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2022년 [시] 금단의 벽 외 10편 / 이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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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지 못하는 진여에게 위로를, 추월하는 것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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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벽
― 격리일기 1
불쑥
수상한 시간이
철없이 찾아들었다
그대,
금줄을 드리워라
내 숨소리가 닿을 수 없도록
내 발자국이 침범할 수 없도록
금단의 벽을 내려다오
밀려 있는 읽을거리며
쌓여 있는 먹을거리
평생의 애인 같은
평생의 원수 같은
핸드폰의 감시에
기꺼이 응하며
나,
열흘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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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줄도 모르고
― 격리일기 2
눈을 맞추며 해맑게 웃고 거리낌 없이 껴안았던 우리에게
달리 거리란 없었다
죄 목 은 밀 접 접 촉
더는 비낄 수 없어
어깨를 붙이고 등을 맞대고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은밀한 가두리가 있어
모르는 사이 한통속이 되는 밀접
지구와 태양의 거리만큼 먼 별들이
뜨거운 이마를 부딪치는
수상한 비밀 같은 접촉
영문을 모르는
어린 손녀 울음소리
하얀 보건소 차를 채우고도 남아
내 가슴을 짓밟으며 간다
이제 나와 핸드폰이 밀접 접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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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 격리일기3
콧물만 비쳐도
재채기만 올라와도
이마가 더워지는 것 같아
삼사일이 고비라는데
탯줄을 가른 위대한 온도 앞에
인류를 재빠르게 포섭한 신흥종교처럼
두 손 모으게 되는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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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 격리일기 4
오늘이 닷새째인 걸 어렵게 기억해 냈다
꿈꾸던 고립의 시간
끼니를 꼬박 챙기고
의미 없이 군것질을 뒤졌으며
시집 두어 권 읽고
핸드폰 배터리가 자주 소진되었다
침대에 불을 지핀 후 몸을 뉘어
편안한 잠자리에 든 후
꿈자리가 어지러운 날은
걱정을 꺼내놓기도 했으나
이대로 백일 견디면
곰으로 되돌아갈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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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 격리일기 5
핸드폰에게 물건 주문을 맡기고
핸드폰에게 멀쩡하다는 보고를 드리고
핸드폰에서 라디오를 꺼내 듣고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며
며칠째 앵앵거리는 성가신 파리 한 마리
쫓다가 포기하고 다시
핸드폰으로 끄적인다
핸드폰아
니가 머리 좀 감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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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닌데
― 격리일기 6
핸드폰에게 고함을 질렀네(참 대단한 열정)
엉겁결에 가게를 떠안은 남편의 불안이
핸드폰 속에 있었기 때문이네
얼마나 힘들겠냐고
고생이 많다고
흩어진 말 대신
무성한 서슬들 건너갔다 건너와
생채기를 내는데, 어이쿠!
이만한 열정이라면 역병도 겁에 질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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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 격리일기 7
사부작이 비 오신다
핸드폰에게 음악을 구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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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 격리일기 8
푸른 절벽 끝에서
물결을 따라가다
낭떠러지 군데군데 걸려 있는
바위를 타고 곰처럼 웅크린 등짝들
순식간에 날개 돋친 바위 하나 푸드덕거리면
그것들의 기울기를 재빨리 가늠해보는 나는
바늘의 향방이 못내 궁금한데
저만치 풀어놓은 짐 더미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
보따리에 넣고 일어서려는데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더는 나아갈 수도
뒤돌아볼 수도 없어
벌겋게 무안해져 화들짝 깨어났다
눈을 뜨고도 몸이 붉어
꿈에서까지 도둑질을 하다니
낚시 바늘이 입속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기웃거린 너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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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 격리일기 9
건물 사이
손바닥만 한 하늘이 걸려 있어
잎 떨군 나무 한 그루 무념에 든
낮게 깔린 회색 구름 위로
점점 붉히는 아침노을
그 너머
해를 받쳐 올리는 물결들을 떠올리며
아침밥을 먹기로 하는데
나뭇가지를 부비는 듯
새 한 마리 날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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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주인님
― 격리일기 10
(발신번호 033-639-0000, 발신일시 21. 12. 00 08:48)
○○○님(여)
코로나19 PCR 검사 결과 음성입니다(검사일자 21. 12. 00)
1) 본 문자는 다중이용 시설 등의 출입을 위한 PCR 음성 확인 용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2) 본 문자를 통한 음성 확인 유효기간은 21. 12. 00 24:00까지 입니다.(문자를 통보받은 시점으로부터 48시간이 되는 날의 자정 까지 인정)
3) 본 문자를 위·변조하거나 사용할 경우, 위·변조한 사람은 물론이고 변조된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도 ‘형법’상 ………… (10년 이하의 징역)……
-강원도 ○○○보건소
내 일상을 관장하시는
나의 주인 살뜰한 기기여
다시 세계를 하나로 묶어
내 이웃을 곤고히 하시는 황량한 역병이여
나,
전장의 한복판에서 헌법을 준수하며
금지된 것을 동경하고 일탈을 꿈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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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맑아라*
그리도 다정했던 선생님
시집을 받아
이레가 지나도록 종종걸음만 치다가
여우비도 갈팡질팡 길을 놓치는 무더위
바다로 나갔네
북새통인 모래밭
와글와글 바닷물을 비낀 곳
사람도 볕도 들지 않아
이끼와 곰팡이로 얼룩진 모퉁이에 앉아
몇 장 시집을 넘기자
빈 절간에 홀로 든 듯
이 청정함
이 무량함
이미 화엄의 경지에 든 자신을 담금질하듯
후려치는 경전에
오소소 한기가 들어
젖은 눈 들어보니
상원사 새벽 종소리
법문으로 듣는
나무이고 싶다던 선생님
초록의 능선을 가벼이 밟고 선
낙산사 해수관음보살로 오시어
빙그레 웃으며 다독이시네
‘그래 그래 내 자네 마음 다 알지’
*이충희 선생님 유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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