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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표지판 외 9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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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65회 작성일 22-12-26 17:20

본문

<시간 없다>와 <게으르다>를 같은 문장으로 살아버린 올해.

써 놓은 시가 없어 궁리하다.

아, 시를 어디서 살 수라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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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



유난히 공사가 많은 연말

운전을 하다 보면

곳곳에

<돌아가시오> <위험> 등

대놓고 명령하거나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고

불손하게 경고하고 있는 표지판들


지금이라도 어디든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려

돌아갈 수가 없어

생의 표지판 한 장 없이 여기까지 온 내게

돌아가라니

연말이 되면 내 안에서도 부실 공사 다시 하느라

너무 위태로운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금 간 나를 부추기다니

공사가 위험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위험표지판이다


앞차 뒤차 꽉 막혀

꼼짝없이 도로에 갇혀

독백처럼 내뱉은 헛소리에

혼자 웃다 옆을 보니

옆 차 운전석 남자가 같이 웃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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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대한 긴 오해



내가 태어나는 순간

등을 돌린 등


나는 화해하지 않았다

등 모르게 나는 키득거렸고 남자에게 기댔다

티셔츠 한 장 살 때도 가슴에 맞추었다

첫눈을 맞으며 설렐 때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삼킬 때도

등은 안중에 없었다

나도 등에게 등 돌리고 살았다


한 생을 병상에 부려 놓고

누운 아버지

가벼운 아버지를 끝까지 받들고 있는 것은

서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컴컴한 등

욕창으로 짓무르면서도 아버지를 모시는 등

툭툭, 불거진 야윈 바닥을 읽어 가다

너덜거리는 생을 짊어진 나의 등을 생각한다

서로 볼 수 없는 숙명으로

나를 다독이며 묵묵히 뒤에서 같이 걸어왔을 등


처음으로

등에 어울리는 옷 한 벌 사 입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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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총알 없는

권총 한 자루 같은

일상들

하루

한 달

일 년

.

.

.

시바

이렇게는 못 살겠어

넌 괜찮아?

녹슨 일상 몇 개 장전하여

나를 향해 쏜다

탕!

탕!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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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한 잔의 암호


몰래 하는 키스처럼

깊고 빠르게

어두운 욕망으로 번지는

혀끝의 파멸

한순간 돌아선 너를 찾아 헤매던

막다른 골목 같은


한 모금의 퍼포먼스

한 잔의 어떤 생각

영원히 풀 수 없는 검은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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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만 간단히



외할머니 환갑을 앞두고

엄마는 멀리 사시는 이모와

전화 통화를 하기로 했다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놓고 들었다 놓고 하던 엄마는

갑자기 내 공책 한 장을 뜯어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골똘히 쓰다가

다시 읽어보곤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또 몇 줄 쓰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고쳐쓰기를 여러 번

급기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엄마, 편지 써?

-문디 가시나야, 좀 가만 있그라

내 머리통을 한 대 꽁 쥐어박고는

이윽고

빼곡히 쓴 종이를 들고 비장하게 전화기 앞에 앉았다

큰기침을 한 번 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묵직한 검은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의식을 치르 듯 차르륵 차르륵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이모가 받았다

-언니야 내다 언니 니는 듣고만 있그라이

엄마는 종이에 쓴 글을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빠르게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다 읽은 후,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언니야, 내 말 알았재? 고마 끊는데이

딸깍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엄마의 전화는

절대

용건만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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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옷을 생각하며



살은 안 빠지고 나는 옷만 바꾸었다

그 옷의 솔기에는 빼라 빼라 살 빼라는 말이

실밥처럼 아직도 55사이즈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살을 그 옷이 작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렇듯 이제 나의 살은 이유 없이 찌고 있다

그 옷의 자존심은 나의 허영이고 사치일까

먹지 마 먹지 마 먹지 마라는 말이

잔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뱃살을 흔들고 있지만

나는 그 옷도 그전의 옷도 다 내다 버리고 말았다

다이어트는 안되고 나는 옷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이제 빠지지 않는 살과 뼈와 몸무게

다이어트의 열망을 인생 지표로 삼을 줄 안다

저 날씬함이 혹시 뻥일지도 모르지만

이 열망을 나는 내 삶의 목표로 삼았다

살은 안 빠지고 나는 옷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다시 굶주릴 시간 대신에

달콤한 케익의 유혹만 되살아났지만

옷을 잃고 밥맛을 잃고 야식을 잃고

가벼움을 잃고 희망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몸은 이유 없이 뚱뚱해진다


*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를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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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



비로소 나 오늘 첫 경험을 했네

친정엄마가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 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저물어 가는 하루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번지는

저녁 근처

하루를 품은 해가

절정으로 눈부셔

창문 커튼을 내리다

나도 모르게 터져버린 재채기

순간 하얀 레이스 팬티에

뭉클 쏟아진 노을

세상에,

노을과 관계한 이 새로운 경험이라니

요실금!

나의 첫 경험은 대부분 허리 아래

나의 거기로부터 시작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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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수배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오늘도 그가 온 것 같다

괜찮아,

모르는 척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다


어느 날은 부드럽게

어느 날은 사정없이 거칠게

또 어느 날은 짐승처럼 난폭하게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그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뿐

어떤 이는 그의 이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불행해지기도 하지

그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매번 마음까지 뒤흔드니

이제 그를 지명 수배하고 싶다


그의 죄목은 ‘마음 횡령’

그의 이름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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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방송



지난봄 방송했던 저 목련꽃

멜로 드라마처럼

억지로 슬픔을 남발하다

벚꽃들의 항의로 종영을 앞당기고

결국 주인공들은 추락했다


4월을 인기리에 재방송하는 계절

숨 막히게 등장한 벚꽃들

완전한 분홍을 연기하며

막장 드라마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봄 앞으로 모이게 하더니

지리멸렬한 내용으로 서서히 시청률 떨어지고

이별은 끝내 자막 처리하듯

진부하게 꽃비로 막을 내렸다

매년 재방송되는 봄은

거기서 거기


이젠 봄을 끌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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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크코트 따뜻하세요?



당신이 입고 있는 밍크코트

아기 밍크들의 울음으로 만든 멋진 코트


당신의 허영을 위해

산 채로 가죽이 벗기 울 때

피비린내 나는 몸부림은 고급상표가 되죠

잔혹함을 감추는 유일한 위장은 화려함

긴 밍크코트 한 벌을 위해

아기 밍크 200여 마리를

산 채로 때려죽인다는 사실은

비빌에 부치죠

돈과 욕망도 함께 손을 잡죠


저기

어린 밍크 200마리의 절규를 몸에 감고

한 여자 함박 웃으며 백화점에서 나오네요

밍크코트 따뜻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