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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봄은 어린아이다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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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94회 작성일 22-12-2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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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길다 

바람과의 대화가 늘고 

우주로의 여행이 점점 멀어진다 

그런 끝도 없는 이야기와

먼 곳을 다녀오가도 피곤하지 않으니 

잠이 아까운 밤조차 즐거운 이유이다 

나이 들면 심심해서 그렇다고 누가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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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어린아이다



깊은 산도

오래된 나무도

아기로 시작하는 새순 새 꽃


진분홍 봉오리 터지기 시작하는

복사꽃 나무 아래 서면

나도 웃음 자글거리는 아이가 된다


봄마다

이 세상 누구나

다시 어린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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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환통



흔적만 남은 자리인데

만지면 다시 덧나는 상처

평생을 두고

아물었다 짓무르다 하는

가슴 어디쯤의 환통


앉고 누울 수도 없는

신열과 통증이 극한일 때

가장 순수한 그리움으로

내 상처

다시 덧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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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바위 속초바다


그래서 울산바위는

평생 마주 서 있기로 했다


오늘도 수평선이 잘 그려졌는지

안개구름에 눈을 비비고

초록 치마 늘어뜨린 발꿈치를 들어본다


바다는 자주

선물처럼 붉은 해를 띄워 보내고

설악골 바람 불어 보낸 울산바위

밤마다

속초바다 자장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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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지붕



높은 산들을

사람들은 지붕이라 불렀다

알프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빨갛게 언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린 사람들

저무는 저녁

우리의 눈비 긋기엔 너무 먼 지붕


높은 산들도 지붕이 필요하지 않을까

산의 지붕이 하늘이라면

내 지붕도 하늘이라 하고

시린 손 내리고

그저

오는 눈비 맞으며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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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에 물 주는 시간



이미 달리기 시작한 나그네쥐 떼

바다 절벽은 가까워 오고

체온을 잊은 밀랍 날개

너무 빠르게 날아오르는 이카루스


내 심장은

숫자가 춤을 추는 시한부 박동

이거나 말거나

나는 수국에게 물을 붓는다

보라와 파랑, 그리고 분홍

피어나고 피어나고


누가 절벽에 다다르거나

누가 태양에 다다르거나

그냥

지금은 수국에 물 주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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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의 간절함



간다 간다 하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마십시오

붙잡히고 싶도록 사랑한다는 신호를

놓치지 마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한숨같이 헛나오는 말

지나는 길에 들렀다는 사람을

쉬이 보내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너머의 간절함을 외면한 벌로

온 생애를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부재를 통해서만

그의 소중함을 알아버리기엔

인생은 너무도 짧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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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속초인 바람



봄바람 난 속초 바람


대청봉에서 학사평지나 영금정까지

장사동에서 아바이마을 지나 대포항까지

청초호 휘돌아 영랑호 나들이 길

스카프 치맛자락 다 들추고 달려도

벚꽃은 벚꽃대로 피고 지고

끄떡없이 버티고 선 해송 방풍림


속초가 고향인 사람들은

바람이 바람나는 그 마음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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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은 봄으로 깨어난다



밤 하나를 넘듯

겨울은 봄으로 깨어나고

늘 그런 아침처럼 봄눈을 뜬다


웃고 노래하고 이야기 나누던 생명들

부지런히 오고 떠나는 세상

심장에 손을 얹을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다


뿌리 끝이 간질거리고

수액의 향으로 몸이 기운다


빛의 날들을 지난 우리의 밤은

어디서 깨어나는지


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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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 울타리집 할머니 이야기



싸릿대가 쉬웠다

아무리 촘촘히 엮어도 숭숭한

울타리 둘러 세운 작은 영역

초가삼간 툇마루엔 햇살이 충분했다


울타리 사이로 다 들키는 웃음과 악다구니

목물하는 남자의 몸도 물소리 함께 설핏 보이고

울타리 위로는

이 집 저 집 감나무 돌배 나뭇가지도

너나없이 몸을 섞었다


싸릿대 비집고 소쿠리 음식 오가던 구멍으로

소곤거리던 여인네들의 귓소리 정보

아예 사립문 밀고 쳐들어가기 일쑤였다고

숨넘어가는 소리로 떠들며 웃다 웃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마른 빨래 걷으러 돌아오곤 했다는

자주 들어도 재미있는 옆집 할머니 이야기


단호한 벽 충직한 문

고립이 자유가 되는 딴 세상에서

할머니는 자주

싸리 울타리 옆집으로 마실 다녀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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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벼락



누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가

깊이 숨겨둔 죄의 영상들


무거운 죄벌을 계속 내리나보다

뼛속 깊이 울리는 무서운 판결 망치

밤새도록 온 세상이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푸른 하늘 햇살 눈부신 아침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얼굴이

웃음으로 넘친다

모두 용서받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