을 통해 선과 악, 이성과 본능. 사람들 마음 안에 두 얼굴이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고령화 사회에서 새로운 도전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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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갖는 두 얼굴의 성정(性情)



무슨 일이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듯이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 내면에도 이성과 본능이 있듯이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있는 성향이 있다.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성선설이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순자는 이와 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두성정인 성선설과 성악설 둘 다 소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은 탈을 바꾸어 쓰듯 하루에도 몇 가지 얼굴을 하며 살아 가야 한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쓰듯 여러 역할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 밖으로 표출되는 자신의 형상과 보이지 않는 내면의 형상이 모호할 때가 많다. 살다가 보면 때론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해서, 그 기준을 뚜렷이 선(線)으로 긋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야누스에 관한 얘기가 있다. 야누스는 문을 지키는 신이며 앞과 뒤가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1월

(January)은 야누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흔히 이중적 행동을 하며 두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고 야누스 같다고 하지 않은가.

옛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단 말이 있다. 또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란 말도 있다. 똑같은 상황을 가지고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의 성정이 갖는 이중성을 일상에서도 주변이나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수년 전에 비호처럼 날아다니며 도적질하던 대도(大盜)가 수없이 교도소를 드나들다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 후 목사가 되어 선교활동을 했지 만, 다시 도적질을 하여 실형을 받은 뉴스를 여러 번 접했다. 또한 정치권 에서도 사람들한테 존경받으며 사회를 이끌어 가던 유능한 정치인이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으로 실형이 구형되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누구보다 규범에 충실하고 국민들한테 모범적이어야 할 지도자들이 선과 악, 두 얼굴을 가지고 야누스처럼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들은 본능에 이끌리지 말고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판단과 이성적인 기지를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한 모습은 국민들을 기만하고 배신한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선한 면과 악한 면 두 얼굴을 가질 수도 있고 필요에 의해서는 몇 개의 얼굴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절대로 주변이나 사회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반쪼가리 자작』이라는 주제가 비슷한 두 권의 소설이 떠올라 중년이 되어 다시 읽었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많은 체험을 겪고 나서 다시 읽으니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새롭게 느껴졌다. 17세기 작가들이 쓴 소설이지만 미래 독자들을 의식하여 인간들의 성정과 본능을 분석하듯 공통적인 견해로쓴 소설이다. 두 소설 모두 픽션이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그 시대 작가들의 예지력과 분석력에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먼저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영국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쓴 소설로 주인공 지킬 박사는 한 인간의 몸에 선한 면과 악한 면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하고 연구한다. 그는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연구하여 결국 약물을 만들어 낸다. 그는 낮에는 지역사회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선의 표상인 과학자로 존경받는 지킬박사로서 활동한다. 하지만 약물 실험 후 밤이 되면 악의 표상이 되어 키 작은 애드워드 하이드로 변신하여 밤거리를 쏘다니며 악행을 저지르며 다닌다. 결국은 명망 있는 국회의원을 잔인하게 살인하게 된다. 그의 친구인 변호사 찰스 어터슨이 그살인 사건의 수사를 돕게 되자 지킬은 점점 정신적인 부담에 사로잡혀 있다가 행방불명이 되고, 결국 자신의 실험실에서 자살하고 만다. 소설을 읽으며 약물에 의한 것이지만 한 몸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양면성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한 소설이지만 다중인격 즉 선과 악의 이중적 본능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전제하에 쓰여졌다. 따라서 ‘선과 악’의 두 얼굴을 주인공 ‘지킬’이라는 캐릭터로부터 발견했을 때 독자들은 동질감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다음으로 『반쪼가리 자작』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 소설은 쿠바 출생 이탈리아 작가인 환상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탈로 칼비노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쓴 작품이다. 이야기는 17세기에 터키와의 전쟁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테랄바의 메다르도 자작 얘기이다. 주인공 테랄바의 메다르도 자작은 열정적이면서도 순진한 젊은이로 무모하게 전쟁에 뛰어들어 몸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는 전쟁의 상처로 선과 악으로 분리된 두 개의 몸으로 나누어져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나의 몸은 자작의 ‘악’한 부분만 품고 있어 반쪽으로만 세상을 보게된다. 열매와 버섯, 개구리 등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반쪽 내기 시작한다.

