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2023년 [2023 신입회원작품] 벚꽃 밥상 외 2편 / 박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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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엔 피붙이들이 남긴 흔적들이 사방에 널여 있다. 낙엽을 줍듯 일상을 되돌려 놓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가을이다.
시도 내 피붙이라 한동안 챙기지 못해 마음이 짠하다. 이 가을엔 내 마음도 따뜻하고 넉넉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詩를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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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밥상
흐드러진 봄날
친구와 밥을 먹습니다
오늘 한 끼 밥상은
만약에 내가 먼저 이승을 떠나면
이 쓸쓸한 홀아비 친구의 문상을 가지 못하는 미안한 일이 생길지도 모를 그때를 생각해서 마주 앉은 자리입니다
저승 가는 몇 푼 노잣돈보다
생전의 밥 한 끼가
참 따뜻합니다
창밖에는 어제 핀 벚꽃이 지고
속절없이 봄이 가도
마냥 웃으며 밥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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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리 까다
노가리가 명태의
적자嫡子다
아니다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가짜면 잡아먹어도 좋고 진짜면 보호해야 한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는 동안
사람들은 노가리 까면서
동해의 장손 노가리를 씨도 안 남기고
뜯고
씹고
먹어 치웠다
설마가 어미를 잡았지
노가리란 오명으로 명태가 떠나고 남자도 떠나고 사랑도 떠나고 간절한 눈빛이 윤슬로 오는 아침 바다
밤늦도록 노가리 안주로 쌩 노가리 까던
그 아픈 인생들도 사라지고
노가리 냄새만 짙게 남은
아야진 목로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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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
우리 아버지는
이북에서 피난 나올 때
쌀 서 말 지고 왔는데 그게 본전이라고
때마다 노래를 불러
남이 들으면 통이 꽤 큰 것 같았어도
제사 때 식구들이 모이면
구두쇠 영감이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래도 아버지의 구두 밑창이 빨리 닳을수록 식구들은
보릿고개도 쉽게 넘어갔다는데
장가들고 딱 한 번 노름방에 출입했다 된맛을 본 아버지는 그때의 본전 생각이 평생 파편으로 남은 걸까
본전이 쌀 서 말이라고
힘들 때마다 큰 소리 땅땅 치시던 아버지
기실 목도리도마뱀이었다
태어날 때 달랑 고추 하나 달고
알몸으로 태어난 나도
큰 소리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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