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2022년 [시] 고요 일기 34― 폭염 외 9편 / 지영희
페이지 정보
본문
처음으로 돌아가서
온몸으로 시를 밀고 가야겠다.
------------------------
고요 일기 34
― 폭염
명절 전 동네 목욕탕 수증기가 밀려오는 더위다
신발 밑으로 피하는 길을
깔깔 웃는 라디오에 맡기고
그늘에 발 적시며
햇살 조각들에게 말을 건다
비 오는 날엔 어찌 지내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으로 시작하는
동요 한 병 가득 담아
벌컥벌컥 마신다
미처 마르지 못한 슬픔이
가끔 꿈으로 뒤엉켜 깨는 날이면
두 손으로 껴안고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삶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잉태되는 거잖아
그늘에 젖은 발,
파아란* 마음으로 익어갈 거라는
노래 한 소절을 새로이 꼭꼭 접어 닦아 주는
푸른 폭염
*동요<파란 마음 하얀 마음>
------------------------
고요 일기 37
― 벗겨진 진실
사실 되짚어 보면
절실하게 시를 부를 때가 언제였던가
시인이라 틀에 맞추어 불러 준 그 무렵
책꽂이에 무수히 세워진 시들을 보면 안다
만 시간이 시에 발효될 무렵
가끔 그 시를 읽으면
뼈의 진동이 살아나
어둠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살을 뚫고
질끈 묶은 머리카락 끝을 사뿐히 들어 올린다
곰삭은 별빛에 젖어가는 연필
그 끝으로 흘러나오는 온몸
시는 피다
------------------------
고요 일기 38
― 놀이하듯 살 수 있을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반찬은 뭐*
먹을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묻고 싶다
개구리와 뱀을 식사로 한다면
이미 개구리는 뱀의 식사
아들손자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노래**하는 개구리로 살아있다면
뱀은 이미 죽은 식사
둘 다 살아 있는 식사였으면
목청 좋은 개구리의 노래 소리에
코브라라면 춤추지 않을까
개구리와 뱀
죽었니 살았니*
내 안에 무엇이 살고 있어야
무수히 떠다니는 익명의 삶에 이름이 살게 할까
살았다*
한 판 뒤에 치솟는
나중이 처음 되는 놀이
죽었다 속에 살아나는
*전래동요 <여우야 여우야>(실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일본동요라고 함)
**동요 <개구리>
------------------------
고요 일기 39
― 비 오는 날에는 내가 잘 보여
흔한 날갯짓도 못하고
구름자락에 버둥거리다가
짧은 발걸음으로 비를 피해 잠을 청한다
나뭇가지 하나 주울 것 없는 길을
걷으려 해도 걷어지지 않아 용쓰다가
티비를 켜는 새벽
잘 다듬어진 선 안에
온갖 따뜻한 말들을 진하게 눌러 담아
선명한 색으로 살고 싶어
빗소리만 한 방 가득 휘돌아다니는 날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두고
안녕 인사를 하면
나무 되어 서 있는 빗자국 사이로
환히 웃는 얼굴
낯익다
------------------------
고요 일기 40
― 딱 좋아
이만큼 지내는 것 좋아
창밖
나뭇잎에 내려앉은 촉촉한 별들을 보며
초록 향기를 상상할 수 있어서
나에게 말을 걸 때처럼
모두에게 따뜻한 말만 하고 살 수 있다면
딱 좋을 텐데
사선으로 축축이 젖는 빗줄기에
외로운 아이가 뛰어가고, 씌워주러 뒤따라가고
둘 간격 사이에 수십 년이 뛰어간다
그간의 가르침은 빗길에 미끄러지고
일찍이 비 맞는 연습을 제대로 했다면
정강이까지 물이 튀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딱 좋아
비 오는 날이면
촉촉이 젖어 오는 그 습기가 가르침을 데리고
심장 가까이 오니
이만큼 지내는 것
딱 좋아
------------------------
고요 일기 43
― 한 생애에 걸친 반항이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희망을 품지 않으련다
이루어질 때까지 앞만 보아
딛고 있는 곳이
