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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집 65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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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22-12-26 20:00

본문

밥 익는 냄새, 간장 달이는 내로 꽉 찬 집을 생각한다.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긴 그림자 끌고 온

시간의 길들을 되돌아보곤 한다.


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에게로 돌아왔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리운 이름 부르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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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5



어떤 집을 만났을 때 문득

이 집의 아픈 가지는 뭘까

사람으로 꽉 찬 집을 만났을 때

이 집의 대들보는 누구일까

지붕은, 창문은

집안을 데워주는 이는…까지 가다가

집이 차려놓은 들썩임, 뭉글뭉글 오르는

온기를 따라가네


지그시 깨무는

아픈 가지 하나쯤 없는 집 있을까마는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진

이 집이

미처 열지 못한 마음

막막함을 걷어내고

서로에게 팔을 두르고

지그시 눈을 바라보는

대책 없이 눈부실 바로 그날…까지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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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6



바람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구름과 새, 꽃씨와 사람들

집은 그렇게

떠돌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것들

받아 앉힌 뒤 일가를 이뤄

꽃 피우고 있다

밥 냄새, 간장 달이는 냄새 꽉 찬

집을 완성하고

드디어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후르르 날아 소식 전하며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데

어디서 본 듯 마음이 가는 날

공중엔 봄이

산벚나무 높이로 지나가는 기척으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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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7



같은 바람에도 유난히 흔들리는 나뭇잎

무슨 말 하려고 그리도 살랑거리는지

갈기갈기 찢긴 우듬지를

제 아픔으로 드러내는 자작나무를 생각한다

마음 자작자작 졸아들 듯

발등 내려다보며

거친 시간 건너온 나무껍질 안에

첫눈에 알아채기 어려운 비밀 숨겨져 있다는 걸

짐작할 뿐

나무말통역사를 구한다는 팻말

집 앞에 내걸기 좋은 오후

하고 싶은 말 많아져 마루 끝에 앉아

네가 있는 쪽 향해 입속으로 이름 부르며

몸 기울이게 되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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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8



딱따구리 떠난 집

수척한 기색으로 찾아드는

분홍가슴비둘기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긴 그림자 끌고 온 시간의 길들


집을 가진 나무달팽이

가지 끝까지 가다가

떨어지기도 하는 날들


문득 세상 떠난 네가 그곳에서도

시 쓰고 있는지 묻고 싶은 유월

이곳에서 집 그늘 아래

까치발로 서 있던 모습 떠올라 글, 썽


나무 그늘 어룽지는 서쪽을

사무치게 바라보다

안개 낀 자작나무 숲을 지나

건너가고 싶은 가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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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9



오랜 선회비행 끝에

추운 지방 철새들 몰려 앉은 들판

그 너머 서쪽 바다 바라보던 너

기억하기 위해 아니 망각하기 위해

담고 또 담는 하루

가만히 흐린 하늘 지켜보고 서서

함께 시간 나누던 그 자리


아침 오기 전의 호수 물결,

저녁 오기 전 숲의 수런거림 들으며

뜨겁게 피어나는 순간이 있는

격자무늬 창으로 스미는 달빛 마주하고

아직도 할 얘기 많아 숱하게 지새던 밤


바닥을 놓고, 창을 내고

다음은 지붕 얹을 차례

마음 살림들 늘어가는 때

그 사이사이 목소리,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이것들로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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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0



아무리와 함께 살아온 날들이었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서로 다독이며

채워주고, 밀어주며 고개 끄덕여 준 시간들

시래깃국 한 그릇 뜨며 세상 설움을 들어준 밥상

아득한 마음에 슬몃 손 얹자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날들


절벽 앞에서도 집 생각에

귀담아들으라는 말 귓등으로 흘리던 날들 후회하며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장칼국수 냄새로 꽉 들어찬 골목

혼자 걷는 순간에도 곁에 있어 준 아무리

방금 도착해 손잡아 주는 노을 지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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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1



바람 잘 날 없는 날이었지요

그런 날엔 뒷산에 올라

버덩을 내려다보며

바람이 오는 곳에 대해 골몰했지요

옆구리 받힐 때마다

눈물겨운 시간들 다독여 주던

텃밭 가에 우뚝 서 있던 노간주나무 긴 그림자

손 어루만져 주던 오래된 문고리


내심 마음 읽어 주길 기다렸지만

번번이 어두워진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얼마나 기억해 줄 것인가

그런 날은 왜 그리도 별은 반짝이던지

무뚝뚝한 세계에 대해 생각하다

간신히 가슴에 손 얹고 잠을 청하던 밤

등을 덥혀 주던 방바닥

달빛에 꽃잎 도드라진 창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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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2



무엇이든 움켜쥐려는 손을 내려놓고

사방으로 가려는 발을 묶어 놓고

먼 산 보는 사이

가을이 오고 있다


숱한 풍경을 스치면서

설친 마음을 데리고 자율격리 중

집 밖으로 한발도 나갈 수 없어서

가을우체국에 가지 못해

네게 마음만 부쳐 놓고

풀벌레 소리 배경으로

방금 따온 무화과를 곁에 놓고

국수를 삶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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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3



철 이른 낙엽 한 장

숨 고르고 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몇 개의 계절을 건너오느라 힘겨웠는지

생강나무에 잠시 몸 기댄 채

가만히 비추는 아침햇살에

찬란해진 떡갈나무잎


길들은 둥근 무덤 곁으로 이어지고

가랑잎꼬마거미는 벼랑에 집을 짓고도

허공에 그물 치기에 바쁜데


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에게로 돌아왔는가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글썽였다,

내가 나를 잊은 적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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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4



오솔길 걷다 만난 무덤가엔

구절초 떠들썩 피어나고

방금 떨어졌는지 떡갈나무잎 찬란한데

구름은 저만치 남겨 두고 집으로 들어왔다


발바닥이 아프도록 걸어갔다가

꽃 피우는 일에 골몰하다

신발에 들러붙은 흙을 털면서

세상 모퉁이 돌아돌아 왔다


구름의 긴 이야기는 다음에 더 듣기로 하고

나의 절반쯤만 집으로 돌아온 저녁

잘 왔다고 새가 후루룩 날아들고

풀씨 떨어진 마당엔

받아 주는 기척으로 떠들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