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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나를 출판하다 외 9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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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53회 작성일 22-12-2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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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내 삶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세상을 노래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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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출판하다



대하소설이 되기엔

서사가 짧고


로맨스가 되기엔

애절함이 부족하고


스릴러가 되기엔

긴장감이 떨어지고


베스트셀러가 되기엔

이슈가 없고


그냥 가볍게 읽히는

짧은 에세이 몇 편


유명 서점 서가는커녕

동네 서점 귀퉁이에 자리 잡기 힘들어도

오기로

나는

나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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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세상은 

수평을 이룰 수 없어 

한쪽은 하늘로 

한쪽은 땅으로 

기울어진 세상


무거운 몸 실어 주어야 

올라갈 수 있고 

힘을 빼야만 

내려갈 수 있는 것


저물어가는 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두 다리로 적당히 버텨 주고 

엉거주춤 힘을 뺀 채

혼자서 만들어 낸


곧 기울어질 

나만의 수평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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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자물쇠가 달린 철문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디지털문

버튼을 눌러야 되는 반자동문

앞에 서기만 해도 열리는 자동문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모두 달라

건망증과 헷갈림 속에

늘 헛발질이다


생년월일

자동차 번호

전화번호로도 열리지 않는

오래전에 닫힌

내 마음


또 다른 내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저물어 가는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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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법



오래된 나무

높은 둥지에서

원앙새 새끼들이

밑에서 부르는 엄마 목소리 믿고


뚝 떨어지는 일


아리바다

수천 개의 알 중

새의 부리와

악어의 이빨을 피해

바다로 나간


한 마리 거북이가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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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끄적거리는 중입니다만



쓰다가 지우고

끝내 구겨버린 초고

** 스물


넣었다 뺐다

자리 잡지 못한 목차

***서른


꺼내 놓고도 얼굴 붉어진

익지 못한 서문

****마흔


그 많은 새벽을 마주하고도

끝내지 못한 본문

***** 쉰


기껏해야 권말 부록 아니면

별책 부록

****** 예순


길어야 다섯 줄

짧아서 쓰기 더 힘든 편집 후기

*******일흔


더 이상 스토리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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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집이 궁금하다


비 그친

인조 잔디 마당

바람에 떨어진 꽃잎 쓸어 내는데

날개 잃은 벌 한 마리

물방울에 머리 묻고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작은 몸뚱어리

휴지로 염습하는데


우크라이나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잔해 속

아홉 살 소녀와


부서진 철제 다리

무거운 쇳조각에 갇혀

고개 꺾인

열아홉 러시아 병사가

같이 묻어왔다


끝내 돌아가지 못한

그들의 집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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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이유



아들가게 마당 가

봄비가 쑥쑥

풀들을 키워 냈다


풀 좀 뽑지…

지청구가

풀 좀 뽑으라구!

악다구니로 변해서야


게으름과 귀찮다는 말 대신


얘들도 살겠다고

콘크리트 틈새에서

바락바락 올라왔는데

꽃이나 피운 담에

뽑던지 말던지…


나름의 이유를

궁시렁 궁시렁


뽑는 게 아니라

대충대충

풀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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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갑작스런 친구의 부고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봉투 앞에서

모친상 때 받은 지폐 수를 기본값으로 놓고

평소 만남의 횟수와

사회적 체면을

x와 y축으로 한

어려운 방정식의 답만큼 지폐를 세었다


술 한 잔에

죽은 이의 어제가 살아나고

술 석 잔에

살아 있는 이들의 내일로 시끄러웠다


술 먹는 시간만큼의

애도가 끝나고

몇몇은 담요 앞으로

몇몇은 근처의 술집으로

헤쳐 ~ 모여 하는데


끼일 곳 없는

몇몇은

다리 운동을 핑계로


좌향 앞으로

우향 앞으로

뒤로 돌아 가를 외치며

찢어졌다


뒤로 돌아가는 길


비어 있는 의자를 생각하며

정승의 죽음과

정승집 개의 죽음에 관한 옛날이야기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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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탓



미끈거리고 물컹대고 냄새나는

금방 싼 강아지 똥을 치우다

삼 년을 참아온 이대의 울화가

끝내 활화산으로 솟아올랐다


애고 자식새끼 잘못 키워

늘그막에 개똥이나 치우고…


폭풍 오열 속에서도

인대가 늘어난 엄지손가락으로

물걸레질을 멈추지 못하는

구부정한 등허리를 보며


자식 잘못 키웠다고

우리 탓은 말자

저 놈 팔자거니

우리 팔자거니

그냥 살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일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나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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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구분하는 법



전혀 만날 수 없는

그냥 스쳐 가는

이따금 마주치는

이름은 모르지만 눈인사 정도 건네는

만나면 그저 악수만 나누는

오랜만이지만 늘 보고 싶었던

자주 보지만 만나고 싶지 않았던

늘 보고 싶던

매일 눈을 마주쳐야 하는

결코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던


이제 나이가 들자

보고 싶은

보고 싶지 않은


단순 이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