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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수필] 美의 가치 외 1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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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71회 작성일 22-12-2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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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 곱게 물들었다.

늘 그런 것처럼 익숙한 가을이 낯설지 않도록 예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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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의 가치


우연히 오랜만에 예전에 뵈었던 분을 만났다. 아마도 거의 십여 년만인것 같았다. 그분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고 해서 난 참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그분이 하는 말 “아고 서 선생 예전에 그렇게 예뻤는데 많이 늙었네… 어휴.”

‘헉? 이게 뭔 말인가?’ “아예 세월을 거스를 수가 있나요? 이렇게 세월 가는 거죠 뭐.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 나이로 안 봐요.”

그렇게 대답을 하고 돌아섰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거의 십 년만에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저분은 아마도 여성들한테는 결코 인기를 없을 것이라며 나를 위로하며 마음의 보복을 하였다. 집에 들어와 거울을 보며 ‘뭐야, 내가 볼 때는 그대로구만’ 하고 말았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다.

모임에서도 자꾸 지인 한 분이 나를 할머니, 할머니 칭하는 것이다.

‘이런 젠장, 할머니들을 다 어디 가셨나?’ 나에게 올해 유난히 늙음에 대해 이야기하니 자꾸 화가 나서 그런 이야 기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다 늙어 가는 거라고 쏘아붙 였으나 참 어이가 없었다. 이래저래 조금 속상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위로나 받을 상이었다.

“야, 오랜만에 뵌 그분은 어찌 나한테 늙었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한다니? 그것도 여자한테. 조금 속상하다.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하나도 안변했다 하는데, 더구나 방부제 먹냐고 하면서 그대로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하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친구 왈 “방부제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야 여자 나이 50 넘으면 다 거기서 거기야” 하면서 더 염장을 지르고 말았다. 친구와 급기야 싸우고 전화를 확 끊어 버렸다. 그래도 속상함이 가시지 않아서 아들한테 사진을 보내 ‘엄마가 요즘 많이 늙은 거 같아 속상해. 아들 엄마가 그렇게 많이 늙어버렸어?’ 하니 ‘아니 엄마 누가 그래? 엄마 아직 젊어 그리고 충분히 예뻐요. 그리고 엄마 나이 안 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왔다. 요즘 갱년기를 맞으면서 조그마한 말에도 섭섭하고 속이 상한다. 그리고 눈물이 많아졌다.


여성들에게 늙었구나, 살쪘구나 하는 말들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다. 세월이 흘러 사람이 늙지 않을 수는 없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늙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또한 건강한 삶일 것이다.

늘 아름답다, 멋있다, 예쁘다 그 소리를 듣고 살아와서 그런지 내 자신이 그 말들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를 나의 모습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라고 믿어왔 고, 그 아름다움이 결코 겉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렇게 나의 삶의 기준은 아름답고 예쁜 것에 중점을 두고, 나를 꾸미고 나를 가꾸는 목적이 우선시 되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상대로부터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하고, 그것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랬기에 비싼 화장품을 사서 써 본 적도 없고 소위 말하는 관리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오히려 늙으면 늙은 대로 예쁘게 살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봐도 그냥 그대로 친구인 것같고 나이만 먹었지, 늙었다 그런 개념을 갖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이렇게 슬픈 일인지… 아무리 나를 달래려 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나를 가꾸고 사는 것이 낙인 나의 자존감마저 급격히 떨어트리고 회의에 빠지게 했다. 그 사람은 그냥 던진 말일지도 모르는데도 나는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 그것도 갑자기… 정말 내가 늙어버린 것일까? 다시 거울을 보고 생전 관심 두지 않았던 리프팅, 세럼, 탄력 크림 등의 화장품들을 검색해보았다. 그많던 마스크 팩도 한번 해 본적 없고 선물을 받아도 다 썩혀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주섬주섬 마스크 팩도 꺼내 보고 관리를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그러면서 늘 딸이 ‘엄마 관리해야 해. 엄마 서울에 와서 주름 관리도 하고 리프팅도 하고 보톡스도 맞아야 한다’던 허투루 들었던 말들이 솔깃해졌다.

그동안 난 너무 자만했나? 나를 너무 믿었나? 참내 그냥 생긴 대로 살고 세월대로 살면 되지. 왜 그 한마디에 내가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지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떤 것이 옳은 삶인지 모르겠다.

문득 마크켄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의 작품이 생각난다.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서 살았다면 결코 이런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모 지상 주의자는 아니지만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 하고 싶다. 늙음에 비해 그녀의 다른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불구의 외모임에도 너무나 자랑스럽고 멋지게 인생을 살았다.

