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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가품(假品)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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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14회 작성일 22-12-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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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과 고백의 문을 드나들며또 한 해의 곳간을 채웠습니다.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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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품(假品)



깜빡거리는 기억의 회로 앞에서

늘어진 가죽을 습관처럼 쓸어올린다


이력을 조회해도 걸릴 게 없고

세상에 하나뿐이니 가품은 아닐 터

왜 자꾸 가방끈은 그늘 쪽으로만 자랄까


젊은 아버지는 오늘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명품이야

명품은 낡을수록 빛이 나야지

닦을수록 깊어지는 어둠을 보고도

또 말씀하시네


어느새 다 자란 나는 가방을 열고

은박지로 접은 별들을 쏟아 낸다

나는 이제 충분히 낡았고

종이 별은 구겨져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아요


가품이 되었어

늙은 아버지 혀를 차며 하늘로 가시고

나는 밀어냈던 이불을 당겨 머리끝까지 덮는다


번제보다 더 뜨거운 기도가

생각을 뛰쳐나왔으나

소리가 되지는 않았다


꿈결에서도 오스스 냉기가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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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



잎 돋던 나무

적막이 성성하다


불벼락에 쓰러져

누운 자리 삼 년


초록은 끝내 기척이 없고

꽃 달고 오시는 봄

맑은 눈 다칠까


서둘러 뼈 공양 들어간

나무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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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지금은 상중(喪中)

하늘이 쏟아 내는 눈물을 본다


너무 울면 망자가 떠나지 못한다는데

살다가 생각나면 가랑비로 울고

그래도 못 잊겠으면 작달비로 울고

사랑하는 사람 그리듯 품어 울면 안 될까


비와 가뭄 사이

가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모았던 두 손이 펴지기도 전

어디선가 또 노제를 지내는지


검게 피워 올린 소리 꽃 뒤로

가다 서다, 서다 가는 구름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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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겠다



지난밤 비바람에 벚꽃이 갔다


열흘도 못 앉을 꽃자리 찾아

겨울을 건너온 여리디여린 것들


잠시 머물다간 생의 자리라서

빈자리는 저렇듯 서늘한 걸까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초록색 알전구 안부처럼 켜놓고

마실 가듯 제집으로 돌아간 꽃


그 자리가 내 자린 줄 이제 알겠다

비우고 채우는 생의 꽃자리


내 자리가 그 자린 줄 이제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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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



꽁꽁 언 흙을 햇살은 내리 쪼고

연두 부리 새싹은 올려 쫍니다

줄탁 줄탁 겨울이 벗겨지면서

말렸던 혀에 피가 도는 봄


해님 덕분이에요

아니에요 고생했어요


기특하게 바라보던 봄

부드러운 혀로

갓 태어난 새싹의 허물을 핥아 줍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벅찬 나는

부풀어 오르는 혀를 가만히 누른 채

줄줄줄 탁탁탁

기쁨을 더하며 그저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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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당신은



꽃이 내 벗이다

빈 세월 눈 속에 우물을 파던 당신


올해도 여전히 꽃들은 오시고

어떤 꽃으로 오셨을까 헤아리는 봄 나절


마음 급해 복수초로 다녀가셨으려나

한여름 능소화로 넌출넌출 오시려나


와도 모르고 가도 모르는 무정한 거리


날 풀려 마음 닿는 꽃길에 서면

길 녹아 꽃 오시는 봄길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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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을 하다가



양말에 작은 구멍이 났다


색실을 들고 앉아 바늘귀를 조준한다

7점 8점 아슬아슬 비껴가는 10점


살아온 날도 늘 허방을 짚었는데

양말 하나쯤 버린다고…


난데없이 객기를 부리다가

고분고분 내력을 따라 다시 겨누는

생의 과녁


감추기 쉽던 어제를 돌아보다가

숨길 곳 없는 오늘을 생각하다가


서둘러 달려온 매듭 앞에서

자국 훑어 편편히 고르는

이 난만하고 천진한 삶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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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매듭은 구속이 아니라 믿음의 증표지

바람은 한쪽뿐인 내 날개를 힘껏 흔들었다

시퍼런 결기가 뼈를 세우면서

빈 어깨에 돋아나던 비상의 화두


날 수 있잖아 날아보라니까

지칠 줄 모르는 바람의 말을 몸으로 받으며

지칠지도 모르는 걸 기어이 해냈을 때

별일 같던 지난 일이

별일 아닌 게 되어 버린 미완의 완성


쇠기러기 길 떠나는 어스름이면

철새는 어느 곳에다 꿈을 펼칠까

어느 쪽으로 날아가 둥지를 틀까

비상은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지만

살갑게도 우화(羽化)는 반쪽 길을 내주었다


어제는 왼쪽으로 오늘은 오른쪽으로

외 날개로 홰를 치는 한 마리 새


나는 그렇게 바람이 만들어 준 완장을 차고

공중을 부양하는 텃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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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도



그대

벌레 먹은 갈잎 되어

바람 깊은 겨울을 건넌 적 있나요


빈 가지 끝

웅크린 채 매달린 한 장의 갈잎처럼

세상 끈 꼭 잡고 울어 본 적 있나요


어둠 속 비추는 은은한 달빛처럼

겨울나무 아래 서서 그저 고요히

마음 한쪽 내주던 눈 붉은 사람


눈길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주는

그 사람 그대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는 울타리의 또 다른 이름

감싸 주며 함께 사는 눈 맑은 사람들

그 사랑 지켜 주는 따뜻한 울타리가

바로 우리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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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시집 속에는



나무를 잘라다가 집 한 채 지었네 

꽃을 꺾어다가 마당을 꾸미고 

구름을 띄워 들판을 만들었네


어느 깊은 밤

책장에서 들리는 검푸른 울음


새들의 상한 날갯죽지가 

흘러가던 강물의 부러진 등줄기가 

아픈 날개를 파닥이며 울고 있었네 

자유롭던 언어의 맑은 영혼들이 

시집에 갇혀 울고 있었네


근육을 잃은 자모의 뼈대들이 

울음의 힘으로 견디고 있는

내 가여운 시의 집


이름 없는 시인의 시집 속에는 

나이테를 잃어버린 나무들이

풀 죽은 시어들이 

살아 보려고, 살아 내려고 

잠긴 문고리를 날마다 흔들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