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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동지 무렵 외 9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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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22-12-2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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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에 들어선 지 스물

몇 해 만에 내 글의 집을 지어 주었다 

그동안 속앓이를 많이도 했던 글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흘리고 다닌 지문을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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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무렵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날

바람이 운다

몸이 아픈지

마음이 추운지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세상을 깨우는 새벽을 향해

윙윙거리며 징징거리며

달려가며 운다

동지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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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늬



세상은 내 것이라고

젊음도 내 편이라고

무작정 가슴을 폈던 날은

부질없이 지나갔고

빈 가슴을 채우던 날은

바람만 가득 찬 풍선이었다


한 생을 살아오는 동안

스치듯 마주치는 따뜻한 눈빛

안으로 품지 못하고

떠밀리듯 걸어온 공허한 길에

남겨진 발자국 눈앞에 어리는데


꽃 지운 잎맥 속에 새겨졌을

나의 무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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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대는 날



일기예보에는

폭설이 내린다고 하는 저녁

눈이 되지 못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데


코로나로 세상은 뒤숭숭하고

여기저기 들려오는 아프다는 소식에

외출도 삼가고 집안에만 있다 보니

매사가 무기력하고 무료하기만 한데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욕도 없이

집안일까지 밀쳐놓으며 하는 말

옛날에도 나라에 역병이 돌 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라는 어르신의 말씀


오늘 나도 그렇게 그렇게

핑계 아닌 핑계를 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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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를 깨우며



입추이건만

물러서지 않는 여름


새벽 다섯 시

산뜻한 바람 안으며

샘터로 가는 길


풀벌레들 일제히

가을을 노래하는데


밤새 안부를 묻는 사람들과

물 한 모금으로

적요를 깨우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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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초록이

너무 짙어

벌레들도 피해버린

쓸쓸한 잎새 몇 장


살아온 날의 몫만큼

색을 내고 있다


뜨거운 날엔 몰랐던

빛깔

참 곱게도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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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류



바다

그리고 파도

그 너머엔

섬이 있고 산도 있다


작은 물들이 여울지며

강물이라는 이름으로 흘러

바다로 들기까지


깊고 먼 생을 서툴게 그렸던

꿈들과 아픔은

세상을 향해 소리치던

어미의 파도였고


제 물살에 취해 목청을 높인 것은

순리를 따라 흐르라는 훈계이었음을


이제는 매를 놓는다

바다는 너의 것이며

세상은 너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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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제 생을 다한 풀들이

시들어가는 밭두렁 가


노랗게 피고 지던

씀바귀꽃


살아온 날의 쓴맛들은

속으로 갈무리하며


오직

씨앗만을 품고 있는

저 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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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소리



몸이 흔들릴 때마다

세상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놓고


메아리로 돌아가는

소리보다 깊은 저 울림


소문의 진원도 모르는

무성했던 외문은

바람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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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덤



명주사 뜰

한 생을 마감한

벚꽃들 무더기로 누워 있다


이대로 묻히지 않으리라

부도 전을 탑돌이로 돌아보지만

끝내

회오리로 다시 돌아와

법당 앞 동종 아래 무덤을 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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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밀물과 썰물

바다였다가 육지로

파랑으로도 닿지 못해

때때로 몸을 바꾸는


분홍 빨강 색색의 연등이

누군가의 소원을 달고 기도를 하는

도량 앞 작은 연못

만월의 동전들 염불을 듣고


스님 기척은 들리지 않고

탑돌이 하는 파도만이 경을 외는

절이 섬이요 섬이 절인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