반쪼가리 자작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까지 사형해 버리는 사악한 일들을 하게 된다. 그의 존재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오로지 ‘선’으로만 존재하는 또 다른 반쪽 자작이 나타나 큰 혼란을 가져다 준다. 선한 반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목적 도, 의도도 없이 선행을 베풀지만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불편해 한다. 선과 악 사이에서 두 반 쪼가리들은 거의 동시에 ‘파멜라’라는 소녀를 사랑 하게 되고 결국에는 두 자작의 몸이 하나가 되어 일상으로 돌아와 파멜라와 함께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마을은 안정을 되찾게 된다. 칼비노는 환상적인 소설을 통해 악과 선을 인간들의 성정에서 오는 고통과 외로움 으로 그려 냈다. 한 번쯤은 인간의 이중성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작가 칼비노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 하며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모습이 ‘인간적’이다라고 말했다. 옮긴이 이현경은 작품 해설을 통해 「반쪼가리 자작」은 현대인들한테 대표되는 인간형이라고 덧붙였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반쪼가리 자작」 두 소설의 주제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야누스적인 두 얼굴, 즉 선과 악에 대한 양면성과 내면의 성정(性情)을 다룬 소설이다.

선한 지킬 박사는 인류를 위해 과학적인 업적을 남기며 선한 일을 한다. 선한 반쪼가리 자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며 끝없이 베푼 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반쪼가리 자작」 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같은 목소리를 낸다.

두 소설의 마무리 부분에 있어 차이점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주인공은 선을 소유한 지킬로 돌아오지 못하고 악인으로 변신한 하이드가 되어 약물 중독으로 실험실에서 자살하고 만다. 즉 악행의 말로를 작가는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쪼가리 자작」에서는 선과악 두 반쪼가리들은 합의하여 다시 한 몸이 되어 파멜라를 사랑하며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와 배려하며 선과 악을 한 몸에 지닌 채 화합하며 살아 간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제시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하이드를 죽게 함으로써 절대 악은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 하에 소설을 썼다. 또한 「반쪼가리 자작」의 이탈로 칼비노는 선과 악 두 반쪼가리들을 한 몸으로 합치게 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내면에 두 얼굴은 필요에 의해 함께 존재함을 인정한 것이다. 두 소설 모두 오페라와 영화로 인기리에 상영이 되었으며 『반쪼가리 자작』은 최근까지 서울에서 연극으로 절찬리에 공연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정체성에 대한 변화가 많아지는 경우가 있다. 젊었을 때 사회활동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했던 것들이 세월이 흐른 후에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뀔 때가 많다.

그런 연유로 때론 만나는 사람들과 내가 소속된 사회에서 원래 내 모습과 본능을 포장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한 사람이 되었다가 경우에 따라 악한 사람이 되는 야누스 같은 두 얼굴을 가지고 행동을 하기도 한다. 「반쪼가리 자작」에서 선과 악 두 반쪼가리를 화합하게 한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쪽으로 내 생각이 쏠린다. 사춘기에 읽었던 소설을 중년이 되어 다시 읽으니 감상의 파장도 크고 느끼는 바도 크다.

하지만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나름대로 확고하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듯 내 안에 있는 선과 악 두 얼굴 중 선한 성정은 많을수록 좋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잘 행하지를 못한다. 하지만 악의 성정은 그 기준이 확실하다. 사회나 사람들한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절대로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지론이다.

하늘이 높고 날씨가 맑다. 여름을 떠나보내듯 완창 매미 소리가 고요를 흔든다. 나는 오늘도 거울 속에 비친 선과 악, 두 얼굴의 화장 안 한 내 민낯을 바라보며 몇 개의 탈을 가지고 외출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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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고3


현대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으며 이미 백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생 후반기를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계발하고 재미있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보면 젊었을 때 사느라 바빠서 못했던 취미 활동이나 못다 한 공부를 하는 연세가 드신 분들을 가끔 보게 된다. 평소에 하고 싶어 했었던 것에 도전하고 성취함은 젊게 사는 비결이고 자신에게 행복을 준다.

올봄 강릉에 있는 친정 고모한테서 전화가 왔다. 3월 첫 수업이 있어 학교에 가서 고등학교 3학년 교재를 받아 왔다고 했다. 교재를 보니 너무 어렵고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다. 고모가 교재가 어렵다고 하는데도 나는 새봄에 고3이라는 말만 들어도 내가 먼저 설레고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제2외국어인 일본어도 배우게 된다며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나에게 묻는다. 나는 인터넷에서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비롯해서 쉬운 단어 몇 개를 찾아서 메일로 보내 주었다. 복사 해서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외우라고 했다.

팔순이신 고모는 현재 방송통신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일주일 동안 인터넷으로 교육 방송 수업을 듣고 2주마다 주말에는 학교에 가서 정규수업을 받는다. 고3이 되니 바쁘지만 코로나 기간이라 아무 데도안 나가고 공부에만 열중하니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했다. 함께 공부하는 분들도 평균 연세가 60~70세라며 고모는 80이라 최고령이지만 학급에서 연세가 두 번째로 많다고 했다.

이분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온 나라가 수난기였 다. 누구나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를 못내던 현실이었다. 특히 휴전선 부근은 전쟁이 치열했던 곳이라 웬만한 가정이 아니고서는 자식들을 중ㆍ고등학교에 보내질 못했다. 특히 딸들은 상급 학교에 간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일을 하거나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앞날을 펼쳐 나가기에는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이다.

