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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속초, 그리고 오벨리스크 외 10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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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92회 작성일 22-12-26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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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가 사라지고 있다. 속초만이 갖고 있던 냄새와 빛깔이 퇴색되고 오래된 마을이 무너지고 있다. 세상이 초를 다투듯 변화고 있다. 고층 아파트와 건물이 스카이라 인이 되어 속초의 하늘이 가려지고 설악산과 바다가 보이질 않는다. 허공을 건너가던 보름달이 콘크리트 벽에 끼어 신음하고 있다. 속초가 낯이 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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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그리고 오벨리스크



바닷가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언제부터인가 속초에 상륙했다


다홍빛 아침 해가 바다를 물들이면

사람들은 태양신을 접견하려고

바닷가에 모여들고

투기꾼들은 깃발 흔들며

바람의 방향 잡기에 분주하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장엄한 불후의 성(城) 망치 소리 따라

바다가 보이고 층이 높을수록

아파트는 미다스 손이 된다

갈매기들이 일제히 피켓 들고

방파제 위에서 아우성치지만


속초, 그리고 오벨리스크

파도들의 벽돌 쌓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오벨리스크: BC1500년 전 이집트 왕들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높이 24m 화강암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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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신음하고 있다



귀에 환청이 들린다

허공을 가로질러 설악을 오르던

보름달이 신음하고 있다


고층 아파트와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와 길 잃은 달이

콘크리트 벽과 벽 사이에 끼어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한때는 산과 바다의 눈부신 배경이 되어

사람들의 그리움과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허공과 땅 넓은 천지를 향유하던

달의 터전이 사라졌다


늦은 밤

일그러진 얼굴로 숨 쉴 수 없다고

달이 신음하고 있다

나도 잠 못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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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흙이 되고 먼지가 되고



벽을 붙잡고 있던 지붕들이

하나 둘 주저앉더니

전시(戰時)도 아닌데 한 마을이 무너진다

이름하여 재개발이라 한다


대문 앞 개 짖던 소리와

식구들 숟가락 부딪던 소리

교회당 찬송가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기억 속 포성 소리와

북쪽 고향 못 잊어 두고 온 이름들

한 마을 웃고 울던 소리들을

포크레인이 연신 토해 놓는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파꽃과 유채꽃들 윙윙대던 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흙더미에 깔린다


전쟁을 삼키고 역사를 삼켜버린

오래된 마을이 사라진 자리에

사막 같은 정적이 회오리칠 뿐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기억 속, 소리 소리들


마을이 지워진 자리에 새 왕국이 건설되고

날개 단 소리들이 번쩍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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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춤을 추고 싶다ㆍ2



은행잎으로 날리던

못다 핀 꽃들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엎드린 채 층층 탑이 된 잎들

밟혀서 몸부림친다


죽음의 귀신을 내쫓던 핼러윈에

150여 송이 눈부신 꽃들이 잠적했다

심폐소생술도 못 해보고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돌아오길 소원하며

양손에 연꽃을 받쳐 들고

가지를 떠난 남은 은행잎들이

둥둥 북소리에 맞춰

허공에서 바라춤 추고 있다


돌아오라고, 돌아오라고


시월 마지막 날

보름달 같은 바라를 들고 둥둥 두둥둥

150여 송이 눈부신 꽃들과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서

질펀하도록 바라춤을 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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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총(言冢)


형체가 없는 말(言)들이 묻혀 있다


바벨탑 보다 높은

말의 탑이 난무하자

사람들은 말(言)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우니

새들과 바람이 조문한다


밤이면 달빛과 별빛이 내려오고

풀벌레 소리와 연둣빛 새소리들이

봉분 위 새싹으로 환생하면


오백 년 흙집에 갇혀 있던

거짓말, 이간질, 화냈던 숱한 말들이

곰삭아 발효되어

세상이 향기 나는 꽃밭으로 만들어질까


정제된 말의 씨앗들이

캄캄함 무덤을 나와

햇살이 되고 노래가 되어

훨훨 공중에 날아다니다가

지상의 반짝이는 별이 될까


* 말(言)무덤 :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있는 언총(言塚)으로 5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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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에 걸렸다



평생 일면식 없이 지내던 등이

얼굴이 보고 싶다며 신호를 보낸다


내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

목소리까지 다 안다고 하며

뒷목을 당기다가 날갯죽지를 비튼다

전류에 감전된 듯 어혈이 접착제로 붙어

오른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움직일 수 없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담에 걸렸다’고 한다


옛 친정집 담(牆) 위에는

밤이면 달과 별이 걸려 있고

낮이면 박 넝쿨과 구름이 걸려 있었는데

날지도 못하는 내 날갯죽지가 담에 걸렸다


한 몸인 등과 얼굴이 모른 척하며

평생을 서로 담(牆) 쌓고 산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며

등이 밤마다 나를 고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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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따다



태양의 피를 수혈 받는다


연분홍 꽃가루 날리던 날

사과나무는 자지러지도록 기침하며

온몸 열꽃을 피웠는데


늦가을 파란 하늘 아래

사과를 쪼던 지빠귀 입술이

불을 물고 날아다닌다


태양이 선혈을 토해 놓은 산비탈

사과 따던

손바닥이 화상을 입었다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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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하는 가방



누구를 만나고

어딜 가야 될지 내 스케줄을

가방이 결정한다


사람한테 가치를 두기보다

디자인과 로고를 보고

가치를 흥정하며 수근거린다


명품 가방이 나를 간섭한다

외출하는 내 신발과 옷차림을 꼼꼼히

챙기며 말할 때도 조신하라고 하며

귓속말로 다른 가방도 주시해보라고

당부하길래


“사람한테는 바코드가 없어서

모두 명품이야”


들은 척도 않는다

어깨를 짓누르며 내 몸과 생각을

자기 멋대로 끌고 다닌다


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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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영랑호 습지 갈대밭 머리

두루미 한 마리 날아든다


허공 끝 불탄 소나무 가지에 앉아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는지

구름을 펼쳐 들고 축문을 읽다가


논바닥으로 내려와

고개 갸웃 벌레 잡다가

다시 엎드려 논에 물을 대고 있다


생전과 다름없으신

흰 바지저고리 등 굽으신 시아버지

여전히 부지런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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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사니의 고백



삐딱하니 초립 쓴 새가

줄 위에서 논다

걷다가 뛰다가 한쪽 발로

줄에 걸터앉다가 다시 일어선다


살아가는 일이 줄타기다

헛디디면 눈 아래가 벼랑인 것을

허공이 집이고 줄은 흔들리는 길이다

바람 따라 구름을 뛰어넘자

출렁 낮달이 발목에 감긴다


날개 펼치듯 부채를 펼치며 혼자

북소리 꽹과리 소리를 끌고 간다

칼끝 같은 줄 위에서 생을 열어가는

초립 쓴 어름사니*


얼쑤

허공에서 수많은 꽃이 피고 지고


*어름사니: 남사당패에서 줄 타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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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한겨울 선짓국을 먹는다 

뚝배기 속 우거지가 속을 풀어 주는데 

숟가락에 뭐가 걸린다. 못이다


벽에 시래기를 걸어 놓았던 못이 

국그릇까지 따라왔다 

끓는 물에서 시래기가 우거지로 

변신할 때까지 견뎌온 모진 집착


겨울바람이 시래기 타래를 흔들며 

벽을 때릴 때 머리채와 어깨 잡아 주던 못

서로 힘들었던 날들을 기억하며 

집착이 상처인 줄 알면서도


뚝배기 속 선짓국까지 따라와 

우거지가 된 시래기 손을 붙잡고 

놓질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