앨리슨 래퍼는 1965년 영국에서 해포지증이라는 병을 갖고 태어난 구족화가이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진다. 복지시설에서 자란 그는 22살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결혼을 했지만 파경을 맞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적부터 관심이 많았던 미술을 시작함 으로써 화가로서 인생을 시작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밀로의 비너스를 보고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 생각을 하면서 삶의 희망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구의 몸으로 브라이던 보스턴 대학에서 수석 졸업을 한다.

그녀가 살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이겨냈을지 우리는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여러 번 유산한 끝에 아들을 낳아 미혼모로서도 당당하게 아들을 키우며 성공한다. 그렇게 탄생한 마크퀸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 의 동상은 영국의 트리팔가 광장에 세워져 있다.

처음에 그곳에 동상을 세웠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의 혐오스런 질책의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그의 동상을 보고 너무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는 모습은 두 팔이 없고 임신한 상태의 모습으로 예쁘지는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녀의 동상을 두고 아름답다 하는 것인가?

그녀는 “나도 이렇게 사는데 나약하게 굴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에서 나약한 정신에 갈팡질팡하는 이들에게 당당히 그녀는 말한다.

“당신이 힘들면 나를 보세요.”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그녀를 세계 사람들은 칭찬한다. 상대의 겉모습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안다고 이야기하지 말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람의 개개인은 어떠한 모습이던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세월의 흐름에 늙는 것은 그 가치로도 충분하다. 또 아름다운 가치는 그 사람의 연륜으로도 충분한 것이니까.

보통 대부분 여자들은 자신의 젊은 날을 남편에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바치고 살아간다. 그랬기에 늙어 버리고 그 늙음이 삶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 어머니들은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관리할 시간들이 없다. 자식들이 다 크고 떠나간 후, 돌아봤을 때의 내 모습을 보고 속상해 하지만 이미 그때는 시간이 많이 지나간 후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을 후회하거나 꾸미지 못한 것에 슬퍼하지는 않는 다. 그저 아름답게 살았노라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 하며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렇게 늙음에 후회하지 않는다. 나 또한 내가 늙어감에 후회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나를 애써 되돌리려고 하지 않았 다. 내 늙음에 누군가가 비애하거나, 옛 시간과 비교하거나, 다른 젊음에 비교한다면 나는 그 비교하는 사람을 아주 삶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군요. 늙음에도 가치는 있는 것입 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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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재봉틀


돌돌돌 발 구르던 재봉틀, 어릴 적 엄마한테 혼나면 나는 재봉틀을 발로 구르는 게 일이었다. 그러면 왜 죄 없는 재봉틀에 화풀이하냐고 더 혼났다.

서울에서 이사 오던 날. 어머니가 주신 재봉틀, 몸통은 너무 무거워 동생네 두고 오고 다리만 콘솔로 쓰려고 마당에 내놓았다. 6살 딸아이가 소리 지른다. “엄마, 엄마, 할아버지가 저거 가져가.” 뛰어 내려가 보니 없어 졌다. 참 사람 인심 그렇더라. 짐 싸는데 잠깐 내려놓은 재봉틀 다리를 고물 줍는 할아버지가 들고 가버렸다. 할아버지를 붙잡아 내놓으라 해도 잡아뗀다. 그 당시 CCTV가 없어 억울할 뿐이다. 엄마는 속상해하시면서 앉은뱅이 재봉틀로 바꿔 놓으셨다.

내가 속초에 이사와 엄마 나이가 되었을 무렵 우연치 않게 재봉틀을 배우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재봉틀을 달라고 했다. 동생은 그 무거운 것을 차에 싣고 서울에서 속초까지 달려와 주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받자마자 이것저것 만져가며 어릴 적 추억을 기억하며 재봉을 하였다.

달달달 어릴 적 서서 발로 발판을 구르며 놀던 기억이 났다. 비록 지금은 앉아서 달달달 작업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엄마의 손길이 잔뜩 묻어 있는 거 같아서 더 좋았다.

얼마나 재미나던지 밤샘하며 이것저것 만들었다. 내 맘대로 만들어 지인들 나눠 주기도 하고 시간날 때마다 재봉틀 앞에서 살다시피했다. 더다양한 파우치며 소지품들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봉틀이 고장이 났다. 이제 더 이상 고칠 수가 없다고 한다. 많이 속상했다. 한 손으로는 천을 잡고 한 손으로 돌림 바퀴를 굴려야 하기에 숙달되지 않으면 재봉하기가 어려워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새것을 장만하고 베란다에 넣어 버렸다. 동생은 백 년의 역사던 말던 미련 갖지 말고 이제 쓸모가 없으니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난 우리 집안의 역사가 담긴 재봉틀이기에 버리지 못했다. 몸통을 받쳐 주는 다리마저 잃어버린 남겨진 이 재봉틀을 가보로 두려고 꼭꼭 싸매두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재봉틀은 잊은 지 오래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 소중해하던 것이 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한발로 발판을 구르고 한 손으로 돌림 바퀴를 돌리던 시대도 가고, 발판을 쓰며 재봉하던 것들도 지금은 버튼 하나를 누르면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더구나 각양각색의 수도 놓을 수 있다. 힘들지 않게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왔다. 재봉질의 신세계를 만났다.

