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2022년 [시] 집 65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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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익는 냄새, 간장 달이는 내로 꽉 찬 집을 생각한다.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긴 그림자 끌고 온
시간의 길들을 되돌아보곤 한다.
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에게로 돌아왔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리운 이름 부르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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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5
어떤 집을 만났을 때 문득
이 집의 아픈 가지는 뭘까
사람으로 꽉 찬 집을 만났을 때
이 집의 대들보는 누구일까
지붕은, 창문은
집안을 데워주는 이는…까지 가다가
집이 차려놓은 들썩임, 뭉글뭉글 오르는
온기를 따라가네
지그시 깨무는
아픈 가지 하나쯤 없는 집 있을까마는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진
이 집이
미처 열지 못한 마음
막막함을 걷어내고
서로에게 팔을 두르고
지그시 눈을 바라보는
대책 없이 눈부실 바로 그날…까지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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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6
바람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구름과 새, 꽃씨와 사람들
집은 그렇게
떠돌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것들
받아 앉힌 뒤 일가를 이뤄
꽃 피우고 있다
밥 냄새, 간장 달이는 냄새 꽉 찬
집을 완성하고
드디어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후르르 날아 소식 전하며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데
어디서 본 듯 마음이 가는 날
공중엔 봄이
산벚나무 높이로 지나가는 기척으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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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7
같은 바람에도 유난히 흔들리는 나뭇잎
무슨 말 하려고 그리도 살랑거리는지
갈기갈기 찢긴 우듬지를
제 아픔으로 드러내는 자작나무를 생각한다
마음 자작자작 졸아들 듯
발등 내려다보며
거친 시간 건너온 나무껍질 안에
첫눈에 알아채기 어려운 비밀 숨겨져 있다는 걸
짐작할 뿐
나무말통역사를 구한다는 팻말
집 앞에 내걸기 좋은 오후
하고 싶은 말 많아져 마루 끝에 앉아
네가 있는 쪽 향해 입속으로 이름 부르며
몸 기울이게 되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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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8
딱따구리 떠난 집
수척한 기색으로 찾아드는
분홍가슴비둘기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긴 그림자 끌고 온 시간의 길들
집을 가진 나무달팽이
가지 끝까지 가다가
떨어지기도 하는 날들
문득 세상 떠난 네가 그곳에서도
시 쓰고 있는지 묻고 싶은 유월
이곳에서 집 그늘 아래
까치발로 서 있던 모습 떠올라 글, 썽
나무 그늘 어룽지는 서쪽을
사무치게 바라보다
안개 낀 자작나무 숲을 지나
건너가고 싶은 가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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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9
오랜 선회비행 끝에
추운 지방 철새들 몰려 앉은 들판
그 너머 서쪽 바다 바라보던 너
기억하기 위해 아니 망각하기 위해
담고 또 담는 하루
가만히 흐린 하늘 지켜보고 서서
함께 시간 나누던 그 자리
아침 오기 전의 호수 물결,
저녁 오기 전 숲의 수런거림 들으며
뜨겁게 피어나는 순간이 있는
격자무늬 창으로 스미는 달빛 마주하고
아직도 할 얘기 많아 숱하게 지새던 밤
바닥을 놓고, 창을 내고
다음은 지붕 얹을 차례
마음 살림들 늘어가는 때
그 사이사이 목소리,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이것들로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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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0
아무리와 함께 살아온 날들이었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서로 다독이며
채워주고, 밀어주며 고개 끄덕여 준 시간들
시래깃국 한 그릇 뜨며 세상 설움을 들어준 밥상
아득한 마음에 슬몃 손 얹자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날들
절벽 앞에서도 집 생각에
귀담아들으라는 말 귓등으로 흘리던 날들 후회하며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장칼국수 냄새로 꽉 들어찬 골목
혼자 걷는 순간에도 곁에 있어 준 아무리
방금 도착해 손잡아 주는 노을 지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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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1
바람 잘 날 없는 날이었지요
그런 날엔 뒷산에 올라
버덩을 내려다보며
바람이 오는 곳에 대해 골몰했지요
옆구리 받힐 때마다
눈물겨운 시간들 다독여 주던
텃밭 가에 우뚝 서 있던 노간주나무 긴 그림자
손 어루만져 주던 오래된 문고리
내심 마음 읽어 주길 기다렸지만
번번이 어두워진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얼마나 기억해 줄 것인가
그런 날은 왜 그리도 별은 반짝이던지
무뚝뚝한 세계에 대해 생각하다
간신히 가슴에 손 얹고 잠을 청하던 밤
등을 덥혀 주던 방바닥
달빛에 꽃잎 도드라진 창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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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2
무엇이든 움켜쥐려는 손을 내려놓고
사방으로 가려는 발을 묶어 놓고
먼 산 보는 사이
가을이 오고 있다
숱한 풍경을 스치면서
설친 마음을 데리고 자율격리 중
집 밖으로 한발도 나갈 수 없어서
가을우체국에 가지 못해
네게 마음만 부쳐 놓고
풀벌레 소리 배경으로
방금 따온 무화과를 곁에 놓고
국수를 삶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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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3
철 이른 낙엽 한 장
숨 고르고 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몇 개의 계절을 건너오느라 힘겨웠는지
생강나무에 잠시 몸 기댄 채
가만히 비추는 아침햇살에
찬란해진 떡갈나무잎
길들은 둥근 무덤 곁으로 이어지고
가랑잎꼬마거미는 벼랑에 집을 짓고도
허공에 그물 치기에 바쁜데
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에게로 돌아왔는가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글썽였다,
내가 나를 잊은 적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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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4
오솔길 걷다 만난 무덤가엔
구절초 떠들썩 피어나고
방금 떨어졌는지 떡갈나무잎 찬란한데
구름은 저만치 남겨 두고 집으로 들어왔다
발바닥이 아프도록 걸어갔다가
꽃 피우는 일에 골몰하다
신발에 들러붙은 흙을 털면서
세상 모퉁이 돌아돌아 왔다
구름의 긴 이야기는 다음에 더 듣기로 하고
나의 절반쯤만 집으로 돌아온 저녁
잘 왔다고 새가 후루룩 날아들고
풀씨 떨어진 마당엔
받아 주는 기척으로 떠들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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