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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스물여덟 겹의 집 외 9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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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40회 작성일 22-12-2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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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다 월요일이 금요일로 금요일이 월요일로 순간이동을 하듯 정신없이 달려가는 시간의 물결을 바라보기도 버거워진다.


천천히 가자. 내 보폭에 맞게.

숨 크게 쉬고 먼지 쌓인 책들을 다시 꺼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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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겹의 집



새벽 한 시

온종일 고요했던 위층이 술렁인다

블라인드 품에서

곤히 잠들었던 바람도 깨어나

화풀이하듯 창틀을 때린다


지붕 위에서 쏟아지는 소변 줄기에 놀란

뒤척이던 잠이

벌떡 일어나 변기 물을 내린다

위층의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날들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고


스물여덟 겹의 지붕과 지붕 사이

잠들지 못한 밤이

불 켜진 창을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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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장마 끝에 내리는 가랑비



일상을 베고 누운

눅눅한 공허가

잠의 구덩이에 나를 눕힌다

두 손을 묶고 두 발을 묶고


시간은 기교를 부린다

월요일이 금요일로 금요일이 월요일로


경계 없는 낮과 밤을 떠돌다

사라진 시간을 추적하던 일상이

허공 가득 무채색 그림을 그리고


목마른 산과 들에 가랑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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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산책 중



만개한 이팝나무꽃 그늘

하얀 꽃잎 닮은 할머니가

까마득한 높이의 아파트를 한참 올려다보다

보행기를 잡고 일어서려고 애를 쓴다


쓰러지고 다시 서기를 반복하는 사이

할머니를 발견한 누군가 달려 내려와

도움의 손길 내밀어도

할머니는 홀로서기를 고집하며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람이 고요를 흔드는 광장에서

유모차를 밀며 꽃구경, 차 구경을 한다


엘리베이터의 버튼 위치를 기억하고

가족들이 집을 비우면 밖으로 나온다는

아흔 넘은 치매 할머니는

요양원에 가기 싫어 열심히 걷기 연습 중이다


다행이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몰라도

창밖 풍경 속 할머니를 지켜보고

지팡이가 되어 주는 따듯한 이웃이 있어서

산책 중인 우리들의 할머니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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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흙을 밟다



아파트 창 너머

저만치 보이는 두어 마지기 밭

내가 눈으로 밟는 유일한 흙이다


사람과 흙이 함께 놀던 골목길

땡볕 속에서도 마냥 신이 났던

골목을 들썩이던 친구들의 함성이

환청으로 뛰어논다


바람 혼자 그네를 타는 놀이터 구석

우레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 게임에 몰입해 있는 아이들

한종일 뛰어놀라고

내 유년의 골목길로 데려가고 싶다


조경을 핑계로

시멘트 블록에 갇힌 나무들

움츠린 뿌리가 가쁜 숨을 몰아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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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지

― 불안한 동거


새 한 마리가

내 목 안에 둥지를 틀었다


자리가 못마땅한지

연신 깃털을 추스르며 짜증을 내다

온몸을 누비며 고열과 근육통을 불러들여

굿판을 벌인다


코로나19라는 새

기세가 꺾여가고 있어

사나흘 앓고 나면 떠난다기에

하루 세 번 한 움큼의 약을 삼키며 버틴다


일상을 접고 누워 있었던 며칠

무리 지어 피어 있던 수선화 할미꽃은 지고

영산홍 패랭이꽃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동거가 끝나는 격리 해제일

불안으로 남아 있는 새의 흔적을

탈탈 털어 날려 보낸다


창밖은 아직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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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내리지 못하는 나무



숲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무들이 있다


시인이 시집을 한번 출간하려면

아름드리나무 열다섯 그루가 필요하다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을 세어보니 169권

169권에 15를 곱하면 2,535그루


내 곁에 오기까지

참 많이도 베어졌구나


햇빛 들어올 틈도 없는 검은 숲

가끔 솎아주기를 하지만

또 다른 시집을 들이게 되고


한 편 두 편 늘어 가는 내 시를 보면서

나는 또 아름드리나무 베어 낼 생각을 한다


폐기물 처리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들

3년 전 내가 베어 낸 나무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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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안 고양이



하얀 솜뭉치에 갈색별 두 개를 박아 놓은 것 같은

페르시안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흐르듯이 드리워진 하얀 털과 동그란 눈이 낯익다.


집 한 채에 여섯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살 때 엄마 따라 드나들던 경배 오빠네 집은 소풍 가서 보았던 경복궁 같았다. 그 큰집 부엌살림을 돕던 엄마가 일 끝나기를 기다리며 꽃나무 그늘에서 혼자 놀다 오빠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 빨개진 오빠는 왼쪽으로 기우는 힘든 걸음을 끌며 도망치듯 사라졌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크고 동그란 눈이 매력적인 경배 오빠는 여덟 살 소녀가 꿈속에서 만나던 동화 속 왕자님… 대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오빠 집에서 혼담이 들어오고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던 애련함이 설렘으로 밀려올 때 우리 엄마, 주워 담을 수 없는 막말을 쏟아 냈다. 절뚝이는 다리로 언감생심… 아버지가 국회의원 두 번 낙선한 게 벼슬이냐고 부자면 신부도 살 수 있냐고, 뿌리째 뽑혀 허공에 던져진 여덟 살 소녀의 물빛 사랑


심한 악취 속에 방치된 채로 버려졌다는

페르시안 고양이 수십 마리

빈 밥그릇과 쌓여 있는 변

극한의 환경에서도

귀부인이라는 명성답게 부드럽고 하얀 털을 유지한 채

떠나간 집사를 기다리고 있다.

유난히 하얀 털이 눈부신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본다.

낯익은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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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늘 그만큼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달빛


가슴 열어 담지 못하고


바라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기다림도 행복이라는


거짓말쟁이 노란 꽃


이슬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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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열다



마음 안쪽 깊은 곳까지 햇살 들인 날

청소를 한다


깨끗이 닦아 낸 어제를 비웃듯

햇살 속을 뛰놀며 수런거리는 먼지들

못 본 척 눈감아 주고


딱지 앉은 슬픔 떼어 낸 자리에

남겨진 붉은 눈물

말끔히 지운다


바람 따라 일렁이는 잿빛 기억은

수압 강한 호스로 씻어 내고

마음의 창 활짝 열어 물기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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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품



우아한 몸짓 

먼지들이 춤을 춘다


스노우볼 속을 유영하는 

금빛 가루처럼


먼지도 

아름다운 무희가 되는구나


햇살의 품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