고모는 학교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칠십 대 중반에 방송통신중학 교에 입학을 했다. 노트북을 사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혼자 공부를 하다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한다. 그러면 내가 아는 부분은 답을 해주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은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서 답을 해주곤 했다.

고모는 문학이나 역사 공부는 재미있는데 수학ㆍ과학은 어렵고 이해가 안 가서 잘 모른다고 했다. 집에 가보니 식탁 위나 벽에 영어 기초 단어와 문장을 적은 종이를 붙여 놓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렸다.

그렇게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는 딸하고 축하 꽃다발을 들고 졸업식장에 갔다. 졸업생들은 거의가 연세 든 어르신들 이며 자제분들이나 손주들이 꽃다발을 들고 와 있었다.

평생 동안 자녀들 뒷바라지와 가족을 위해 살아오다가 자신을 찾아 늦은 나이에 면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못다 한 꿈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런 영광스러운 졸업식장에서 고모는 성적 우수 및 성실한 학생 대표로 앞에 나가서 상을 받았다. 그 연세에 도전하고 성취감을 이룬 데 대해 내 가슴까지 뿌듯했다. 많은 졸업식에 참여해 봤지만 어떤 졸업식보다 더 의미가 있고 감동적인 졸업식이었다. 고모는 졸업식을 마치고 며칠 동안 고민하더니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시 입학을 했다. 입학할 때가 어제 같았는데 벌써 고3이 되었다.

고모는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우리 친정집이 종갓 집이라 남존여비 유교적 관습 때문에 초등학교까지만 공부를 하셨다. 하지만 열심히 한문도 배우고 4H 활동을 비롯하여 나름대로 자기 계발을 위해 애를 많이 쓰곤 했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 키우며 쪼들리는 생활 때문에 장사를 시작하여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들 모두 결혼 까지 시키고 고생도 다 하여 편하게 살려고 하는데 엄청난 불운이 닥쳤 다. 고모부께서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팔 개월 만에 삼십 대 맏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2002년 8월 31일 강릉 하늘에 구멍이 난 듯 하루 900mm의 물을 태풍 루사가 쏟아 부었다. 나한테는 고종사촌인 고모의 맏아들이 직장 일로 강릉서 정선 쪽으로 출장을 가는 도중에 산사태가 나서 사고를 당했다. 강릉은 자연재해 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시내는 물바다가 되었고 오봉 저수지 부근에는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가 많다는 뉴스가 TV에 나왔다.

무너진 길은 사흘 만에 복구되었고, 매몰된 차량과 동생 이름을 비롯한 사망자 명단이 속보에 떴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앞이 캄캄했고 온 전신이 떨렸으며 제발 뉴스가 오보이기를 기도했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크다시피 해서 나한테는 친동생이나 다름이 없는 동생이었다. 여섯 살 된아들이 아빠가 왜 집에 안 오냐고 투정을 하며 창밖에 매달려서 기다렸고 고모는 실성한 사람이 되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견디기 위해 신앙에 몰두하여 아침마다 아들을 위해 새벽기도를 드리며 아픔의 세월을 극복해왔다.

그러다가 칠십 대 초반에 방송통신중학교에 입학하며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더니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지금 여든의 나이에 고3 이 되었다. 집에 가보면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다.

또한 유튜브로 기초 영어 회화를 듣다가 시험 때는 시험공부 하느라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바빴다며, 일전에는 중학교 동창 야유회가 있어 다녀왔다고 하며 재미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동창 얘기를 하면 부러웠는데 마음을 나누며 함께 공부하던 중고등학교 동창이 있어서 이제 고모는 행복하다.

평생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고모는 긴 세월을 돌아 돌아 팔순이 되어 소원 풀이를 한 셈이다. 한평생 공부하고자 했던 불씨가 불꽃이 되어 타오른 것이다. 고모가 공부에 몰임한 것은 학문에 대한 욕구 충족과 성취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면에는 먼저 떠난 아들을 잊지 못해 긴 세월 뼈가 녹아내라는 아픔을 삭이려고 공부에 매진했음이 틀림없다. 아들이 떠난 빈자리를 기도와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왔지만 학문에 도전하고 몰입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아픔을 잊을 수 있어서 더욱 자신한테 회초리를 가하지 않았을까.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열정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대학도 진학할 수 있건만 물리적인 나이와 건강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사회는 이미 백세시대에 도래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소외된 듯외로움과 고독으로 인해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우울감 해소를 위해그 해답을 자신한테서 찾아야 한다. 활기찬 노년의 삶을 위해 건강은 물론이고 본인이 좋아하고 즐기는 일에 열중하고 몰입하면 성취감을 맛보게 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문득 사무엘 울만의 「청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영감이 끊어지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일 때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 하더라도 늙은이라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고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