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2022년 [시] 나무와 까치집 외 9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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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빠른 세월에 현기증이 난다
돌아서면 일주일 다시 돌아서면 한 달이다
나이 든 탓일까
엊그제 일 같은데 열흘이 넘었고
작년 일 같은데 재작년 일이란다
남은 세월이 아깝고 아까워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조심조심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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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까치집
거무튀튀한 나무 한 그루
저 위에 까치집 한 채 품었다
옆으로는 겨울 강이 흐르고
매섭고 찬 바람 불어오지만
나무의 품은 따뜻한가 보다
깊은 땅속 따스한 물 열심히 끌어 올려
까치집 온돌을 덥히는 게지
이른 봄
젊은 까치 부부가 부지런히 물어 나른
나뭇가지와 진흙이
저처럼 견고한 집이 되다니
제 몸은 돌보지도 않고
서둘러 저렇게나 빨리 지었을
새끼들을 향한 사랑
까치보다 더 동분서주하며 살으셨을
옛날 내 부모님 생각에
아까부터 가슴팍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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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할머니
옛날 나 어렸을 때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인 줄 알았다
쏜살같은 세월 지나
이제 그 어린아이가 할머니가 되었다
한참의 머뭇거림이 있은 후에야
마지못해 할머니가 된 나는
반쪽 할머니다
내 할머니는
자기가 없는 그냥 할머니였는데
나는
내가 너무 꼿꼿이 살아 있는 어설픈 할머니
그래서
그 손녀딸 할머니는
늘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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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담 이야기
왕비의 눈물인가
손바닥보다 조금 큰 돌연못
그곳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파란 하늘 흘러가는 흰 구름에게
하소연하고픈 마음 다 실어 보냈는데
그래도 못다 푼 왕비의 절절한 한이
다시금 핏빛 눈물로 돌아왔다
지아비가 만들어 준 자그마한 동산
계절마다 예쁜 꽃들 앞다투어 피어나지만
왜놈들 손에 스러져 버린 왕비의 원통함이
오늘 커다란 응어리로 물에 잠겼다
자신의 눈물 속에 누워 버린
붉은 명치 끝
* 낙하담: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있는 아미산의 계단식 화단에 만들어진 돌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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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에서
커다란 몸뚱이가 불 속으로 들어간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몇 줌의 하얀 가루로 돌아와
항아리에 담겨진다
영혼도 그의 긴 삶의 역사도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좁은 항아리 속에서 훨훨 날아가고픈
그의 이성이 소리치는 듯
내 귀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린다
새어 나갈 곳 없는 그의 몸부림이
숨 막혀오는 내 마음과 함께 떨리는 듯
세월이 멈추어 버린 먹먹함이
내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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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 날
주황빛 능소화가 어우러진
아치문을 지나
한여름의 마당에 발을 딛는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매미 울음소리 요란한데
높은 하늘에는 뭉게구름 자매들
한가롭게 마실을 다닌다
저 멀리 보이는 높고 낮은 산들
푸르다 못해 검은빛으로 다가오는
칠월 중순
이 여름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사랑해 보았었나
아니
이웃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 품어 보았었나
가슴속 깊은 곳을 헤집어 보는
몹시도 뜨거운 어느 여름 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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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 그루
버스 정류장 옆 나무 한 그루
며칠 전부터 누렇게 안색이 변하더니
드디어 머리가 한 가닥도 남지 않았다
갈수록 숨쉬기가 힘들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환한 불빛
그리고 소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은 또 얼마였을까
말없이 속앓이만 하다가
이젠 거무스름 알몸만 드러내고
하루 온 종일 멍한 몸짓이다
따스한 태양 빛에 기대어
아련하기만 한 봄소식 기다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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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더럽다고 타박하지도 않고
깨끗이 씻어 주는 물처럼
나도 세상 한구석
말갛게 바꾸어 줄 수 있었으면
부러워하기보다 더 자주 안쓰러워하며
이웃을 다독여 주는 마음이 넘쳐나고
넉넉하기보다 필요한 만큼만 지니고
욕심을 멀리멀리 밀어내는
지혜로움을 지녔으면
파아란 하늘을 고마워하고
더불어
비 내리는 궂은 날씨도 감사할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이었으면
지금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음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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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월지에서
세상 수많은 연못들 중에
가장 작고 서러운 달을 품었다
함지박 같은 조그만 돌연못
땅도 아닌 허공에 떠서
가릴 곳 없는 태양의 뜨거움과
궁궐을 찾는 잦은 발자국 소리에
드러낼 수 없는 울분을 참느라
가슴이 먹먹했는데
늦게나마 살며시 찾아와 준 밤의 적막
그리고 품에 안겨 온 가녀린 초승달
아미산 나뭇가지에 아슬하게 걸린 달이
몇 개의 별들과 더불어 함월지에 누웠다
밤마다 자기를 찾아 주던
지체 높으신 여인의 얼굴이 떠올라
연못은 오늘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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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오늘이라는 퍼즐 한 조각을 채우고
잠자리에 든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신 하나님의 그림책
한 조각 두 조각 채워가며
내 삶을 산다
때로는 화려한 웃음의 조각으로
어떤 날은 눈물과 한숨의 가시떨기로
그림을 채우며
내 나이를 따라 살아간다
길을 몰라 헤매일 때도
시간이 멈춘 듯 삶이 지겨울 때도
결국
한 조각 퍼즐을 찾아서
변함없는 따스함으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그분 사랑 안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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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의 삶
아침을 먹으며 점심 반찬을 걱정한다
채소만 올라 있는 밥상은
왠지 죄스럽고 미안해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주부의 삶인가
가끔은
엉뚱한 샛길로 빠져나가
나만이 주인공인 삶을
꿈꾸어 보기도 하지만
젖어 버린 습관 탓인가
나는 또 어느새
저녁 찬거리를 위해
장바구니를 찾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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