베란다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엄마의 재봉틀. 처음에 맞았을 때는 그렇게 소중하고 너무나 내게 값진 것들이 이제는 방치되어 있다. 버려야 하나 갖고 있어야 하나 고민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 쉽게 변하는지, 저 재봉틀 하나로도 알 수 있다. 새것에 눈이 팔렸다. 긴 세월들 시간 속에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일 뿐이다.

밤이 늦도록 재봉을 하다 보니 밤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어둠이 짙어 졌다. 문득 엄마의 재봉틀이 생각났다. 재봉틀을 낑낑거리며 꺼내 보았 다. 눈물이 났다. 재봉틀을 방치한 것에 죄스러움이 일었다. 오밤중에 앉아 이곳, 저곳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털어 내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무리 새것을 샀다 하더라도 엄마가 주신 이 소중한 재봉틀은 버리지 말자 다짐 했다.

엄마와 딸아이 사이에서 사소한 다툼이 있었고, 그로 인해 몇 년을 가지 않았던 친정. 몇 번이고 가려고 맘먹었으나 쉽사리 내키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가슴속에 많이 맺혀 있어서 하루, 하루 코로나 핑계를 대고 미루었다. 가끔은 엄마가 너무도 보고 싶고 친정에 사는 딸아이도 보고 싶지만 참고 있다. 서운함이 보고 싶은 마음보다 강했기에 그 강한 미움을 풀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고 있다.

엄마의 모습이 자꾸 저 재봉틀 속에 떠오른다. 그리움이 맺혀서 눈가가 짓물렀을 엄마의 모습이 투박한 재봉틀 속에서 울고 있다. 불효를 하고 있는 나는 재봉질을 하면서 반성하고 또 마음을 다잡았지만 힘들다. 엄마의 모습을 잊으려고 나의 죄스러움을 이기려고 재봉질을 하고 또 했다.

엄마 옷도 만들어서 보내고 마스크도 만들어서 보내고 했지만 가지 못하고 있다. 기다릴 줄 뻔히 알면서도 서울에 가도 친정에 들리지 않고 아들 집에서만 지내고 왔다.

선배들이 ‘그럼 안 된다. 엄마를 보고 와라. 돌아가시면 후회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가끔 전화기 속으로 들려오는 엄마의 울음… 가슴 저미는 눈물을 쏟아 내면서도 엄마를 보러 가지 않고 있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재봉질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달랬 다. 그렇게 재봉질을 하다 보면 속상함도 가슴속 맺힘도 엷어지리라 생각 하고 재봉틀을 더 돌렸다. 그러나 재봉질을 하면 할수록 엄마에 대한 죄스러움은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우연한 계기가 되어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나예요. 죄송해요.’ 전화기 건너로 엄마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곧 갈게, 잘 계셔.’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래. 건강하게 있어. 가서 내가 맛난 거 해줄 게.’ 엄마는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쉽게 전화기를 떼지 못했 다. 귀에 멍멍하게 엄마의 설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설움에 전화기를 들은 채 펑펑 울고 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걸몇 년이란 시간을 묻고 살았나 하는 후회와 가슴 저린 멍울을 왜 갖고 살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는 엄마의 딸을 위해서 난 나의 딸을 위해서 한 말들인데… 서러워 모녀들이 울고 있다. 이제는 엄마의 속상함을 잊으려고 밤새 재봉을 하지 않는다. 엄마의 그리움을 잊으려고 재봉을 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엄마 좋아하는 부침개를 부쳤다. 호박 양파 부침, 김치 부침, 굴ㆍ홍합 부침, 부추 부침. 그리고 식을까 봐 뜨거움도 잊은 채 급 냉동 하고 보니 내 손이 발갛다. 그리고 다양한 반찬들, 잡채에 돼지갈비에 자반 구이, 소고기 장조림에 가득가득 싸서 택배를 부치고 왔다.

열흘 지나도록 재봉을 안 한 지 오래이다. 베란다에 던져 놓은 엄마의 재봉틀을 보고도 이제는 죄스럽지 않다. 저것은 그냥 재봉틀일 뿐이다.

마음이 가볍다. 말끔히 닦아 놓은 엄마의 재봉틀도 환하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