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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나무와 까치집 외 9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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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33회 작성일 22-12-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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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빠른 세월에 현기증이 난다

돌아서면 일주일 다시 돌아서면 한 달이다

나이 든 탓일까

엊그제 일 같은데 열흘이 넘었고

작년 일 같은데 재작년 일이란다

남은 세월이 아깝고 아까워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조심조심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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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까치집



거무튀튀한 나무 한 그루

저 위에 까치집 한 채 품었다


옆으로는 겨울 강이 흐르고

매섭고 찬 바람 불어오지만

나무의 품은 따뜻한가 보다

깊은 땅속 따스한 물 열심히 끌어 올려

까치집 온돌을 덥히는 게지


이른 봄

젊은 까치 부부가 부지런히 물어 나른

나뭇가지와 진흙이

저처럼 견고한 집이 되다니


제 몸은 돌보지도 않고

서둘러 저렇게나 빨리 지었을

새끼들을 향한 사랑


까치보다 더 동분서주하며 살으셨을

옛날 내 부모님 생각에

아까부터 가슴팍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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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할머니



옛날 나 어렸을 때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인 줄 알았다


쏜살같은 세월 지나

이제 그 어린아이가 할머니가 되었다

한참의 머뭇거림이 있은 후에야

마지못해 할머니가 된 나는

반쪽 할머니다


내 할머니는

자기가 없는 그냥 할머니였는데

나는

내가 너무 꼿꼿이 살아 있는 어설픈 할머니


그래서

그 손녀딸 할머니는

늘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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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담 이야기



왕비의 눈물인가

손바닥보다 조금 큰 돌연못

그곳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파란 하늘 흘러가는 흰 구름에게

하소연하고픈 마음 다 실어 보냈는데

그래도 못다 푼 왕비의 절절한 한이

다시금 핏빛 눈물로 돌아왔다


지아비가 만들어 준 자그마한 동산

계절마다 예쁜 꽃들 앞다투어 피어나지만

왜놈들 손에 스러져 버린 왕비의 원통함이

오늘 커다란 응어리로 물에 잠겼다


자신의 눈물 속에 누워 버린

붉은 명치 끝


* 낙하담: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있는 아미산의 계단식 화단에 만들어진 돌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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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에서



커다란 몸뚱이가 불 속으로 들어간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몇 줌의 하얀 가루로 돌아와

항아리에 담겨진다

영혼도 그의 긴 삶의 역사도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좁은 항아리 속에서 훨훨 날아가고픈

그의 이성이 소리치는 듯

내 귀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린다


새어 나갈 곳 없는 그의 몸부림이

숨 막혀오는 내 마음과 함께 떨리는 듯

세월이 멈추어 버린 먹먹함이

내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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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 날



주황빛 능소화가 어우러진

아치문을 지나

한여름의 마당에 발을 딛는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매미 울음소리 요란한데

높은 하늘에는 뭉게구름 자매들

한가롭게 마실을 다닌다


저 멀리 보이는 높고 낮은 산들

푸르다 못해 검은빛으로 다가오는

칠월 중순


이 여름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사랑해 보았었나

아니

이웃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 품어 보았었나


가슴속 깊은 곳을 헤집어 보는

몹시도 뜨거운 어느 여름 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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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 그루



버스 정류장 옆 나무 한 그루

며칠 전부터 누렇게 안색이 변하더니

드디어 머리가 한 가닥도 남지 않았다


갈수록 숨쉬기가 힘들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환한 불빛

그리고 소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은 또 얼마였을까


말없이 속앓이만 하다가

이젠 거무스름 알몸만 드러내고

하루 온 종일 멍한 몸짓이다


따스한 태양 빛에 기대어

아련하기만 한 봄소식 기다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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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더럽다고 타박하지도 않고

깨끗이 씻어 주는 물처럼

나도 세상 한구석

말갛게 바꾸어 줄 수 있었으면


부러워하기보다 더 자주 안쓰러워하며

이웃을 다독여 주는 마음이 넘쳐나고

넉넉하기보다 필요한 만큼만 지니고

욕심을 멀리멀리 밀어내는

지혜로움을 지녔으면


파아란 하늘을 고마워하고

더불어

비 내리는 궂은 날씨도 감사할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이었으면


지금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음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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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월지에서



세상 수많은 연못들 중에

가장 작고 서러운 달을 품었다

함지박 같은 조그만 돌연못


땅도 아닌 허공에 떠서


가릴 곳 없는 태양의 뜨거움과

궁궐을 찾는 잦은 발자국 소리에

드러낼 수 없는 울분을 참느라

가슴이 먹먹했는데


늦게나마 살며시 찾아와 준 밤의 적막

그리고 품에 안겨 온 가녀린 초승달

아미산 나뭇가지에 아슬하게 걸린 달이

몇 개의 별들과 더불어 함월지에 누웠다


밤마다 자기를 찾아 주던

지체 높으신 여인의 얼굴이 떠올라

연못은 오늘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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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퍼즐 한 조각을 채우고

잠자리에 든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신 하나님의 그림책

한 조각 두 조각 채워가며

내 삶을 산다


때로는 화려한 웃음의 조각으로

어떤 날은 눈물과 한숨의 가시떨기로

그림을 채우며

내 나이를 따라 살아간다


길을 몰라 헤매일 때도

시간이 멈춘 듯 삶이 지겨울 때도

결국

한 조각 퍼즐을 찾아서

변함없는 따스함으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그분 사랑 안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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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의 삶



아침을 먹으며 점심 반찬을 걱정한다

채소만 올라 있는 밥상은

왠지 죄스럽고 미안해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주부의 삶인가


가끔은

엉뚱한 샛길로 빠져나가

나만이 주인공인 삶을

꿈꾸어 보기도 하지만


젖어 버린 습관 탓인가

나는 또 어느새

저녁 찬거리를 위해

장바구니를 찾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