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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2022년 [시] 싱겁다와 심심하다 사이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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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45회 작성일 22-12-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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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로 기상은 요란한 이변을 속출하고, 지구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을 계속한다. 그래도 <갈뫼>는 어김없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우리는 아름다운 글로 동인지를 만들자고 예년처럼 원고 마감일과 씨름을 한다. 평화로운 세상은 쉽게 오지 않더라도 갈뫼 산을 지키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입회원들이 계속 들어와서 이 어려운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좋은 메시지를 많이 전해주길 기대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문학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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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겁다와 심심하다 사이



몸에 좋다고

싱겁게 먹으라 한다

평생을 간 맞춰 먹던 사람에게

싱겁게 먹기란 힘들다


장마철 복숭아가 싱겁다고들 한다

햇볕은 못 보고

물에 젖어 살았으니

싱겁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꾸 싱겁게 먹으면

심심해진다


심심할 날이 없는 아이들이

마당 가득 몰려와

소란하게 웃어젖힐 만한 날


싱겁게 먹어서

이제부터 심심해질 사람이

혼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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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순 심기



고구마순을

모래땅에 꽂는다


뿌리도 없는 줄기

온몸으로 물기를 빨아들여

잎을 세우고 뿌리를 키워

불그레한 가슴을 키워 내라고

바싹 마른 밭고랑에

꽂아 넣는다


마른 땅에 터 잡고

볼 발그레한 아들딸 키워 낸

그 사람 하던 대로

고구마순 두어 단 풀어서


한 뼘 거리씩 종종걸음

걸어가게 했다

푸르디푸른 그리움

한 줄로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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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나물



성인봉 자락 아래

바닷냄새 나는

해산물 좌판 늘어선 마을


오징어 덕장에 매달려

꽃다운 나이 보냈다는 그 사람

부지깽이나물로 배 채웠다


바람 따라 날아왔는지

파도에 밀려왔는지

뭍으로 건너온 아낙네


덩달아 따라온 푸른 숨결들

울타리 아래 가득한 파도 소리로

부지깽이도 자리 잡았다


소금기로 절인 땅에서

꺾으면 다시 돋던 힘

단단히 뿌리내리고

사철 싱싱하게 살아가는

사람 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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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없는 고양이



밤새워 싸우는 소리가 났고

이른 아침

귀 뜯긴 고양이가 마당에 왔다


전사의 모습이다

느릿한 발걸음

약간은 치켜든 고개

배가 불룩한 암고양이는

사료통 앞에서도 서둘지 않는다


물려받은 땅 지키자고

침입자와 처절하게

싸움하는 중


판세는 기울어졌는데

어쩌자고 도망가지 않고

피를 흘린다


한쪽 귀는 내줘도

새끼 살아갈 이 땅

뺏길 수 없다고

오늘 밤도 남은 귀를 걸고

치열한 전쟁을 치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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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기



일단은 약하다

삼단은 너무 세다

늘 중간을 선택하였다


어깨를 두드리고

허리를 돌아다니다가

종아리에서 불꽃 마무리한다


말이 그렇다

너무 작으면 들리지 않고

세면 허공만 맴돈다


간절하게 두드리고

따뜻하게 보듬어주어야

굳은 땅껍질 뚫고

씨앗 말

하나둘 움튼다


엉뚱한 곳 두드리면

마음이 멍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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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선풍기



저게 무슨 바람을 만들까?

그 사람에게

앙증맞은 손 선풍기 안겼다


아주 약한 바람이 다가와

귓속으로 작은 소식을 전했다


처음엔 손바닥만큼 시원터니

차츰 마음이 시원해졌다

어깨에 매달려

부채질로 이마 땀 식혀주던 아이


아버지에게

이 작은 바람 한 점 보내 놓고

뭐라 뭐라 그러면서

혼자 웃고 있을

만년 여섯 살짜리 아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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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라고



스물다섯 평 지하방을

채우고 있는 것들


까마득한 날

어디선가 부끄럽게 걸렸을

시화 몇 점

저게 뭐라고 지금도 있나?


첫 직장에서 월부로 샀을

낡고 냄새나는

오십 권짜리 문학 전집

저것도 뭐라고 아직도 있나?

새벽마다 나갔던 조기회

어쩌다 받은 트로피

아직도 번쩍거리며

선반 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버지가 쓰시던 등긁개

어머니가 닦았던 옹기 항아리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레고 상자


언젠간 정리해야 할

켜켜이 쌓인 곳

이십오 평 지하방

그보다 깊은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덧없고 시시한 거

한 줌 거리도 안 되는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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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이 시원하다



시화전시실 혼자 지킨다

무더위에 방문객은 없고

에어컨 작동법이 서툰 죄로

땀만 쏟는다


미화원 아주머니가

그것도 모르냐고

전원 켜고 조절장치 누른다


시원해진 전시실

온 김에 시 보고 가시라니

짧은 시 한 편 읽고는

바로 나갔다


한나절 내내 전시실은

시원한 바람과

시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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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보내고 싶은 날



농촌에서도

택배가 대세다


일 년치 농산물도

거의 택배로 처리한다


이런저런 마음 나눌 지인들에게

주소 하나 불러주면

손도 안 대고 마음을 전달한다


옥수수가 제철이라고

몇 군데 주소를 찾던 아내가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붙잡고 있다


삭제된 주소 밑의 이름 하나

뽀얀 옥수수 알만큼이나

반듯하게 살았던 언니

그립다 참 그립다


채우지 못한 자루 하나도

보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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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는 길



휴게소에서

한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한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지금의 바람은 

그저 커피 한 잔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것


서로가 눈치채고 

손을 잡는다 

소중한 날이 오늘뿐이랴 

하루하루가 그런 날이라고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