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2022년 [시] 표지판 외 9편 / 정영애
페이지 정보
본문
<시간 없다>와 <게으르다>를 같은 문장으로 살아버린 올해.
써 놓은 시가 없어 궁리하다.
아, 시를 어디서 살 수라도 있다면…
------------------------
표지판
유난히 공사가 많은 연말
운전을 하다 보면
곳곳에
<돌아가시오> <위험> 등
대놓고 명령하거나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고
불손하게 경고하고 있는 표지판들
지금이라도 어디든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려
돌아갈 수가 없어
생의 표지판 한 장 없이 여기까지 온 내게
돌아가라니
연말이 되면 내 안에서도 부실 공사 다시 하느라
너무 위태로운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금 간 나를 부추기다니
공사가 위험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위험표지판이다
앞차 뒤차 꽉 막혀
꼼짝없이 도로에 갇혀
독백처럼 내뱉은 헛소리에
혼자 웃다 옆을 보니
옆 차 운전석 남자가 같이 웃어 준다
------------------------
등에 대한 긴 오해
내가 태어나는 순간
등을 돌린 등
나는 화해하지 않았다
등 모르게 나는 키득거렸고 남자에게 기댔다
티셔츠 한 장 살 때도 가슴에 맞추었다
첫눈을 맞으며 설렐 때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삼킬 때도
등은 안중에 없었다
나도 등에게 등 돌리고 살았다
한 생을 병상에 부려 놓고
누운 아버지
가벼운 아버지를 끝까지 받들고 있는 것은
서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컴컴한 등
욕창으로 짓무르면서도 아버지를 모시는 등
툭툭, 불거진 야윈 바닥을 읽어 가다
너덜거리는 생을 짊어진 나의 등을 생각한다
서로 볼 수 없는 숙명으로
나를 다독이며 묵묵히 뒤에서 같이 걸어왔을 등
처음으로
등에 어울리는 옷 한 벌 사 입혀야겠다
------------------------
권태
총알 없는
권총 한 자루 같은
일상들
하루
한 달
일 년
.
.
.
시바
이렇게는 못 살겠어
넌 괜찮아?
녹슨 일상 몇 개 장전하여
나를 향해 쏜다
탕!
탕!
탕!
------------------------
에스프레소
한 잔의 암호
몰래 하는 키스처럼
깊고 빠르게
어두운 욕망으로 번지는
혀끝의 파멸
한순간 돌아선 너를 찾아 헤매던
막다른 골목 같은
한 모금의 퍼포먼스
한 잔의 어떤 생각
영원히 풀 수 없는 검은 허구
------------------------
용건만 간단히
외할머니 환갑을 앞두고
엄마는 멀리 사시는 이모와
전화 통화를 하기로 했다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놓고 들었다 놓고 하던 엄마는
갑자기 내 공책 한 장을 뜯어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골똘히 쓰다가
다시 읽어보곤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또 몇 줄 쓰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고쳐쓰기를 여러 번
급기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엄마, 편지 써?
-문디 가시나야, 좀 가만 있그라
내 머리통을 한 대 꽁 쥐어박고는
이윽고
빼곡히 쓴 종이를 들고 비장하게 전화기 앞에 앉았다
큰기침을 한 번 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묵직한 검은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의식을 치르 듯 차르륵 차르륵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이모가 받았다
-언니야 내다 언니 니는 듣고만 있그라이
엄마는 종이에 쓴 글을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빠르게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다 읽은 후,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언니야, 내 말 알았재? 고마 끊는데이
딸깍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엄마의 전화는
절대
용건만 간단히
------------------------
그 옷을 생각하며
살은 안 빠지고 나는 옷만 바꾸었다
그 옷의 솔기에는 빼라 빼라 살 빼라는 말이
실밥처럼 아직도 55사이즈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살을 그 옷이 작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렇듯 이제 나의 살은 이유 없이 찌고 있다
그 옷의 자존심은 나의 허영이고 사치일까
먹지 마 먹지 마 먹지 마라는 말이
잔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뱃살을 흔들고 있지만
나는 그 옷도 그전의 옷도 다 내다 버리고 말았다
다이어트는 안되고 나는 옷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이제 빠지지 않는 살과 뼈와 몸무게
다이어트의 열망을 인생 지표로 삼을 줄 안다
저 날씬함이 혹시 뻥일지도 모르지만
이 열망을 나는 내 삶의 목표로 삼았다
살은 안 빠지고 나는 옷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다시 굶주릴 시간 대신에
달콤한 케익의 유혹만 되살아났지만
옷을 잃고 밥맛을 잃고 야식을 잃고
가벼움을 잃고 희망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몸은 이유 없이 뚱뚱해진다
*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를 패러디
------------------------
첫 경험
비로소 나 오늘 첫 경험을 했네
친정엄마가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 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저물어 가는 하루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번지는
저녁 근처
하루를 품은 해가
절정으로 눈부셔
창문 커튼을 내리다
나도 모르게 터져버린 재채기
순간 하얀 레이스 팬티에
뭉클 쏟아진 노을
세상에,
노을과 관계한 이 새로운 경험이라니
요실금!
나의 첫 경험은 대부분 허리 아래
나의 거기로부터 시작되니
------------------------
지명 수배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오늘도 그가 온 것 같다
괜찮아,
모르는 척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다
어느 날은 부드럽게
어느 날은 사정없이 거칠게
또 어느 날은 짐승처럼 난폭하게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그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뿐
어떤 이는 그의 이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불행해지기도 하지
그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매번 마음까지 뒤흔드니
이제 그를 지명 수배하고 싶다
그의 죄목은 ‘마음 횡령’
그의 이름은 ‘바람’
------------------------
재방송
지난봄 방송했던 저 목련꽃
멜로 드라마처럼
억지로 슬픔을 남발하다
벚꽃들의 항의로 종영을 앞당기고
결국 주인공들은 추락했다
4월을 인기리에 재방송하는 계절
숨 막히게 등장한 벚꽃들
완전한 분홍을 연기하며
막장 드라마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봄 앞으로 모이게 하더니
지리멸렬한 내용으로 서서히 시청률 떨어지고
이별은 끝내 자막 처리하듯
진부하게 꽃비로 막을 내렸다
매년 재방송되는 봄은
거기서 거기
이젠 봄을 끌까 봐
------------------------
밍크코트 따뜻하세요?
당신이 입고 있는 밍크코트
아기 밍크들의 울음으로 만든 멋진 코트
당신의 허영을 위해
산 채로 가죽이 벗기 울 때
피비린내 나는 몸부림은 고급상표가 되죠
잔혹함을 감추는 유일한 위장은 화려함
긴 밍크코트 한 벌을 위해
아기 밍크 200여 마리를
산 채로 때려죽인다는 사실은
비빌에 부치죠
돈과 욕망도 함께 손을 잡죠
저기
어린 밍크 200마리의 절규를 몸에 감고
한 여자 함박 웃으며 백화점에서 나오네요
밍크코트 따뜻하세요?
- 이전글[시] 스물여덟 겹의 집 외 9편 / 정명숙 22.12.26
- 다음글[시] 나무와 까치집 외 9편 / 양양덕 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