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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금단의 벽 외 10편 / 이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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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29회 작성일 22-12-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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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지 못하는 진여에게 위로를, 추월하는 것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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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벽

― 격리일기 1



불쑥 

수상한 시간이 

철없이 찾아들었다 

그대, 

금줄을 드리워라

내 숨소리가 닿을 수 없도록

내 발자국이 침범할 수 없도록


금단의 벽을 내려다오 

밀려 있는 읽을거리며 

쌓여 있는 먹을거리 

평생의 애인 같은 

평생의 원수 같은 

핸드폰의 감시에 

기꺼이 응하며 

나, 

열흘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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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줄도 모르고

― 격리일기 2


눈을 맞추며 해맑게 웃고 거리낌 없이 껴안았던 우리에게 

달리 거리란 없었다


죄 목 은 밀 접 접 촉


더는 비낄 수 없어 

어깨를 붙이고 등을 맞대고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은밀한 가두리가 있어 

모르는 사이 한통속이 되는 밀접 

지구와 태양의 거리만큼 먼 별들이 

뜨거운 이마를 부딪치는 

수상한 비밀 같은 접촉


영문을 모르는 

어린 손녀 울음소리 

하얀 보건소 차를 채우고도 남아

내 가슴을 짓밟으며 간다


이제 나와 핸드폰이 밀접 접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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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 격리일기3


콧물만 비쳐도 

재채기만 올라와도 

이마가 더워지는 것 같아 

삼사일이 고비라는데


탯줄을 가른 위대한 온도 앞에 

인류를 재빠르게 포섭한 신흥종교처럼

두 손 모으게 되는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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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리일기 4


오늘이 닷새째인 걸 어렵게 기억해 냈다

 꿈꾸던 고립의 시간


끼니를 꼬박 챙기고 

의미 없이 군것질을 뒤졌으며 

시집 두어 권 읽고 

핸드폰 배터리가 자주 소진되었다 

침대에 불을 지핀 후 몸을 뉘어 

편안한 잠자리에 든 후

꿈자리가 어지러운 날은 

걱정을 꺼내놓기도 했으나


이대로 백일 견디면 

곰으로 되돌아갈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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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 격리일기 5


핸드폰에게 물건 주문을 맡기고

핸드폰에게 멀쩡하다는 보고를 드리고 

핸드폰에서 라디오를 꺼내 듣고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며 

며칠째 앵앵거리는 성가신 파리 한 마리 

쫓다가 포기하고 다시 

핸드폰으로 끄적인다 

핸드폰아 

니가 머리 좀 감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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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닌데

― 격리일기 6


핸드폰에게 고함을 질렀네(참 대단한 열정) 

엉겁결에 가게를 떠안은 남편의 불안이 

핸드폰 속에 있었기 때문이네


얼마나 힘들겠냐고 

고생이 많다고


흩어진 말 대신 

무성한 서슬들 건너갔다 건너와 

생채기를 내는데, 어이쿠!

이만한 열정이라면 역병도 겁에 질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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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리일기 7


사부작이 비 오신다


핸드폰에게 음악을 구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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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 격리일기 8


푸른 절벽 끝에서 

물결을 따라가다 

낭떠러지 군데군데 걸려 있는 

바위를 타고 곰처럼 웅크린 등짝들 

순식간에 날개 돋친 바위 하나 푸드덕거리면 

그것들의 기울기를 재빨리 가늠해보는 나는 

바늘의 향방이 못내 궁금한데


저만치 풀어놓은 짐 더미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 

보따리에 넣고 일어서려는데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더는 나아갈 수도 

뒤돌아볼 수도 없어 

벌겋게 무안해져 화들짝 깨어났다 

눈을 뜨고도 몸이 붉어

꿈에서까지 도둑질을 하다니


낚시 바늘이 입속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기웃거린 너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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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 격리일기 9


건물 사이 

손바닥만 한 하늘이 걸려 있어

잎 떨군 나무 한 그루 무념에 든

낮게 깔린 회색 구름 위로 

점점 붉히는 아침노을

그 너머 

해를 받쳐 올리는 물결들을 떠올리며 

아침밥을 먹기로 하는데 

나뭇가지를 부비는 듯

새 한 마리 날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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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주인님

― 격리일기 10


(발신번호 033-639-0000, 발신일시 21. 12. 00 08:48)

○○○님(여) 

코로나19 PCR 검사 결과 음성입니다(검사일자 21. 12. 00) 

1) 본 문자는 다중이용 시설 등의 출입을 위한 PCR 음성 확인 용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2) 본 문자를 통한 음성 확인 유효기간은 21. 12. 00 24:00까지 입니다.(문자를 통보받은 시점으로부터 48시간이 되는 날의 자정 까지 인정) 

3) 본 문자를 위·변조하거나 사용할 경우, 위·변조한 사람은 물론이고 변조된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도 ‘형법’상 ………… (10년 이하의 징역)…… 

-강원도 ○○○보건소


내 일상을 관장하시는 

나의 주인 살뜰한 기기여 

다시 세계를 하나로 묶어

내 이웃을 곤고히 하시는 황량한 역병이여 

나, 

전장의 한복판에서 헌법을 준수하며 

금지된 것을 동경하고 일탈을 꿈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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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맑아라*


그리도 다정했던 선생님 

시집을 받아 

이레가 지나도록 종종걸음만 치다가 

여우비도 갈팡질팡 길을 놓치는 무더위 

바다로 나갔네


북새통인 모래밭 

와글와글 바닷물을 비낀 곳

사람도 볕도 들지 않아 

이끼와 곰팡이로 얼룩진 모퉁이에 앉아

몇 장 시집을 넘기자

빈 절간에 홀로 든 듯

이 청정함

이 무량함


이미 화엄의 경지에 든 자신을 담금질하듯 

후려치는 경전에 

오소소 한기가 들어 

젖은 눈 들어보니 

상원사 새벽 종소리 

법문으로 듣는 

나무이고 싶다던 선생님


초록의 능선을 가벼이 밟고 선

낙산사 해수관음보살로 오시어 

빙그레 웃으며 다독이시네 

‘그래 그래 내 자네 마음 다 알지’


*이충희 선생님 유고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