개미의 허리인지
움푹 패인 길인지
노란 민들레가 홀씨를 품고 있는지도 못 본 채
달아오른 아스팔트 끝만 길게 차지하고 있기에
먼 곳도
새소리에 구름 보며 흥얼대다 보면
가까운 지금이 되는데
부조리한 삶을 그냥 받아들이며 살라고 한 카뮈의 반항을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닥치는 대로 사는 거야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을 충실히 살다 보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카뮈의 말
------------------------
고요 일기 44
― 어머니의 집
어머니께서 불쑥 혼자 살 아파트가 있으면 하셨다
한평생 가족 뜻대로 사시다가
조용히 당신 뜻 문에 세워 두고 싶으셨는지
세상을 넘고서야 한 평도 안 되는 집을 가지게 되셨다
멀리 고즈넉한 산들과 햇살이 맨살로 찾아오는 곳
새로운 이웃이 들어와 어머니가 계시는 층은 곧 가득 찼다
어머니랑 잘 지내세요 외롭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작은 체구지만
먼 곳 장사꾼들이 팔다 남은 물건들을
마루며 처마 밑에 넉넉히 품어 주시던 어머니
백 년 넘는 삶으로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랑은 행동으로, 좋음을 주는 것
풍족하지는 않으셨지만 나누어 줄 것이 항상 많았던
베품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정작 모르셨던 어머니
제일 많이 하신 말
죄 많은 저를 용서하소서
봄 햇살 좋은 날
파란 수국이 꽂힌 작은 정원에 자리를 깔고
가자미 세꼬시 물회를 올린다
-엄마가 가자미 세꼬시를 좋아하시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이 맛집 물회를 한 번도 드리지 못했는지 믹스커피도 한 잔 쭉 들이키시구요 엄마가 보고 싶을 땐 거울을 봐요 오빠들이 내 얼굴에 엄마가 있다나요 이왕이면 내면도 엄마처럼 되고 싶어요
어머니 집은 2단지 1블럭 2단 569번이다
------------------------
고요 일기 49
― 암호는 접촉자
요즘 코로나는 007 작전
암호는 접촉자
진단키트는 붉게 한 줄로 작전명을 보낸다
사람을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뚜렷하지 않아
차라리 나만 수행하면 속 편할 텐데
확진자 대면
마스크로 서로를 숨겼기에
정체를 드러낼 까닭 없다고 하지만
매일 진단키트에
제대로 된 작전을 보내라고 독촉한다
접촉자
오늘도 붉은 한 줄을 꼭 잡고
사이사이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확진자 눈을 피해
혹시
접촉자가 될지 모를 누군가를 피해
------------------------
고요 일기 51
― 아모르 파티 Amor fati
태어나는지도 몰랐습니다
주어진 대로
삶은 시작되었고
선택할 수 있을 즈음엔
모든 시작이 그러하듯
오래도록 그 몫을 온전히 안아야 했습니다
던져버릴 줄도 모르고
힘들다 말할 줄도 모르고
그저 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지금을 깨달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어진 운명보다
원하는 운명 따라가 보니
후회 적은 파티입니다
주어진 삶에서 시작되었지만
사랑할 겁니다
선택한 모든 나를
------------------------
고요 일기 56
―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래
하루 생활계획표를 버릴 때다
새해가 되면
첫 장에 깃발처럼 세우던
진하게 그어 놓은 시간의 경계들
얼마 못 가
영혼에 촘촘히 시간을 쪼개어
재촉하는
생활계획표 수십 장
경계를 진하게 스케치해 놓으면
아무리 깊이 있게 채워도
생기 있는 모습으로 살아나지 않는 소묘처럼
온전한 생명체로 살기 위해
비워야 할 것이 있다면
자유로운 영혼을 잉태할
시간의 덩어리
그 위에 그어진
시각선(線)
- 이전글[시] 집 65 외 9편 / 채재순 22.12.26
- 다음글[시] 식민지 외 10편 / 김영섭 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