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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봄날 외 9편 / 장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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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33회 작성일 22-12-26 18:39

본문

허둥지둥대다 가을이 성큼 왔다 

올가을도 두 손 높이 들고 

나무들 앞에서 벌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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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건넌방 할머니

방문한 요양보호사 아줌마에게

저 총각 난닝구 빤즈

가지런히 빨아 널은 거 좀 봐


매일 속옷을 갈아입어도

마음의 때는 벗기기 힘들고

냄새나지 않는 육신이나마

잘 간직하려 하는데

빨래집게가 속옷을 꽉 물듯

어디서 참한 색시 하나

물어와야 되겠는데

환갑 넘은 나를

아직도 총각이라 불러주니

고맙기도 하고 부끄러워라

이 화창한 봄날

비 내리는 날 두꺼비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참한 색시는 못 구하겠고

뒷산에 농염하게 핀

철쭉하고나

눈 맞추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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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드리는 개



개가 참치 통조림을 앞에 두고

앞발을 구부리고

염불을 드리며 불공을 올리다

콧김을 씩씩거리며 잠이 들었다


어슬렁거리던 짚시고양이가

날쌔게 참치 통조림을 채어 갔다


잠이 깬 개가 억울하여

멍멍멍멍 하늘에 짖어대며

부처님을 원망한다


먹을 게 있으면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라 했거늘

환생해 사람으로 태어나긴

틀려도 많이 틀린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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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리



어느 예쁜 아가씨의 이름인가

아니 잘나가는 가수의 이름 같다

심해를 헤엄쳐 올라와

매끄러운 피부가 탄성을 자아내지만

화덕에 등판하면

노래 한 곡조 나올 것 같은데

요리조리 몸을 뒤틀어

하얀 애를 뿜어내는 관능이여

소금 몇 조각 뿌려대

노릿노릿 구워 내면

애주가들을 대취하게 만드는

동해의 절세 미녀

그녀는 죽어서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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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11



아침에 물을 몇 바가지 끼얹고

샤워를 마쳤을 때

매미가 구슬프게 울어댄다

열려진 창문으로

탄력 있는 몸매를 보았노라고

사랑해줄 수 없냐고

하지만 매미의 울음은 육체적인 사랑

내가 갈구하는 건

감언이설이 없는 정신적인 사랑

한여름이 지나자

우리들의 엇갈린 사랑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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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가



사랑아!

왜 이리 더디 오느냐

오다가 돌부리에라도 채웠단 말이냐

거친 바람에게 멱살이라도 잡혔단 말이냐


나의 사랑은 학같이 깊어서

개울물도 잘 건널 텐데

나의 사랑은 반딧불같이 눈도 밝아서

밤길도 잘 걸을 텐데


그런데 왜 이리 더디 오느냐

오다가 마음이라도 변했단 말이냐

오긴 오는 거냐

나 사랑 기다리다가

머리털이 파꽃처럼 하얗게 됐구나

그래도 달팽이같이

시냇가 바위 위에 딱 붙어서

그대 오는 발자국 소리 들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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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은유법



시에 입문하고 오랜 학습 끝에

마침내 직유를 버리고 은유를 배웠다

이렇게 하는데 십여 년이 걸렸다

농사로 치면 직파하는 대신

모종을 심는 것이다

친구들이 변한 내 문장을 알아볼까

조금 맛이 갔다고 하리라

어떤 이는 드디어 도인의 문하생이

됐다고 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은유로 이루어지는 게 많다


사과 상자에 들어가는 것은

꼭 사과만이 아니다


이 문장을

금방 이해했다면

당신은 언젠가 출세할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은유인가?

나는 출세하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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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렷!



동네 떠돌이 개들이 모두 집합해

차렷 자세로

금순네 앞마당에 모여 있다

웬일인가 했더니

금순이가 사료를 한 바가지 들고 있었다

개들은 손과 발을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양반다리로 눈도 고정시켜 부동자세로

금순이의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옥상에서

누가 돈을 뿌렸다는데

그 돈을 주우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고 차도고 간에

마구 뛰어다녔다는데

저절로 하늘을 보고

큰 경배를 올렸다는데


우리 조상 선비들은

웬만한 물욕에 흔들리지 않았다는데

점잖게 목을 늘이고

사료를 기다리는 개들과

날리는 지폐를 쫓아

헐레벌떡 뛰어다녔던 사람들 중에

누가 선비가 되는지는

시시비비 따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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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내 영어 이름은 데이비드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 이름이 없으면 촌스러울 것

같아서

의미도 모르는 채 만들었다


영어 이름을 붙이면

많은 여성들이 따라올 것 같다

세련된 데이비드

잘생긴 데이비드

돈 많을 것 같은 데이비드


국제적인 이름이 하나 더 필요할 것

같다

일본은 한물갔고

중국 이름이 좋겠다

점점 부유해지는 중국

동퍼요라고 역시 뜻도 모르면서

지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린다

빗속에 세종대왕의 슬픔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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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해요



직장에서 은퇴한 아빠

혼자서도 잘한다

분주한 아내는 몇 시간짜리 알바와

주부노래교실에 간다고

차 열쇠를 가져가고

아침에 식탁에서 아내와 마주 보곤

아내가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 청소를 하고

아내의 속옷 등이 섞인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는다

사방이 벽인 아파트 주위를

세탁물을 널며 변한 게 있나 훑어본다

어느덧 점심시간

며칠째 먹는 곰국을 데워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한다

시니어를 위한 일자리 정보를

컴퓨터에서 검색하다

마우스를 집어 던진다

뭉치가 싸놓은 개똥을 치우고

개와 입을 맞춘 다음

다음부터는 제발 정해준 곳에서

용변을 보라고 부탁을 한다

텔레비전으로 야구를 보며 소리를 지르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려

돌 씹듯 우물우물 저녁을 삼켜 넣는다

세탁물을 걷어 아내의 속옷은

따로 단정하게 개어 놓는다

아파트에 불들이 켜지고 한참 지나

약간 술 냄새가 나는 아내가 귀가한다

뭉치가 나를 밀치고

먼저 아내에게 보듬켜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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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 깃발이 있는 골목



미납금 고지서가 나팔꽃처럼 꽂혀 있는 낡은 집들에

오토바이 소년들이 밤샌 별 부스러기를 나눠주듯

번개 대출 명함을 던지고 갑니다

이 골목은 오래전 진화가 멈추었습니다

원시인들이 살았던 동굴처럼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벽화가 남아 있지만

아직 따스한 온기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골목 귀퉁이 찢어진 卍 깃발이 펄럭이는 집에

어두운 표정의 사람이

살가운 보살에게 몇 마디 듣곤 일순 환해진 얼굴로

짓무른 골목길을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민방공 사이렌이 울리자

국수가락같이 여윈 사람들이 불어 터지도록

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순합니다

뼈만 남은 길고양이들이지만 주민들을 대신하여

눈을 치켜뜨고 자기 터라고 갸르릉거립니다

골목길은 마른 잎맥 같아서

상처투성이 지붕들은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잘못하면 빨랫줄에 턱이 걸릴까 봐

어머니가 바지랑대를 걸쳐 줍니다

빨간 금줄이 철거지역임을 드러내지만

어느 세계에서나 희망을 쏘아 올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작은 꿈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오늘도 손수레들이 골목길을 분주히 오고갑니다

역전을 노리는 이 동네의 희망이

장미꽃처럼 담을 넘어 여기저기 얼굴을 내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