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2022년 [시] 싱겁다와 심심하다 사이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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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로 기상은 요란한 이변을 속출하고, 지구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을 계속한다. 그래도 <갈뫼>는 어김없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우리는 아름다운 글로 동인지를 만들자고 예년처럼 원고 마감일과 씨름을 한다. 평화로운 세상은 쉽게 오지 않더라도 갈뫼 산을 지키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입회원들이 계속 들어와서 이 어려운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좋은 메시지를 많이 전해주길 기대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문학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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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겁다와 심심하다 사이
몸에 좋다고
싱겁게 먹으라 한다
평생을 간 맞춰 먹던 사람에게
싱겁게 먹기란 힘들다
장마철 복숭아가 싱겁다고들 한다
햇볕은 못 보고
물에 젖어 살았으니
싱겁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꾸 싱겁게 먹으면
심심해진다
심심할 날이 없는 아이들이
마당 가득 몰려와
소란하게 웃어젖힐 만한 날
싱겁게 먹어서
이제부터 심심해질 사람이
혼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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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순 심기
고구마순을
모래땅에 꽂는다
뿌리도 없는 줄기
온몸으로 물기를 빨아들여
잎을 세우고 뿌리를 키워
불그레한 가슴을 키워 내라고
바싹 마른 밭고랑에
꽂아 넣는다
마른 땅에 터 잡고
볼 발그레한 아들딸 키워 낸
그 사람 하던 대로
고구마순 두어 단 풀어서
한 뼘 거리씩 종종걸음
걸어가게 했다
푸르디푸른 그리움
한 줄로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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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나물
성인봉 자락 아래
바닷냄새 나는
해산물 좌판 늘어선 마을
오징어 덕장에 매달려
꽃다운 나이 보냈다는 그 사람
부지깽이나물로 배 채웠다
바람 따라 날아왔는지
파도에 밀려왔는지
뭍으로 건너온 아낙네
덩달아 따라온 푸른 숨결들
울타리 아래 가득한 파도 소리로
부지깽이도 자리 잡았다
소금기로 절인 땅에서
꺾으면 다시 돋던 힘
단단히 뿌리내리고
사철 싱싱하게 살아가는
사람 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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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없는 고양이
밤새워 싸우는 소리가 났고
이른 아침
귀 뜯긴 고양이가 마당에 왔다
전사의 모습이다
느릿한 발걸음
약간은 치켜든 고개
배가 불룩한 암고양이는
사료통 앞에서도 서둘지 않는다
물려받은 땅 지키자고
침입자와 처절하게
싸움하는 중
판세는 기울어졌는데
어쩌자고 도망가지 않고
피를 흘린다
한쪽 귀는 내줘도
새끼 살아갈 이 땅
뺏길 수 없다고
오늘 밤도 남은 귀를 걸고
치열한 전쟁을 치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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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기
일단은 약하다
삼단은 너무 세다
늘 중간을 선택하였다
어깨를 두드리고
허리를 돌아다니다가
종아리에서 불꽃 마무리한다
말이 그렇다
너무 작으면 들리지 않고
세면 허공만 맴돈다
간절하게 두드리고
따뜻하게 보듬어주어야
굳은 땅껍질 뚫고
씨앗 말
하나둘 움튼다
엉뚱한 곳 두드리면
마음이 멍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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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선풍기
저게 무슨 바람을 만들까?
그 사람에게
앙증맞은 손 선풍기 안겼다
아주 약한 바람이 다가와
귓속으로 작은 소식을 전했다
처음엔 손바닥만큼 시원터니
차츰 마음이 시원해졌다
어깨에 매달려
부채질로 이마 땀 식혀주던 아이
아버지에게
이 작은 바람 한 점 보내 놓고
뭐라 뭐라 그러면서
혼자 웃고 있을
만년 여섯 살짜리 아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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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라고
스물다섯 평 지하방을
채우고 있는 것들
까마득한 날
어디선가 부끄럽게 걸렸을
시화 몇 점
저게 뭐라고 지금도 있나?
첫 직장에서 월부로 샀을
낡고 냄새나는
오십 권짜리 문학 전집
저것도 뭐라고 아직도 있나?
새벽마다 나갔던 조기회
어쩌다 받은 트로피
아직도 번쩍거리며
선반 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버지가 쓰시던 등긁개
어머니가 닦았던 옹기 항아리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레고 상자
언젠간 정리해야 할
켜켜이 쌓인 곳
이십오 평 지하방
그보다 깊은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덧없고 시시한 거
한 줌 거리도 안 되는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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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이 시원하다
시화전시실 혼자 지킨다
무더위에 방문객은 없고
에어컨 작동법이 서툰 죄로
땀만 쏟는다
미화원 아주머니가
그것도 모르냐고
전원 켜고 조절장치 누른다
시원해진 전시실
온 김에 시 보고 가시라니
짧은 시 한 편 읽고는
바로 나갔다
한나절 내내 전시실은
시원한 바람과
시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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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보내고 싶은 날
농촌에서도
택배가 대세다
일 년치 농산물도
거의 택배로 처리한다
이런저런 마음 나눌 지인들에게
주소 하나 불러주면
손도 안 대고 마음을 전달한다
옥수수가 제철이라고
몇 군데 주소를 찾던 아내가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붙잡고 있다
삭제된 주소 밑의 이름 하나
뽀얀 옥수수 알만큼이나
반듯하게 살았던 언니
그립다 참 그립다
채우지 못한 자루 하나도
보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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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는 길
휴게소에서
한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한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지금의 바람은
그저 커피 한 잔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것
서로가 눈치채고
손을 잡는다
소중한 날이 오늘뿐이랴
하루하루가 그런 날이라고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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