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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고요 일기 34― 폭염 외 9편 / 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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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22-12-2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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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서

온몸으로 시를 밀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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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4

― 폭염


명절 전 동네 목욕탕 수증기가 밀려오는 더위다

신발 밑으로 피하는 길을

깔깔 웃는 라디오에 맡기고

그늘에 발 적시며

햇살 조각들에게 말을 건다


비 오는 날엔 어찌 지내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으로 시작하는

동요 한 병 가득 담아

벌컥벌컥 마신다


미처 마르지 못한 슬픔이

가끔 꿈으로 뒤엉켜 깨는 날이면

두 손으로 껴안고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삶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잉태되는 거잖아


그늘에 젖은 발,

파아란* 마음으로 익어갈 거라는

노래 한 소절을 새로이 꼭꼭 접어 닦아 주는


푸른 폭염


*동요<파란 마음 하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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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7

― 벗겨진 진실



사실 되짚어 보면

절실하게 시를 부를 때가 언제였던가

시인이라 틀에 맞추어 불러 준 그 무렵

책꽂이에 무수히 세워진 시들을 보면 안다

만 시간이 시에 발효될 무렵


가끔 그 시를 읽으면

뼈의 진동이 살아나

어둠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살을 뚫고

질끈 묶은 머리카락 끝을 사뿐히 들어 올린다


곰삭은 별빛에 젖어가는 연필

그 끝으로 흘러나오는 온몸


시는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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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8

― 놀이하듯 살 수 있을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반찬은 뭐*


먹을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묻고 싶다

개구리와 뱀을 식사로 한다면

이미 개구리는 뱀의 식사

아들손자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노래**하는 개구리로 살아있다면

뱀은 이미 죽은 식사


둘 다 살아 있는 식사였으면

목청 좋은 개구리의 노래 소리에

코브라라면 춤추지 않을까


개구리와 뱀

죽었니 살았니*


내 안에 무엇이 살고 있어야

무수히 떠다니는 익명의 삶에 이름이 살게 할까


살았다*


한 판 뒤에 치솟는

나중이 처음 되는 놀이


죽었다 속에 살아나는


*전래동요 <여우야 여우야>(실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일본동요라고 함)

**동요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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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9

― 비 오는 날에는 내가 잘 보여



흔한 날갯짓도 못하고

구름자락에 버둥거리다가

짧은 발걸음으로 비를 피해 잠을 청한다


나뭇가지 하나 주울 것 없는 길을

걷으려 해도 걷어지지 않아 용쓰다가

티비를 켜는 새벽


잘 다듬어진 선 안에

온갖 따뜻한 말들을 진하게 눌러 담아

선명한 색으로 살고 싶어


빗소리만 한 방 가득 휘돌아다니는 날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두고

안녕 인사를 하면


나무 되어 서 있는 빗자국 사이로

환히 웃는 얼굴


낯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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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40

― 딱 좋아



이만큼 지내는 것 좋아

창밖

나뭇잎에 내려앉은 촉촉한 별들을 보며

초록 향기를 상상할 수 있어서


나에게 말을 걸 때처럼

모두에게 따뜻한 말만 하고 살 수 있다면

딱 좋을 텐데


사선으로 축축이 젖는 빗줄기에

외로운 아이가 뛰어가고, 씌워주러 뒤따라가고

둘 간격 사이에 수십 년이 뛰어간다


그간의 가르침은 빗길에 미끄러지고

일찍이 비 맞는 연습을 제대로 했다면

정강이까지 물이 튀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딱 좋아


비 오는 날이면

촉촉이 젖어 오는 그 습기가 가르침을 데리고

심장 가까이 오니


이만큼 지내는 것

딱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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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43

― 한 생애에 걸친 반항이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희망을 품지 않으련다

이루어질 때까지 앞만 보아

딛고 있는 곳이

개미의 허리인지

움푹 패인 길인지

노란 민들레가 홀씨를 품고 있는지도 못 본 채

달아오른 아스팔트 끝만 길게 차지하고 있기에


먼 곳도

새소리에 구름 보며 흥얼대다 보면

가까운 지금이 되는데


부조리한 삶을 그냥 받아들이며 살라고 한 카뮈의 반항을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닥치는 대로 사는 거야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을 충실히 살다 보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카뮈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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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44

― 어머니의 집


어머니께서 불쑥 혼자 살 아파트가 있으면 하셨다

한평생 가족 뜻대로 사시다가

조용히 당신 뜻 문에 세워 두고 싶으셨는지


세상을 넘고서야 한 평도 안 되는 집을 가지게 되셨다

멀리 고즈넉한 산들과 햇살이 맨살로 찾아오는 곳

새로운 이웃이 들어와 어머니가 계시는 층은 곧 가득 찼다


어머니랑 잘 지내세요 외롭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작은 체구지만

먼 곳 장사꾼들이 팔다 남은 물건들을

마루며 처마 밑에 넉넉히 품어 주시던 어머니


백 년 넘는 삶으로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랑은 행동으로, 좋음을 주는 것

풍족하지는 않으셨지만 나누어 줄 것이 항상 많았던

베품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정작 모르셨던 어머니

제일 많이 하신 말

죄 많은 저를 용서하소서


봄 햇살 좋은 날

파란 수국이 꽂힌 작은 정원에 자리를 깔고

가자미 세꼬시 물회를 올린다


-엄마가 가자미 세꼬시를 좋아하시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이 맛집 물회를 한 번도 드리지 못했는지 믹스커피도 한 잔 쭉 들이키시구요 엄마가 보고 싶을 땐 거울을 봐요 오빠들이 내 얼굴에 엄마가 있다나요 이왕이면 내면도 엄마처럼 되고 싶어요


어머니 집은 2단지 1블럭 2단 569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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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49

― 암호는 접촉자



요즘 코로나는 007 작전

암호는 접촉자


진단키트는 붉게 한 줄로 작전명을 보낸다

사람을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뚜렷하지 않아

차라리 나만 수행하면 속 편할 텐데

확진자 대면

마스크로 서로를 숨겼기에

정체를 드러낼 까닭 없다고 하지만


매일 진단키트에

제대로 된 작전을 보내라고 독촉한다


접촉자

오늘도 붉은 한 줄을 꼭 잡고

사이사이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확진자 눈을 피해

혹시

접촉자가 될지 모를 누군가를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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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51

― 아모르 파티 Amor fati



태어나는지도 몰랐습니다

주어진 대로

삶은 시작되었고


선택할 수 있을 즈음엔

모든 시작이 그러하듯

오래도록 그 몫을 온전히 안아야 했습니다

던져버릴 줄도 모르고

힘들다 말할 줄도 모르고

그저 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지금을 깨달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어진 운명보다

원하는 운명 따라가 보니


후회 적은 파티입니다


주어진 삶에서 시작되었지만

사랑할 겁니다

선택한 모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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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56

―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래



하루 생활계획표를 버릴 때다


새해가 되면

첫 장에 깃발처럼 세우던

진하게 그어 놓은 시간의 경계들

얼마 못 가

영혼에 촘촘히 시간을 쪼개어

재촉하는

생활계획표 수십 장


경계를 진하게 스케치해 놓으면

아무리 깊이 있게 채워도

생기 있는 모습으로 살아나지 않는 소묘처럼


온전한 생명체로 살기 위해

비워야 할 것이 있다면


자유로운 영혼을 잉태할

시간의 덩어리

그 위에 그어진


시각선(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